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오월길 66.2㎞

한겨레 2026. 5. 1.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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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길 이야기 ①
횃불 코스: 전남대 정문·전남대 민주길
‘윤상원 숲’에 있는 윤상원의 얼굴 조각. 왼편 돌에 윤상원의 마지막 연설이 새겨져 있다.
오월길은 1980 년 5 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 ㎞ 의 길이다 . 횃불 , 희생 , 광장 , 열정 , 영혼 , 그리고 최근 추가된 ‘ 한강 작가 소년의 길 ’ 까지 6 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 ’ 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의 첫 번째 코스에 해당하는 횃불 코스는 모두 6.7 ㎞다.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해 광주역 광장, 금남로를 거쳐 예전 상무관과 도청이 있는 5·18 민주광장까지 이어진다. 1980 년 5 월 전두환 일당의 계엄 확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최초로 항쟁을 시작한 곳이 전남대 정문이다. 그 불길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맞서 도청 광장으로까지 활활 타올랐다. 횃불 코스는 항쟁의 불씨가 도심으로 번져가던 길을 따라 걷는다.

전남대 정문 앞에는 아담한 민주공원이 있다. 횃불을 상징하는 듯한 노란색 조각 앞에 ‘ 광주정신 발원하다 ’ 라고 적혀 있다. 건너편 정문 쪽에 ‘5·18 민중항쟁 사적 1’ 이라 적힌 사적비가 있다. 1980 년 5 월 18 일 아침 , 이곳에서부터 1980 년대의 그 아리고 빛나는 민주화의 역사가 시작됐다. 50 여명의 학생이 정문 앞에서 벌인 시위가 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 항쟁은 이후 한국 역사를 바꿔놓았다.

전남대 정문 앞의 광주항쟁 사적비. 1980년 5월 이곳에서부터 항쟁이 시작됐다.

5 월 18 일 아침 전남대 정문에는 전날 밤 은밀히 광주로 이동한 7 공수여단 33 대대 40 여명이 배치됐다. 오전 9 시께 50 여명이던 학생들은 1 시간여 뒤엔 1 백여명으로 불었다. 학생들은 “ 계엄 해제 ” 를 외치며 군인들이 막고 있는 정문을 돌파하려 했다. 이윽고 “ 돌격 앞으로 !” 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군인들이 학생들 사이로 파고들어 곤봉으로 머리를 후려갈기는 살풍경한 공수부대식 진압이 펼쳐졌다. 학생 몇몇이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흩어진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 카톨릭센터까지 진출했다. 이날 오후 7 공수 33 대대, 35 대대 병력들이 금남로와 충장로 등에서 학생은 물론 행인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내려치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겨 구타하는 믿기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광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상봉은 “5월18일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이른바 ‘서울의 봄’은 순식간에 겨울이 되어버렸다. 살인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시위는 멎었다. 그런데 그날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그들의 수는 고작 50명, 많아야 100 명이었다 . 그 용기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고 적었다.

전남대 교정 초입에 있는 ‘박관현 언덕’. 박관현은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다.

교정으로 들어서니 왼편 햇살 비치는 언덕배기에 ‘박관현 언덕’이 있다. ‘ 민주화의 새벽 기관차 ’ 라고 쓰인 밑돌 위로 박관현의 얼굴 부조가 새겨져 있다. 언덕 위로 하얀 목련이 활짝 피었다. 박관현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부끄러움을 끝까지 밀어붙인 이다 .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은 수배령을 피해 도망쳤다. 서울에서 공장 노동자로 숨어 지내다 붙잡힌 뒤 50여일 간의 처절한 옥중단식 끝에 숨을 거뒀다.

1980 년 계엄 확대 전 ‘광주의 봄’ 당시 박관현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 박관현이 도청 앞 분수대 연단에 올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라고 외치면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열광했다. 당시 고교 2 년생이던 나는 박관현의 그 사자후를 뚜렷이 기억한다.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 손을 잡고 도청 앞 광장 집회에 갔었다.

법대생 박관현은 고시 공부를 하다 윤상원의 손에 이끌려 들불야학 교사로 합류했다 . 5월18일 아침 학교를 빠져나온 박관현은 광천동 들불야학으로 가서 윤상원을 만났다. 윤상원은 잠시 숨을 것을 권했고 , 박관현은 여수로 피했다. 이후 ‘해방 광주’ 상황이 됐을 때 많은 시민들이 박관현을 찾았지만 그는 끝내 광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서울서 도피 생활을 하던 박관현은 한참 후에야 윤상원이 도청에서 산화했다는 걸 들었다. 도피 생활 중에도 낡아빠진 양복과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윤상원의 것이었다. 박관현이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때 변변한 옷 하나 없자 윤상원이 자기 옷을 준 것이다. 서울에서 붙잡힌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관현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저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한다” 고 토로했다. 재소자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세 차례에 걸쳐 50여일 동안 단식을 이어가던 박관현은 1982 년 10월 12일 29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조기조 시인은 시 ‘박관현’ 에서 이렇게 썼다 . “그 남자 묘지 앞에 울고 있었네 / 살아서 부끄러운 이름으로 / 무명열사 ..... 그 이름 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 그 남자 빗돌을 쓸며 울고 있었네 / 그 남자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웠네 / 밤마다 찬 이슬 찬 서리 저리 내리는 /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누운 그 남자 … .”

전남대 민주길은 사회과학대로 이어진다. 민주길 바닥에는 항쟁 당시 시민들의 말이나 성명 같은 걸 네모 동판에 새겨 놓았다.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명의로 된 동판 글은 이렇게 돼 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는 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매화, 목련, 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사회과학대 교정에는 ‘윤상원 숲’ 이 있다 . 숲 안내판에는 ‘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이라 적혀 있다. 생전에 무등산에 올라 바위 위에서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금을 불고 있는 사진이 곁들여져 있다. 숲 중앙에는 결연한 표정으로 상념에 잠긴 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윤상원의 얼굴 조각이 있다. 그 옆으로 그가 5 월 27 일 새벽 항쟁 지도부 대변인으로서 계엄군의 도청 진입을 앞두고 한 마지막 말이 적혀 있다.

“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쟁에 임합시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윤상원은 광주항쟁에서 총을 들고 끝까지 싸우다 산화한 몇 안되는 인텔리 , 운동권 출신이다. 항쟁의 전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의 무게를 명확히 인식한 채 스러져 갔다. 운동권 지도부가 잡혀가거나 계엄군을 피해 광주를 벗어난 뒤에도 항쟁 기간 내내 시민들과 함께했다. 시민들의 시위가 점차 민중항쟁으로 진화하자 그 선두에 섰다.

항쟁 초기 윤상원은 들불야학 동료들과 ‘투사회보’ 를 만들어 광주 시민의 궐기를 촉구했다. 19 일 오후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에서 광주공원까지 이어진 시민들과 공수부대의 공방전 현장에 윤상원이 있었다. 다음날인 20 일 아침 윤상원은 서울에 있던 이태복과 통화에서 “아무래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계엄군이 철수한 뒤 시민수습대책위가 총기 반납 등 유화책을 꺼내자 윤상원은 정상용 등과 함께 항쟁파 지도부를 구성해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춘다. 윤상원은 5 월 27 일 새벽 도청 본관과 경찰국 통로의 맨 앞 창틀 벽에서 경계를 서다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이양현과 김영철이 윤상원을 급히 민원실로 옮겨 뉘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광주를 끝까지 보듬고 산화한 윤상원이야말로 오월 광주의 영원한 상징이다.

‘김남주 뜰’ 바닥 구리동판에는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새겨져 있다.

인문대 옆 정원에는 ‘김남주 뜰’ 이 있다. 알림판엔 “ 그 이름 석 자가 칼이요, 시였던 혁명 시인” 이라고 적혀 있다. 김남주는 전남대 영문과 재학 중 최초의 반유신투쟁을 위한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 을 제작·유포하다가 1973년 구속됐다. 다시 1979년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1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광주항쟁 기간에는 투옥 중이었다. 김남주를 저항시인으로 자리매김한 510여 편의 시 중에서 360여 편이 옥중에서 쓰였다. 국내외의 석방운동 끝에 1988년 9년 3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1994년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뜰 바닥의 구리 동판에는 나중에 민중가요로 만들어진 그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김남주 뜰 옆 인문대 건물로 들어서니 1 층에 김남주 기념홀이란 명판이 있다. 문은 닫혀 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니 기념홀 문이 빼꼼히 열려 있다. 때마침 청소하는 분이 들어와 있다. 김남주 시인이 반겨준 걸까. 매우 세련된 강의실 겸 기념관이다. ‘조국은 하나다’ 라는 김남주 시인의 시가 뒷벽에 크게 새겨져 있고 연대기가 벽에 빙 둘러 있다. 강단에는 김남주 시인의 전신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정성스레 만든 기념홀이다. 인문대 앞에는 벤치들이 드문드문 놓인 조그마한 언덕이 있다. 사색하거나 독서하기 딱 좋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잠시 벤치에 앉아 김남주를 생각했다.

농생명과학관 앞 ‘윤한봉 정원’. ‘사람은 곰바우가 진짜지!’라는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윤한봉 정원’은 농생명과학관 앞에 있다. ‘5·18 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라고 적혀 있다. 뭉툭하게 누운 어록비에는 ‘사람은 곰바우가 진짜지!’ 라는 말이 있고, 연대기에는 ‘합수( 合水 ) 윤한봉, 가장 낮은 곳에서 퇴비로 살다’ 라고 돼 있다. 윤한봉의 평소 언행을 적절히 곁들여 추모하고 있다. ‘곰바우’는 윤한봉이 잘 쓰던 말이다.

“남 눈치나 보고 운동을 통해 자기를 내세워볼까 하는 뺀들바우는 필요없어요 . 우리에게는 곰바우, 돌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광주항쟁 이후 수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한청련을 조직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 때 자주 했다는 말이다. 윤한봉이 생전에 자신의 호로 삼은 ‘합수’ 는 호남 방언으로 똥거름, 즉 퇴비를 말한다. 윤한봉은 똥거름처럼 살겠다는 뜻으로 지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가는 곳엔 사람이 합치고 모여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전남대 축산학과생 윤한봉은 1974 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윤한봉은 항쟁 직전인 5 월 15 일 광주 두암동의 한 야산에서 정상용 , 윤상원 등 후배 8 명과 만난 자리에서 군부의 강경 조처를 예견하면서 “민중이 폭발하는 혁명적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신군부는 항쟁의 배후로 윤한봉을 수배했고, 1년여의 도피 끝에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12년 간의 미국 생활 동안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하면서 ‘5·18 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1993년 윤한봉의 귀국 일성은 “나는 영웅이 아닌 도망자일 뿐입니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아가겠습니다” 였다. 다음날 망월동 묘역을 찾아 윤상원과 박관현 묘지 앞에서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이후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일절 거절한 채 5·18 정신 계승에 전념하다 2007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한봉의 너른 품처럼 정원 근처 수목원에는 훤칠한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다. 홍매화, 백매화, 목련, 산수유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 숲속 산책길은 정갈하고 넉넉하다.

전남대를 나와 광주역 쪽으로 걸었다 . 네거리 도로표지판에 ‘무등산’ 표식이 선명하다. 이정표에 쓰인 ‘무등’ 을 보니 왠지 정겹고 반갑다 . 광주의 영원한 지표, ‘ 무등’ 의 너른 품을 보는 듯했다. 문득 오월 광주를 노래한 김준태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아아 ,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 피눈물을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

글 · 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 참고자료 )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창비 , 2017)

김상봉 , ‘ 철학의 헌정 ’( 도서출판 길 , 2015)

최유정 , ‘ 박관현 평전 ’( 사계절 , 2012)

김상집 , ‘ 윤상원 평전 ’( 도서출판 동녘 , 2021)

안재성 , ‘ 윤한봉 ,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 창비 , 2017)

5·18 기념재단 , ‘5 월문학총서 1 시 ’( 도서출판 심미안 , 2012)

광주광역시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 ’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 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 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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