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이어 경제까지… “한미관계 위험 수위”
공화당 의원 54명 “쿠팡 등 美기업 표적 공격 멈춰달라” 서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 소재지로 ‘평북 구성’을 언급한 이후 불거진 한미 관계 갈등이 안보 분야는 물론 경제 분야로도 확산하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한미 관계가 폭발 직전의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상황을 심각하게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미국 공화당의 최대 규모 정책 코커스 중 하나인 ‘공화당 연구위원회(RSC)’ 소속 하원의원 54명은 21일(현지 시각) 강경화 주미 대사에게 “양국 관계의 추가적 긴장을 피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에 대한 표적 공격을 즉각 멈출 것을 요청한다”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애플, 구글, 메타, 쿠팡 같은 미국 기업들이 조직적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특히 우려스럽다”며 “한국 정부가 2025년 11월 발생한 민감도 낮은(low-sensitivity) 정보 유출을 쿠팡에 대한 범정부적 공격을 하기 위한 구실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정부·여당이 빅테크 기업의 독과점 횡포를 막는다며 추진해 온 ‘온라인플랫폼법’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행정 제재와 수사에 우려를 표명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최근 우리 측에 쿠팡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 우라늄 농축 권한 확보 등 안보 합의 이행을 위한 고위급 외교 협의가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의 무역법 301조 조사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전작권·원잠·투자 등 곳곳 균열… “갈등 해소 노력도 소극적”
청와대·외교부는 22일 “쿠팡 관련 이슈가 한미 간 안보 논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미측과 지속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면서도 “안보 논의는 쿠팡 사안과 별개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미국 정부가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법적 안전’ 문제를 거론한 것과 관련해서는 “쿠팡에 대한 조사는 우리 국내법과 적법 절차에 따라 처리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쿠팡 문제와 안보 합의 이행 연계를 수용할 수 없고, 김 의장의 법적 처벌과 관련된 어떤 보장도 할 수 없다는 취지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한미 간에) 접점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고민스럽다”며 “쿠팡 문제는 사법 절차와 관련된 문제라서 외교적으로 협의해서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 54명은 강경화 주미 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쿠팡이 “범정부적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미국 측은 과거 국내 대기업 등에서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발생했을 때와 비교해 쿠팡이 더 광범위한 제재를 받고 있으며, 이것이 ‘부당한 차별’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정부가 쿠팡 문제 해결 없이 안보 합의 이행 협의가 불가능하다고 한 배경에도 비슷한 인식이 있다. 지난해 한미가 체결한 ‘조인트 팩트시트’에는 ‘망 사용료, 온라인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 있어서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미국 측은 한국이 쿠팡을 차별한다면 이 약속 위반이 되고, 따라서 미국도 ‘한국의 우라늄 농축,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절차 지지’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같은 다른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한미 간의 이견이 계속되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협력’ 등 다른 합의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이날 국회에서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구성 우라늄 농축 시설’ 관련 발언으로 미국 측의 대북 정보 공유가 제한되고 있는 것에 대한 여야의 공방이 이어졌다. 국회 국방위원장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전날에 이어 이날도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달 10일과 11일 용산 국방부 청사를 방문해 안규백 국방부 장관에게 항의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방부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안 장관은 “브런슨 사령관과 콕 집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 나눈 적은 없다”고 했다. 브런슨 사령관과 여러 차례 제반 상황에 대해 대화한 적은 있지만, ‘구성’ 발언을 특정하지는 않았다는 취지다. 안 장관은 또 미국의 정보 공유와 관련해 “크게 제한된 사안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지난달 11일 국방부를 찾아 안 장관과 한미 연합 훈련과 중동 사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하순에도 다시 국방부를 방문했지만, 안 장관이 ‘다른 접견 일정이 있다’고 해서 늦은 오후 화상 통화로 접견을 대신했다고 한다.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국방장관이 다른 일정을 이유로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정보 공유 일부 제한이란 한미 간의 논의가 꽉 막혀 미국이 일종의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인데, 해결 노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양국 모두에서 정치권의 ‘강경파’들이 한미 관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미 투자 지연과 호르무즈 파병 거부 등에 대해 한국에 불만을 표출하고, 이란 전쟁 후 대미 여론이 악화하자 이재명 대통령이나 우리 정부도 반감을 드러내면서 불협화음이 표면화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외교 관례에 어긋나게 쿠팡에 대한 사법 절차에 문제를 제기한 것도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성향과 관련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는 한 달 전쯤 정 장관의 발언과 관련한 미국의 ‘경고 메시지’를 전달 받았지만, 여권 출신 참모들이 ‘공연한 트집’ 정도로 여기면서 적극 대응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과 관련해서는 청와대의 ‘자제 요청’으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이달 들어 열려던 ‘쿠팡 TF 정부 부처 간담회’를 취소했다고 한다. 다만 여당 강경파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왜 우리가 미국 말을 들어줘야 하냐”는 불만이 팽배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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