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기술의 진보에도 왜 민주주의는 퇴행할까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였던 1989년 톈안먼 사태는 서구 세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무력으로 자국 시민을 진압하는 중국 공산당의 모습은 분명 자유주의적 가치와는 양립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는 중국에 대해 결정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판단의 근저에는 일종의 역사적 낙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소득이 증가하며, 중산층이 형성되면 정치적 민주주의 역시 뒤따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경험은 이런 낙관론의 생생한 사례였다. 한편으론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국가 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히게 되고, 그 결과 전면전의 가능성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난 몇년의 현실은 이러한 낙관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국지적 충돌을 넘어서는 전면전 양상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4년 넘게 지속되며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중국의 시진핑은 권력 집중을 강화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공고히 했고,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 기존의 자유주의적 질서에 균열을 냈다. 2021년 1월 미국 의사당 습격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정성마저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여기에 러시아의 푸틴, 튀르키예의 에르도안과 같은 ‘스트롱맨’들이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데이터화 된 개인 보호에 한계
전쟁과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뚜렷한 균열이 드러난다. 얼마 전 구글 엔지니어들은 인공지능(AI)의 군사적 활용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 밖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윤리적 우려를 제기한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전혀 다른 대항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 팔란티어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과 알렉스 카프로 대표되는 기술 엘리트들은 미·중 경쟁이라는 현실 속에서 기술과 군사력의 결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시각에서 윤리적 주저함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뿐이다. 기술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국가의 핵심 자산이며,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피터 틸의 영향을 받은 벤처 캐피털리스트 출신 J D 밴스가 부통령으로 부상한 점도 미국 정치가 기술 엘리트, 신우파, 국가주의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었던 서구 민주주의가 AI·데이터 자본주의에 직면하면서 나타나는 기능부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서구 민주주의는 도덕적 원리만으로 탄생한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업자본주의에 적합한 정치적 상부구조였다. 봉건제 아래 농민은 토지와 신분제에 묶여 있었다. 산업자본주의는 농민을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이동시켜야 했다. 노동자는 법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이어야 했고,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근대의 법과 정치는 계약의 자유, 사적 소유, 법 앞의 평등,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발전시켰다. 물론 보통선거와 노동권은 자본주의가 선물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이었지만, 산업자본주의가 요구한 인간형은 적어도 ‘자유로운 계약 주체’였다.
그러나 오늘날 부상하는 AI·데이터 자본주의는 다른 인간형을 요구한다. 이 체제에서 개인은 더 이상 단순한 노동력 제공자나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검색, 이동, 소비, 의사소통 등 일상의 모든 행위가 데이터로 전환되며, 개인은 끊임없이 데이터를 생성하는 존재로 재구성된다. 즉 ‘권리의 주체’ 이전에 ‘데이터의 발생원’으로 포착되는 경향이 강화된다. 이 변화는 정치적 구조에도 압력을 가한다. 계약하는 개인을 전제로 한 법과 제도는 데이터화된 개인을 설명하고 보호하는 데 한계를 가지게 된다.
데이터의 광범위한 활용이라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권위주의 체제가 갖는 기능적 우위가 부각된다. 민주주의 국가는 개인정보 보호, 표현의 자유, 사법적 AI 견제와 같은 다양한 제약 속에서 움직인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는 이러한 제약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따라서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더 강제적으로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다. 감시와 통제, 예측을 핵심으로 하는 AI 기술은 이러한 환경과 높은 친화성을 보인다. 알고리즘의 눈으로 보면 불복종, 느린 절차, 반대 의견 등은 시민적 권리이기 전에 시스템의 비효율처럼 보일 수 있다. 최근 AI 생태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국의 약진은 그들의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무관하지 않다.
직면한 문제는 기술의 방향성
그러나 권위주의가 필연적으로 우월하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AI는 데이터의 양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좋은 데이터, 오류 수정 능력, 비판적 검증, 법적 안정성, 사회적 신뢰가 필요하다. 권위주의 체제는 통제에는 강점을 가지지만, 진실을 왜곡하거나 비판을 억압함으로써 오히려 현실 인식의 오류를 키울 수 있다. 문제는 AI 그 자체가 아니라 AI와 데이터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감시하며, 어떤 정치적 질서 안에 둘 것인가다.
결국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기술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피터 틸이나 알렉스 카프가 제시하는 기술 지상주의적 세계관은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리가 쉽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후순위로 밀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목적이 되고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그 체제에서 나타나는 극단의 효율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기술은 언제나 권력과 결합해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결합의 방식이 바뀌는 전환점에 서 있다. 기술의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규범과 제도의 방향도 중요하다. AI 시대가 권위주의의 시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것인지는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이며, 동시에 정치의 문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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