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소비 회복에도 '중동 리스크'에 발목…KDI, 경기 판단 한 달 만에 '완만한 개선' 후퇴

김남희 기자 2026. 6. 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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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픽사베이 ]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우리 경제에 대한 진단을 한 달 만에 다시 하향 조정했다.

반도체를 필두로 한 수출 호조와 민간 소비의 개선 흐름이 이어지고 있으나, 3개월 넘게 장기화되고 있는 중동 전쟁의 부정적 파급효과가 실물 경제 지표에 본격적으로 투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유가발 물가 상승 압력이 가중되면서 경기 하방 위험이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KDI는 8일 발표한 '경제동향 6월호'에서 "최근 우리 경제는 중동 전쟁에 따른 경기 하방 위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호황을 중심으로 완만한 개선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부터 '완만한 경기 개선'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KDI는 지난달 '경기 회복세'라는 표현을 쓰며 경제 낙관론에 무게를 실은 바 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완만한 개선세'로 복귀하며 대외 불확실성에 대한 경계감을 한층 높였다.

◆반도체가 견인하는 수출과 굳건한 생산 지표

경기 판단 문구는 다소 후퇴했으나, 한국 경제의 핵심 축인 수출과 생산 등 공급 측면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견고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의 독주가 눈부시다. 지난달 수출은 반도체와 컴퓨터 등 정보통신(IT) 핵심 품목을 중심으로 전년 동월 대비 무려 53.2% 급증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열풍과 데이터센터 확충 수요가 맞물리면서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주문이 폭증한 결과다.

이러한 수출 호조는 제조업과 산업 전반의 활력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4월 전산업생산은 서비스업과 광공업 생산이 동시에 기지개를 켜며 전월 대비 2.4% 증가했다. 3월(3.7%)에 이어 두 달 연속 견고한 성장세를 이어간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광공업 생산이 반도체(13.0%)의 압도적인 호조에 힘입어 1.5% 늘었고, 서비스업 생산 역시 금융·보험업(5.5%) 등을 중심으로 3.5% 증가하며 온기가 확산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비 불씨는 살아있으나…정부 지원책이 버팀목

내수의 중추인 민간 소비 역시 완만한 개선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4월 소매판매액은 전월 대비 1.6% 증가했다. 지난 3월 기록한 깜짝 성장 폭(5.0%)과 비교하면 증가세가 다소 둔화되었으나, 꺾이지 않고 플러스(+) 성장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KDI는 향후 소비 개선세가 지속될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지표로 '소비자 심리'와 '정책 효과'를 꼽았다.

 소비자심리지수(CCSI) 반등: 전월 99.2로 기준선(100)을 밑돌며 위축됐던 소비자심리지수가 일달 들어 106.1로 크게 뛰어올랐다. 소비자들이 향후 경기와 가계 재정 상황을 한층 낙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유가 지원금의 온기: 4월 말부터 본격 지급된 정부의 '고유가 피해 지원금' 효과가 서민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보완하면서, 향후 내수 하방을 지지하는 버팀목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전쟁 가시화…'고유가'가 초래한 물가 충격

문제는 대외 리스크다. KDI가 경기 판단을 한 달 만에 뒤집은 결정적 배경은 중동 전쟁에 따른 원유 수송 차질과 그로 인한 '에너지 가격 쇼크'다. 장기화된 지정학적 위기가 비용 인상형 물가 상승(Cost-push Inflation)을 촉발하며 실물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곳은 석유화학 산업이다. 원유 수급 불안정에 극도로 민감한 석유정제 생산이 전월 대비 20.5%나 급감했다. 원자재 공급망 차질이 국내 제조업 일부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구체적 증거다.

더 큰 문제는 전방위적인 물가 압력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1%를 기록하며 전월(2.6%) 대비 0.5%포인트 급등, 다시 3%대로 진입했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 상승률 역시 전월 2.2%에서 2.5%로 확대됐다.

KDI는 이에 대해 "고유가가 소비자물가 상승을 주도하는 핵심 요인"이라며 "국제유가 상승으로 인해 항공료 등 유가 의존도가 높은 제품과 서비스 품목의 가격 상승 폭이 커지면서 근원물가까지 함께 끌어올렸다"고 진단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 찍은 생산자물가

원가 상승 압박은 기업들이 체감하는 생산자물가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확인된다. 4월 생산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2.5% 상승했다. 이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월(2.5%) 이후 무려 28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생산자물가는 지난해 9월 이후 8개월 연속 멈추지 않고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생산자물가는 통상 1~3개월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로 전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우리 국민이 체감할 장바구니 물가와 서비스 가격의 추가 상승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기업들 역시 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해 수익성이 악화되거나 투자를 지연시킬 우려가 크다.

◆'외화내빈'의 한국 경제, 정교한 정책 공조 절실

현재 한국 경제는 '반도체 착시'와 '지정학적 리스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매크로(거시) 지표상 수출과 생산은 눈부신 성장을 거두고 있지만, 중동발 고유가 폭탄이 생산자물가를 자극하고 소비자물가를 다시 3%대로 끌어올리며 내수 회복세의 발목을 잡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양상을 띠고 있다.

KDI가 한 달 만에 경계 수위를 높인 것은 이처럼 공급 측면의 불확실성이 민간의 가처분 소득을 제약하고 기업의 생산 비용을 높여, 간신히 살아나던 경제 선순환 구조를 훼낙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고유가 피해 지원금 등 취약계층을 위한 미시적 지원을 촘촘히 전개하는 동시에,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한은 역시 경기 개선 흐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외환위기 수준으로 치솟은 생산자물가가 기대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도록 정교하고 신중한 통화정책 가이던스를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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