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재선거" 구호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조지 오웰의 풍자소설 <동물농장>에서 주인인 인간을 몰아낸 동물들은 날마다 ‘인간은 사악하고, 동물은 선하다’는 내용의 구호를 외친다. 동물농장의 권력을 장악한 돼지 나폴레옹이 독재자로 변하는 과정도 구호에 즉각 반영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모토는 어느 순간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는 정반대 문구로 탈바꿈한다.
짧고 선명한 구호의 힘은 강하다. 직관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몇 단어로 압축된 한마디는 군중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3·1운동 때 거리에 나온 한국인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민주화 운동 당시 대학생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한마음이 됐다. 언어학자 빅토르 클렘페러는 <제3 제국의 언어>에서 “나치의 가장 강력한 선전도구는 히틀러나 괴벨스의 연설도, 신문 기사도, 전단도, 포스터도, 깃발도 아닌 반복돼 들리는 말”이라고 갈파했다.
군중이 외치는 구호가 ‘시대의 요구’와 부합하면 시위의 폭발력은 증폭된다. 21세기 들어 미국에서 등장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같은 슬로건은 미국 사회가 가는 방향을 바꿨다.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개표소(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는 지난 주말 20·30세대를 중심으로 4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모였다. 시위 참가자들은 ‘재선거’라는 하나의 구호만을 외치고 있다. 참정권 침해에 항의하는 시위에 자칫 정치 이념과 진영논리가 개입하면 진의가 퇴색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공직선거법상 재선거는 ‘선거 결과를 바꿀 정도의 오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재선거를 외치는 청년 시위대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문자 그대로 ‘선거를 다시 하자’는 요구라기보다는 참정권 박탈에 대한 분노 표출로 보인다. 권리 침해에 항의하는 청년의 외침이 어떤 반향을 끌어낼지 주목된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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