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부실선거가 빚은 참정권 훼손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하지 못했다. 종이 부족 국가(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농담처럼 발생한 선거 부실은 처음에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실수가 빚은 해프닝처럼 여겨졌으나 곧 이를 참정권 훼손 사안으로 규정하며 규탄하는 목소리들이 모이고 있다. 어이없기는 하나 이렇게까지 분노할 일인가(특히 ‘군인들이 국회를 점거하려고 시도했던 비상계엄 당시에는 무심했으면서!!’라고 비교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선거권은 중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선거의 대표 격은 이승만 정권이 주도한 3·15 선거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위해 집권세력이 투표부터 개표까지 선거의 모든 과정을 조작해 이승만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전형적인 관권·부정선거다.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3·15의거와 4·19혁명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헌법은 1960년대부터 선거관리 사무를 대통령과 정부·여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현재 선거관리 사무를 담당하는 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 및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으로서 자체적인 사무조직을 갖고 있으며 관례상 독립성과 중립성이 확보된 법관에게 위원장직을 맡기고 있다. 이처럼 선거관리는 헌법상 대통령 및 집권세력으로부터 독립해 수행되었으나, 헌법이 장식에 불과했던 군부독재 시절 선거가 대통령과 무관하게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관권선거와 금권선거가 이어졌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는 비교법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강한 선거 및 정치자금 규제로 나타났다.
독재마저도 질긴 저항으로 무너뜨린 강인한 국민을 보유한 나라답지 않게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는 강한 대통령과 양당제 중심의 대의민주주의 구조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으며 국민의 주권 행사는 주로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민주화 이후에도 집회 시위는 통제와 진압의 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시민사회의 조직 및 운영에 대한 공적 지원은 내내 빈약했으며, 국민의 청원권 등 정치의 직접 참여 권한은 유명무실에 가까울 정도로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기에 서울·수도권은 너무 커졌고 지방은 소멸위기에 이르렀다는 진단도 나온다.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국민은 선거를 통해 통치 권력을 만들고 정치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가 그 통치 권력이 나라를 말아먹으면 강하게 결집해 통치 권력을 몰아내고 나라를 건사해내는 역할을 반복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강한 국민의 빈약한 참정권’이라는 구조에서 선거권은 참정권의 거의 전부가 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관권선거와 금권선거 등 선거의 부정을 타파하고 선거의 공정성과 중립성, 염결성을 확보하기 위해 헌법상 독립된 합의제 선거관리기구를 만들고 선거의 자유를 위협할 수준의 강한 규제를 도입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정작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한 선거관리로 인해 절차가 오염되고 국민의 선거권 행사가 가로막혔다니,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국민의 참정권 훼손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재선거는 선거소청 또는 선거소송을 통한 선거관리위원회나 법원의 선거무효 결정이 있을 때 가능한데, 선거무효는 재투표로 인해 당선인이 바뀔 가능성이 인정될 때에만 내려진다. 한편, 특정 선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정상적인 선거의 외형을 갖추면서 실질적으로는 투·개표에 개입해 가짜를 만들어내는 ‘부정선거’와 선거관리 절차의 하자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부실선거’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부실선거를 부정선거로 간주해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대책을 찾다 보면 오히려 선거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시켜 국민의 선거권 보장 수준을 후퇴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사전투표제도 폐지는 투표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다. 참정권 훼손 규탄의 목소리에 위 두 가지가 고려되길 바란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헌법상 국민의 참정권 보장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 제기에 동의하며 이 부분의 문제의식이 ‘강한 국민의 빈약한 참정권’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고민으로까지 확장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희망한다. 당장 선거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마당에 무슨 헛꿈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류영재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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