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무지개 팔찌 매어주고, 부부는 아기 안고 ‘백일떡’ 나눠…서울퀴어문화축제 [현장]

남지현 기자 2026. 6. 13. 19:1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을지로 일대서 퀴어퍼레이드
성소수자·종교계·시민 5만명 “다름을 연결로” 외쳐
이동환 목사 “환대하는 교회도 있어…위로가 되길”
2026 제27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및 종로구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3일 오후 4시께 서울 중구 종각역 앞. 서울퀴어문화축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이들이 도심 네거리를 가득 메웠다. 케이팝에 맞춰 흥겹게 무지개 깃발을 흔드는 이들 앞으로 결혼식 하객을 태운 관광버스 한 대가 교통 신호에 멈춰 섰다. 버스에 타고 있던 한 중년 여성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창문 너머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퍼레이드 참여자들도 환호하며 버스를 향해 손을 마주 흔들었다. ‘다름이 연결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올해는 ‘교집합: 다름을 연결로’를 구호로 내걸었다. 30도에 육박하는 더위 속에 5만여명(주최 쪽 추산, 경찰 비공식 추산 1만2천명)이 축제를 즐겼다.

축제 현장에서는 시민단체와 외국 대사관들, 종교 단체들이 부스를 차리고 행사 참여자들을 맞았다. 대한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부스에서는 스님들이 참여자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며 팔목에 오색실팔찌를 매어줬다. 논바이너리(남성이나 여성 등 이분법적 성별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 성소수자) 문아무개(26)씨는 “스님이 팔찌를 매주시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이 팔찌처럼 자유롭게 살라고 말씀해주셔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개신교 퀴어 연대단체인 큐앤에이와 영광제일교회가 마련한 부스에서 참여자들을 맞이한 이동환 목사는 “성소수자에 대해 가장 많이 공격하고 차별을 일삼는 집단이 개신교 집단이다. 모든 개신교가 그렇지는 않고, 환대하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이 성소수자나 퀴어 신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며 “한국 교회가 이제는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 포용과 환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도 축제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동안 ‘거룩한방파제’ 등 일부 기독교 단체가 ‘동성애 지옥 예수 천국’ 등 펼침막을 내걸고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이어갔지만, 참여자들은 흥겨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이들을 지나쳤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식 부스를 차리지 않은 국가인권위원회를 대신해 인권위 직원 30여명은 ‘국가인권위원회 앨라이(성소수자 연대자) 모임’ 부스를 열어 축제에 참여했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애초 퀴어문화축제와 거룩한방파제 집회에 모두 참석할 뜻을 밝혔다가, 이에 반발한 축제 주최 쪽이 부스 설치를 허락하지 않자 전날 양쪽에 모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날 인권위 앨라이 모임 부스에 참여한 최준석 인권위 차별시정과 성소수자 전문관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와 연대하고 함께하는 일은 원래 인권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2026 제27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및 종로구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행진하다 반동성애 집회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축제에 참여한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환대받았고, 다른 이들을 환대했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부모 활동가들은 이날 연인과 함께 참여한 황아무개(27)씨를 꼭 안아줬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황씨의 연인 윤아무개(30)씨는 눈물을 훔쳤다. 윤씨는 “우리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제 정체성을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인데,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 안아주고 이해해줬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무지개색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과 퀴어문화축제를 찾은 미세(활동명·15)양은 “우리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라 퀴어 친구들과 놀러 왔다”며 “지나가는 분들이 제 옷을 입고 환호해주셔서 기뻤다”고 말했다. 연인과 축제를 찾은 김아무개(25)씨도 “평소에 데이트할 때 눈치가 보여 손도 제대로 못 잡는데 오늘은 마음껏 손을 잡을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축제 현장을 찾거나 퍼레이드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연대의 마음을 보탰다. 퍼레이드 참여자들이 지나가는 길목 곳곳에서 카페와 버스에 있던 시민들은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이날 갓 100일이 지난 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축제를 찾은 전주원(31)씨는 “100일 기념 떡”이라며 참여자들에게 무지개떡을 나눠줬다. 전씨는 “작년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 참석인데, 누구나 올 수 있는 장벽 없는 행사라는 생각이 든다”며 “앞으로 아이가 커가면서 어떤 선택을 해도 행복을 찾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