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5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황지윤 기자 2026. 5. 2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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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7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 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올해 3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5월 독회 추천작은 김병운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문학동네)과 단요 장편소설 ‘성냥과 풋사과’(위즈덤하우스)입니다. 김병운의 작품은 작년 12월 출간작이지만,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 본심에 올랐습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이종훈
/문학동네
작가 제공
/위즈덤하우스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자연스러운 문체와 세계의 무대화

김병운의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문학동네, 2025.12)는 성소수자 문제에 집중한 소설이다. 하지만 독자는 이 주제에 앞서, 문체에 먼저 주목해야 하리라.

모처럼 늘어져도 되는 월요일을 만끽하기 위해 아침부터 티브이 앞에 작정을 하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대뜸 인턴도 월급이 잘 나오느냐고 물었다. 출근 준비를 진작 마치고도 괜히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늦장을 부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했다. 티브이에서는 어느 대학병원의 가정의학과 교수가 함께 먹으면 득이 되는 음식과 독이 되는 음식을 소개하고 있었다.(p.9)

첫 대목이다. 엇비슷한 기술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부의 사건들을 화자 ‘나’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면서 단련된 경험이 제조한 심장의 소화액으로 녹이며 담수(淡水/淡愁)로 걸러내고 있다. 민감한 사회적 주제가 이런 글쓰기를 통해 일상 속으로 녹아든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의 기록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작가의 (무)의식적 기도에 의한 소설적 구성이다. 이 구성은 두 가지 목표를 의도한다.

첫째, 이 자연스러움의 인상을 주는 글쓰기는 ‘성소수자’의 문제를 특별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빼내어 보편적인 주제의 범주 속에 포함시킨다. 즉 독자의 거부감을 상쇄하는 효과를 갖는다.

둘째, 이 소설은 사실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다. 여기에는 성소수자들과 그들의 문제가 응집되어 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주제와 유관한 인물들이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없다. 이건 작가가 사실주의의 의장 아래, 성소수자의 문제를 무대에 올려놓아 집중적으로 탐구하게끔 하는 장치로 소설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설의 이론에서 이러한 방법을 통상 “세계의 무대화(theatrum mundi)”라고 부른다. 이는 사실을 다루면서 여기에 특정한 수사학과 구성을 입힘으로써 “사회를 거대한 연극 무대로” 만들어, 소설의 “인물들을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희극 배우처럼 조형하며, 화자 자신도 가식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이자 그 촌극을 감상하는 관객으로서 행동”함으로써, 화자의 바깥 분신인 작가는 “단순한 역사의 배우를 넘어, 무대의 상황을 직접 조율하고 연출하는 극작가(dramaturge)이자 조물주(démiurge)의 위치로 스스로를 격상”시키는 기법을 가리킨다(미셸 사를르Michel Charles, 「사실적 서사와 허구적 효과: 밤에서 태어난 레츠(Récit factuel et effet de fiction: Retz né de la nuit)」, 『시학Poétique』, No199, 2026.)

덧붙인다면, 이런 기법 바탕에 있는 작가의 의식은 세계를 ‘좇기’보다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한 “바로크적 세계관”이다. 이런 의식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생명 다양성의 근원적 이유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고, 이에 따라 성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 역시 점점 더 개방적이 되어 가고 있는데, 그에 대한 실제적인 각성과 실천은 여전히 미미하고, 일반의 인식은 폐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회적 상황이 성소수자들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여건을 고려한다면, 일상화 문체와 세계의 무대화라는 교묘한 고안은 작가의 필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기도가 실제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작가의 고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실의 무대화’는 관객의 강렬한 호기심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방금 말한 것처럼 일반적인 인식이 무풍지대에 놓여 있는 상황과는 비각이 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적인 충돌을 거의 배제하는 설정이 상황을 적막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작가가 긴밀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가능성’의 조사에 대한 권유일 뿐이다. 오늘날 작품을 소비하는 독자의 취향이 옛날과 아주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 필자는 시방 상당히 당황하고 있으며, 이 현상의 문학사회학적 분석에 깊이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독서의 수용의 ‘질’ 자체에 대한 판단도 쉽사리 하지 못하게 한다. 즉 잘 ‘팔린다’고 해서 좋은 호응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와의 ‘선’이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지(支持)판이다. 여하튼 삶의 다양화는 훨씬 복잡한 네트워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걸 단순한 ‘호기심 잔치’의 예능프로그램으로 낭비할 수는 없다.

♦성냥과 풋사과

세계의 유죄성과 경험의 연대

단요의 『성냥과 풋사과』(위즈덤하우스, 2026.03)는 도발적인 소설이다. 사람들의 불행에 불행을 겹쳐 놓으면서, 그것들에 무심하거나 그것들을 조장했을지도 모르는 세계의 근본적인 ‘유죄성’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이 되리라”라는 유혹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성스러운 것을 추구해왔다. 자신이 성스러워지고 싶었고, 그러려면 ‘성스러운 것’의 현전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스러운 것의 추구에 역사가 길었던 만큼 그에 대한 문학적 탐구 역시 오래되었다. 근대 이후의 한국에도 성과 속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김동리의 『무녀도』, 『을화』이래 수다히 씌어졌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런 경향은 멈추지 않았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가로 정찬과 이승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단요의 길은 정찬의 정반대 방향으로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정찬이 인간의 성스러움 자체에 천착했다면, 단요는 세계의 유죄성 그 자체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덧붙이자면, 이승우의 소설에서 성과 속은 서로 외재적이다. 때문에 속에 성이 ‘어떻게 깃드는가’의 문제가 탐구의 대상이 된다.)

이 방향의 극단적 양극성은 지향의 근거도 바꾸게 한다. 정찬의 성스러움 지향은 신의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의 심연에서 비롯한다. 반면 세계에 대한 단요 소설의 냉정한 단죄는 불행의 무수한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대한 무수한 언설들의 종합, 즉 정보에 의존한다.

세계의 유죄성은 서두에서 말했듯, 세계 내 존재들의 불행과 죽음에 결코 응답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무심함과 그 불행이 일종의 장난처럼 순식간에 발화되고 밀봉당한다는 잔혹함에 근거한다. 한 사회에서 불행을 겪는 사람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즐기는 사람들을 두고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부른다. 그에 빗대어 사람들의 재앙에 초연한 세계를 ‘문도패스(mundopath)’라고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도패스라는 이름의 소굴에서 여린 생명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샘플로 추출된 ‘최선재’와 ‘건우’의 삶은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이 망가짐의 경험을 통해 서서히 유대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요컨대 ‘상처 입은 자들의 상처의 공유와 그에 뒷받침된 연대’가 생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세계의 무심한 장난이 ‘성냥’이라면, 이 희망은 아무런 근거가 없이 간신히 자라난 ‘풋사과’이다.

그 과정은 자못 애절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직은 소설 속의 세계일 뿐이다. 이 경험들은 현실의 경험인가? 그걸 따지기 위한 어떠한 인과율도, 에밀 졸라 Émile Zola가 클로드 베르나르 Claude Bernard의 ‘실험소설론’을 참조해 설정했던 ‘유전과 환경의 교직’도 작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과 광기에 휩싸인 세계의 작동만이 보인다.

바로 거기에서 이 도발적인 소설의 미묘한 불균형이 새어나온다. 만일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가 경험의 공유에서 나온다면, 그 경험을 연대로 만드는 것은 모종의 성스러움의 가정에 근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경험에서 생명의 풋싹이 피어나는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 소설이 온갖 곳에서 챙긴 정보들을 통해 규정적 언술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규정적 언술들이란 세계에 ‘진리’를 드리우려고 하는 의지의 언어들이다. 요컨대 『요한복음』 첫마디 그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말씀’이 되고자 하는 언어의 꿈틀거림이다. 이 소설의 곳곳에서 그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경험의 연대’에 성냥불을 지피는 게 그것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실로 ‘선재’는 성냥 게임을 꽤 즐기지 않았나? 다만 불을 지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인물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풋’이라는 접두사가 끼어든 것인가?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김병운의 소설은 재밌다. 이런 소감은 너무 무책임한가. 그럼 맛깔스럽다고 할까. 맛깔스럽다는 말은 사람들이 하도 많이 써서 좀처럼 따라 쓰지 않으려는 말에 속하지만 김병운 소설의 재미를 말하려니 그 말 말고는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맛깔스럽다는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맛은 미각이고 깔은 시각에 가깝다. 깔은 옛말 ‘ᄀᆞᆯ’에서 온 말이고, 모양이나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색깔, 때깔, 성깔의 깔이다. 그러니 ‘맛깔스럽다’는 공감각이다. 하나의 감각이 동시에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공감각으로 쓰였으니 공감각으로 읽어야 할 것이 김병운의 소설이다.

재미의 공감각적 요소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머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막 가슴이 아려오면서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경박한 웃음이 새어나와 흠칫 놀라곤 한다. 감정의 끝선을 내리지 않고 올리는 문장이라서 페이소스와도 다르다. 김병운은 섬세하게 짓궂다. 뭐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아닌 척하면서도 끝내는 독자를 자극해 내고야 마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프거나 저릴 때가 많은데, 그냥 아프고 마는 것이 아니라 딱 미당의 시 한 구절만큼 저리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이리도 아픈가.-서정주, <꽃밭의 독백-사소단장>.’

아프기는 아픈데 꽃으로 문지르는 거라서 아프다고도 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내 가슴이 그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가슴이라는 게 기껍지 아니한가. 이런 거다. 김병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아픔과 웃음과 기꺼움이 섞인 공감각인 데다 또한 독자인 나를 은근, 그것도 매번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면서 끝내는 그 부끄러움을 스스로 소중히 여기게 하는, 마술인지 환술인지를 부린다. 이러니 짓궂다고밖에 할 수 없는데, 이 짓궂음은 아픔과 웃음과 기꺼움과 부끄러움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누구보다 작가 본인이 매일 넘어왔고 오늘도 넘으며 다지는 다짐이기에 나와 같은 둔감한 독자에게마저도 떨림으로 옮는 것은 아닌지. 이런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는 김병운의 실력은 탁월한 기술이면서도 무엇보다 진실이 먼저인 것만 같다. 거의 진실 같은 거 말고.

김병운 소설의 화자는 게이 소설가다. 소설에서 화자들은 그런 자신을 ‘이쪽’이라고 한다. 오토픽션이라 할 수 있다. 매우 사적이고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히니까. 소설가가 소설집을 출간하고 독자를 만나는 것은 흔하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쪽 소설가가 오토픽션을 출간하고 독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

이처럼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의 소타자들은 일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본인의 이미지를 보며 자신을 투영하기도 하고 그것과 닮기를 원하기도 하며 질투하고 부끄러워하고 경쟁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저쪽을 향한 비판은 물론이고 같은 이쪽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므로 김병운 소설에서는 실의와 낙담 혹은 허망한 장면들이 줄곧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김병운 식의 은근 발랄한 유머다. 요즘 말로 셀프디스에 해당하는 자기비판의 언어가 살짝 경쾌하게 미끄러지며 낙담과 허망의 다리를 건넌다. 자기비판이 아닌 자기자랑 같게도 여겨지는 참 아리송한 말투가 묘하게도 앞에서 말한 ‘진실’을 한 번 더 환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진실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 모두가 속한 대타자의 세계 일반을 향한다. 그런데 김병운은 언어와 법, 질서와 소외, 그리고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사랑과 폭력 등 거시적 항목의 상호적 관계를 말할 때조차도 ‘사소한 일’로 변환해 발화함으로써 독자를 방심하게 하고 소곤소곤, 그의 이야기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끝까지 해낸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성냥과 풋사과

작가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장황하고 분방한 소설을 오랜만에 읽으며 새삼스럽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아 뒤섞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품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이 배척하는 것이 있던가.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과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이나 사고, 이미지나 음악, 전문 지식이나 떠도는 에피소드, 스치는 생각이나 순간적인 느낌이나……. 모든 것들이 소설의 재료이다. 절제나 규격, 형식이 아니라 자유, 확산, 과잉이 소설의 몸이다. 독자는 현실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현실을 기대하며 소설을 읽는다. 재구성을 위해 작가가 동원한 재료들을 기대한다. 재료들이 작가의 솜씨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어떻게 다루어져 어떤 모양을 이루는지 보고 싶어 한다. 작가는 인물과 화자 뒤로 숨지만, 그러나 그 인물과 화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작가를 되돌려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그것이 인물과 화자의 역할이다. 그런 식으로 작가를 보여주려고 인물과 화자는 소설 속에서 그렇게 애쓰고 분주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단요의 소설 『성냥과 풋사과』의 인물과 화자들이 그랬다.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알맞게 축소되어 실감이 사라진 인공물을 너무 많이 보아온 독자에게 이 소설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성냥과 풋사과』는, 비유하자면 축척이 1:1인 지도, 혹은 등신대의 조각상과 같은 소설이다. 실감이 디테일에 의해 확보된다는 건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여러 재료가 뒤섞이다 보니 한쪽이 유난스레 불거지기도 하고 더러 덜 다듬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어 버리지는 않으니 이럴 때 해찰은 부조화가 아니라 풍부한 볼거리가 된다.

더구나 이 소설의 서사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한 재난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고통과 싸우는 두 인물의 이야기이니 실물 크기의 소설상(像)은 맞춤하기도 하다. 뒤틀리고 망가져 마음의 지옥에 갇힌 피해자 혹은 생존자가 누군가의 일회적 호의나 어떤 에피소드나 그럴듯한 한마디 대사로 인해 그 지옥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와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서사에 꽤 익숙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한 가지 결과가 한 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잘못된 것도 없다. 상처로부터의 회복이라는 매끄럽고 기만적인 결말 대신 소설은 그 과정의 지난함이 유지되는 쪽을 선택하며 마무리되는데, 리얼리즘이란 게 이런 거지, 하며 동의하게 된다.

고통과 혼란의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반복이고 시행착오이고 인내라는 걸 이 소설의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그래서 심지어 신의 은총을 기대해야 하는 정도의 일이 된다.

“돌보는 일의 핵심은 절절한 정념이나 따뜻한 한마디가 아니라 인내심이었다. 쓰러진 사람을 자기 본위로 끌고 다니거나, 지금 당장 일어나지 못한다며 타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날 근육이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였다. (…) 그토록 막막한 시간을 헤쳐 나가다 보면 한때 건우에게 주절거렸던 것과 다른 이유로 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줄곧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나’와 ‘건우’가 속마음을 드러내며 대치하는 마지막 장면은 특히 압권이었는데, 거기서 도출된 인상적인 메시지는 ‘겪은 사람의 이야기가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것이다.

“걔네들한테는 네 이야기가 필요할 거야. 너랑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애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돼…….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먼저 겪은 ‘나’가 겪고 있는 ‘건우’를 돌본다. 지금 겪고 있는 ‘건우’의 이야기는 앞으로 겪게 될 ‘걔네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무대인 ‘합천’은 꽤 상징적인 공간이다. 시간차를 두고 두 명의 재난 생존자는 이곳에 보내져 회복의 과정을 겪는다. 이곳에는 해인사가 있고 자연이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 대를 이은 대가족의 구성원들이 있다. 직계가 아니면 소통도 거의 하지 않는 시대에 족보상 비교적 먼 친척에게 이런 역할을 맡긴 데 뜻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구원된다. “남을 책임진다는 건 내 선택을 책임진다는 거고, 나 스스로를 책임지겠다는 의미”이겠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퀴어하지 않은 퀴어”. 김병운의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에 실린 단편소설 ‘봄에는 더 잘 해줘’에 나오는 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경주는 퀴어임에도 이성과의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래서 변절자라는 말을 듣는다. ‘결혼과 임신에 대한 욕망으로 탈반한 변절자, 혈연에 집착하는 가족주의자, 소수자성을 탐낸 패션 퀴어’, 이런 식으로. 패션 퀴어는 ‘퀴어 문화나 정체성을 하나의 유행이나 스타일처럼 소비하는 현상, 또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정체성과 유행, 또는 소비라는 단어는 언뜻 밀접해 보이지 않지만 실은 한묶음의 말일지도 모르겠다. 퀴어든 아니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한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유행이나 스타일, 혹은 파탄이나 자멸, 대개는 편견과 왜곡.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불안. 그것은 타자에 대해서일 수도 자신에 대해서일 수도 있을 터인데, 우리는 이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할까.

김병운의 소설은 조용하다. 다정하다고 말해도 좋고 느리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독자를 긴장시키는 사건이나 서사 대신 일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결 하나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아마도 김병운이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일 것이다. 소설 속 연인이 연인에게, 엄마가 아들에게, 삼촌이 조카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말을 건네고 사과를 전하는 것처럼 김병운 또한 그러하다. 싸우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 그건 결국 듣는 사람을 미안하게 하는 말이 아닌가.

소설집에 실린 또 다른 소설 ‘교분’은 고등학교 시절 은사와의 우연한 만남을 내용으로 한다. 화자인 나는 ‘게이 당사자성에 기반’하여 자기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이다. 이야기를 쓰면서 이야기를 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오래전 이야기, 얼마 전의 이야기, 결국은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또다시 누군가를 미안하고 미안해지게 만드는 이야기. 그러나, 화자는 말한다. “선생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김병운의 소설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이 적당한 거리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면 반드시 미안해질 것 같은데, 아니 이미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사과를 종용하지 않는 화법, 그러기 위해 띄워두고 있는 거리. 그것이 어떤 어긋남이든 그게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끝끝내 기다리겠다는 의지. 조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잔뜩 느리기까지 한 이 소설들이 지루하지 않고, 지루할 수도 없는 것은 미안하고 미안해지는 이야기에 독자들 역시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낯간지러운 것 같은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 ‘완전히 사랑하는’ 것에 대한 소망 역시 믿어봄직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단편소설 ‘교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게 오직 예술과 허구의 세계에서만 온전하다.” 예술과 허구에 숨어서야 비로소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 문장은 김병운의 소설이 감동을 주는 이유로 읽히기도 한다. ‘그나마’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치열하므로. 그 치열함 속의 모든 균열이 일상에서 회복되는 순간들을 그렇게 조용히 소망하므로.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성냥과 풋사과

심적 외상(心的外傷)이나 트라우마(Trauma)로 불리기도 하고, 아예 심적이라는 말도 줄여서 외상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있다. 외상은 마음의 상처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전쟁·재해·사고·폭력·범죄 등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으며 형성된다. 외상이 형성된 이후에는 외상과 관련된 경험이 반복될까 봐 공포에 유폐되거나, 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외부의 도움을 거칠게 거부하며 극한의 고립감에 놓인다. 외상의 기억은 끊임없이 의식에 개입하며 피해자의 영혼을 잠식한다.

단요의 장편소설 ‘성냥과 풋사과’는 외상을 안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하면서도 격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선재는 9·11 참사로 부모를 잃고 장애를 얻었다. 한쪽 다리를 절고 얼굴에는 화상 흉터가 있고 신경통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9.11 참사가 2001년의 일이고, 현재 나이가 37세이니까, 대략 선재가 10대 초반일 때의 일이다. 그 후 선재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친척들의 도움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최씨 집안의 집성촌이 있는 합천에 자리를 잡고 번역도 하고 텃밭도 가꾸며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선재 앞에 중학생 육촌 손자 건우가 등장한다. 건우에게도 엄청난 외상이 있었다. 건우는 어머니와 여동생 다은과 함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살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한 상황을 목격했다. 여동생은 육촌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건우는 선재에게 맡겨진다. 외상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선재와 외상의 상황에 사로잡혀 있는 선재의 동거가 시작된다. 건우는 괴물이었고 “불붙은 화약고”(22면)였다. 선재가 어떻게 대하든 간에 건우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건우는 세상이 먼저 자신을 불태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불붙은 화약고처럼 행동한다. 그를 위로하는 말들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이고 그를 걱정하는 눈빛은 자신의 상처를 후벼 파는 발톱이라고 느꼈다.

소설의 제목 ‘성냥과 풋사과’에서 ‘성냥’은 외상의 기원들과 외상의 현재 상태를 암시하는 은유이다. 그렇다면 선재는 어떠한 태도와 방법으로 15살의 상처입은 괴물을 대했을까. 그가 일상을 유지하던 방식, 그러니까 번역과 텃밭 가꾸기가 그것. 선재는 건우에게 고통을 언어로 옮기는 일, 즉 고통의 번역을 제안한다. 건우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신의 일기를 읽게 하기도 하며, 외상에 사로잡혀 거칠게 저항하는 상황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선재의 방법을 건우가 처음부터 잘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건우의 외상을 치유한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건우가 자신의 외상에 대해 선재에게 이야기하는 지점에는 이른다.

선재의 상처를 바라보는 건우의 시선 속에는, 텃밭에서 자라는 사과나무가 있다. 텃밭에서 자라는 사과나무에서 상처 없이 매끈한 그래서 상품 가치가 높은 사과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예쁘면 예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거름을 줄 때도 있고 안 줄 때도 있고, 사과가 그럴듯하게 열리기도 하고 못 먹을 사과만 매달려 있기도 하겠지만, 텃밭의 사과나무는 나와 함께 있는 사과나무이다. 높은 당도와 예쁜 모양을 갖추어야 하는 상품용 사과와는 달리, 텃밭의 사과는 좋은 열매가 있으면 따서 먹으면 되고 풋사과가 매달려 있으면 관상하며 내년을 기약하면 된다.

소설의 제목 ‘성냥과 풋사과’에서 ‘풋사과’는 외상을 대하는 윤리적이면서 전략적인 태도를 암시하는 은유이다. 외상의 치유를 강요하거나 치유 단계에 꿰어 맞추려 하지 않고 외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외상과는 다른 상황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긍정하는 태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가 아니라 지금은 이런 상태다,에 생각의 기본값을 두라는 거야.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다.”(192면)

결과적으로 말하면 건우가 외상을 극복하고 치유됐는지, 두 사람이 싸우지는 않고 살아가게 되는지, 건우의 상처와 소통하며 선재도 자신의 상처를 비껴설 수 있게 됐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외상의 낭만적인 극복이 허황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상처에 대한 가식적인 위로와 낭만적인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처 이후의 삶, 상처를 언어로 표현하는 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자신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외상과 싸우고 있는 두 영혼을 너무 오랫동안(이 소설은 400페이지가 넘는다) 들여다봤다. 잠시 묵혀 두었다가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텃밭 사과나무에 열린 풋사과를 다시 들여다보는 재미를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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