이제부턴 원유 확보 경쟁… ‘에너지 청구서’는 계속 날아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현지 시각) 이란과의 종전 합의와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선언하면서 국제 에너지 시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표 직후 국제유가가 급락했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중동발 에너지 위기가 최악의 국면은 넘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국내 에너지 전문가와 정유·전력 업계는 “진짜 청구서는 이제부터 날아들기 시작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글로벌 경제 전문 매체들과 에너지 싱크탱크들의 진단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쟁에 따른 충격을 흡수했던 ‘비상 메커니즘’이 해제되면서, 소진된 원유 재고를 다시 채우기 위한 경쟁과 LNG(액화천연가스) 가격 급등에 따른 전력시장 비용 증가 등이 시차를 두고 하반기 에너지 시장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다.
◇공급망 정상화는 먼 길
이번 전쟁 기간 국제유가는 90달러대를 유지하며 예상 밖으로 안정적이었다. 이는 서구 수입국들이 전략비축유(SPR)를 사상 최대 규모로 방출하고 기존 재고를 소진하는 방식으로 공급 감소에 대응한 덕분이다. 수요 면에서도 공장 가동을 줄이고 소비를 억제하는 ‘수요 파괴’가 작동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 중국도 비싼 현물 구매를 멈춘 채 기존 상업 재고로 버텼다.

실제 미 에너지정보청(EIA) 등에 따르면,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이달 초 4억2648만 배럴, 전략비축유는 3억4919만 배럴로 전쟁 직전 대비 각각 1282만 배럴, 6625만 배럴 급감했다. OECD(경제협력기구) 회원국의 석유 재고는 통계 작성 이후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 중국의 지난달 원유 수입량도 하루 779만 배럴 수준으로 전쟁 전보다 29%나 줄이며 8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문제는 종전(終戰)과 함께 상황이 역전된다는 점이다. 억눌렸던 수요가 복원되고, 비워진 재고를 동시에 채우려는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글로벌 신용평가 기관인 모닝스타DBRS는 “전쟁이 6월에 종료된다고 가정해도 세계 원유 공급 부족 규모는 2분기에 하루 460만 배럴로 정점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급이 정상화하기 전에 수요가 먼저 반등하기 때문이다. 미 블룸버그는 “각국이 비축유를 다시 채우려는 재고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유가는 2차 폭등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공급 정상화 속도가 이 반등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운 난점도 있다. 쿠웨이트는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돼도 원유 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만 10~12주가 걸린다고 공식 발표했다. 해협 봉쇄 기간 누적된 선박 대기 물량과 운항 일정 재조정, 전쟁 보험 문제 등도 물류망 정상화를 지연시키는 변수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통항이 정상화돼 배들이 순차적으로 빠져나오는 데만 해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LNG발 전기료 압박도 골치
한국 경제에 더 부담스러운 요소는 LNG다. 전쟁 기간 아시아 LNG 현물 가격 지표인 JKM은 전쟁 전보다 2배 가까이 폭등했다. LNG 가격 상승의 영향은 수개월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전쟁 기간 형성된 고가(高價)의 LNG 청구서가 올여름과 하반기 국내 발전 연료비에 본격적으로 반영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전력도매가격(SMP)은 LNG 발전 단가에 의해 결정된다. 하반기 LNG 도입가 상승은 SMP 상승으로 이어져 한국전력의 전력 구입비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 냉방 수요가 급증하는 한여름에 정부가 물가 안정을 이유로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억제할 경우, 한전의 천문학적 부채와 한국가스공사의 미수금 폭탄 사태가 다시 점화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종전이 에너지 위기의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적 과제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원유와 LNG, 유황 등 핵심 원자재의 도입선을 미국과 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다변화하고 비축 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장기 계약 확대와 안정적인 요금 체계 구축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원유 도입선을 다변화하면 정유사들은 새로운 유종을 처리할 수 있도록 설비를 바꿔야 하는데 정유사 혼자 감당하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재정 지원에 나서고 LNG 장기 계약도 적극 확대하는 등 에너지 공급망 확보를 비용이 아닌 안보 투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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