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인의 피지컬 vs 디지털]반도체·AI 곳간 넘치는데, 한국인 ‘항심’은 어디로

한국이 경제 선진국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면, 인문사회
연구자를 기꺼이 보호해야 한다
반도체와 AI로 가득 찬 곳간을 가졌다면,
그 기술을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를 연구하는
인문사회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사회
연구자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정신적 파탄을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비용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문학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결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대심문관’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때는 16세기, 추기경 대심문관은 재림한 그리스도를 체포하고는 꾸짖는다. “당신은 어째서 우릴 방해하러 온 거요?” 1500년 전에 예수는 민중을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오히려 대심문관이 그 일을 대신 떠맡아 민중을 자유로 충만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에 따르면,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를 시험하며 던진 질문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가장 어려운 물음이었다. 예수는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며 ‘빵으로 복종을 산다면 그게 무슨 자유인가?’라고 물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대심문관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은 ‘먹여 살려라, 그러고 나서 선행을 요구하라!’고 외친다. 나아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라는 자유만큼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없다.
대심문관은 예수의 생각이 원칙적으로는 옳다고 수긍한다. “당신이 옳았소.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살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에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극히 적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됐다. 예수는 사람들을 과대평가한 셈이다. 인간은 노예에 불과하며, 차라리 인간의 허약한 본성을 용납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돕는 길이라고 대심문관은 결론 짓는다.
여기서 벌어진 대결은 ‘빵이냐, 자유냐?’라는 오랜 물음, ‘무엇을 위해 사느냐?’, 즉 자기 삶의 가치를 묻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 물음이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최소한의 빵도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러니까 한국전쟁 때나 외환위기 시절처럼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때, 이 물음은 한가하다고 치부되어도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졌을 때, 이 물음은 긴요하고 절박한 물음일 수밖에 없다.
이 주제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인 연구·개발(R&D) 예산을 어느 분야에 투자하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한 나라가 무엇을 위해 살려고 하는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지향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 우리는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앞서가는 발전 속도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6·25 혹은 외환위기 마인드’로 가득 차 있다. 정신적으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예산 4분의 1 감소…말이 되나
2026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35조5000억원으로 2025년보다 약 5조9000억원(19.9%) 증가했다. 지난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을 완전히 상쇄하고도 넘치는 아주 긍정적인 반전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삶의 가치와 직결된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투자 비중은 어떨까? 총 4489억원으로, 절대 금액으로는 전년 대비 298억원이 늘었지만, 상대적으로는 전체 예산 대비 0.93%로 오히려 전년 비중 1.2%에서 22.5%나 감소했다. 전체 파이는 커졌지만, 인문사회 몫은 오히려 4분의 1 가까이 잘려 나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해서 국가적으로 큰 문제를 유발했고, 전 사회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하지만 올해 인문사회 연구·개발 예산의 엄청난 상대적 삭감에 대해서는 대부분 큰 걱정과 반발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국의 정신적 토대가 무너졌는데도,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는 의미다.
5월 중순 기준 코스피 상승률이 연초 대비 80%가 넘는다고 환호하지만, 정신생활에 쏟는 관심과 지원이 22.5%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현재의 한국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에 있는 나라들이 오랫동안 선진국 지위를 유지한 배경에는 인문사회에 대한 존중과 투자가 있다. 경제력 2위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기 꺼림칙한 이유 중 하나도 인문사회의 후진성 때문 아닌가?
지난 5월8일 교육부 장관 주재로 열린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도약을 위한 소통 간담회’에서 한국인문사회연구소협의회(회장 강성호)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국가 연구·개발 예산 대비 인문사회 부문의 비중은 프랑스 18.6%, 일본 13.1%, 미국 11.2%, 독일 8.3%, 영국 5.1%로, 한국의 0.93%와 비교해 최대 20배에서 최소 5배 이상 차이 난다. 이 나라들에서 경제 선진국의 이미지만 떠오르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국가가 인문사회 연구를 등한시한 결과 한국의 인문사회 연구는 공동화(空洞化)되었다. 한국인의 삶의 가치 지향과 정신생활의 질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년간 이어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자살률, 2025년 기준 OECD 중 최저 출생률이 과연 경제력 부족 때문일까? 우리 사회에서 삶의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는 데서 원인을 찾는 게 맞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 사례를 밝히는 것이 현실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50대 후반의 철학 연구자로서, 나는 1년마다 26명을 뽑는 인문사회 부문 우수 연구 성과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상을 2차례 수상하는 등 공신력 있는 평가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비정규직 연구자로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인문사회 연구자들은 존경받아야
나는 2025년부터 인문한국3.0(HK3.0) 사업의 전임 연구교수로 일한다. 지난 4월 내가 받은 급여는 284만1860원이다. HK3.0은 국내 최대 규모의 인문학 국가 연구·개발 사업으로, 1년에 8억원씩 6년간 총 48억원을 지원받는다. 나는 이런 연구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형편이 아주 좋은 편이다. 앞으로도 5년은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집필, 강연, 자문 등의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대학의 전임 교수가 아닌, 대다수 연구자는 어떨까? 지난 5월11일, 국가 인문사회 연구·개발 예산을 집행하는 한국연구재단의 올해 사업 선정 발표가 났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원성의 목소리가 그 어느 해보다 높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대 최저급으로 낮은 선정률이었다. 앞서 말한 예산 비중 삭감 때문이었다. 연구자 수는 매년 느는데, 대학 전임으로 취직하는 문은 좁아졌고, 인플레이션과 국가 성장률을 반영한 예산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신진 개인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는 가장 관심이 높다. 대학의 전임 교수로 임명되는 게 아니라면, 지원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선정되지 못하면 실업자 혹은 저임금 시간강사로 1년살이 삶을 살아야 한다. 2026년 선진 대한민국 대학의 그늘에 있는 서글픈 풍경이다.
인문사회 분야를 연구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다. 누구는 재미있어서, 누구는 중요하다고 여겨서 연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연구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인문사회 분야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 선진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지속하기 위해 인문사회 연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선진국들이 증명한다. 더 중요한 점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며, 어떤 가치를 위해 사는지 스스로 답을 얻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보다 약 2200년 전, 맹자는 항산항심(恒産恒心), 즉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오늘날 두 층위에서 중요하다. 첫째로, 한국이 선진국다운 ‘항심’을 얻고 싶으면, 연구자의 ‘항산’을 지원해야 한다. 둘째로, 인문사회 연구자에게 조금의 ‘항산’을 보장하면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해 한국의 ‘항심’을 든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경제 선진국에 만족한다면, 이대로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면, 인문사회 연구자를 보호해야 한다. 돈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이 분야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가 존경받아 마땅한 일 아닐까? 지금은 6·25 때도 외환위기 때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AI로 곳간이 넘쳐나고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반도체와 AI로 가득 찬 곳간을 가졌다면, 이제 그 기술을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를 연구하는 인문사회 분야에 기꺼이 투자해야 한다. 그것은 연구자들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정신적 파탄을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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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기술철학과 예술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로,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이다. 저서 <AI 빅뱅>과 <뉴노멀의 철학>으로 각각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들뢰즈 입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공동 뇌 프로젝트> 등 저서와 <천 개의 고원> <안티 오이디푸스> 등 역서가 있다.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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