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리] 단종을 기억하는 이유
600년 전 비극적인 왕의 이야기가 극장을 달구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다. 역대 국내 개봉작 흥행 순위 8위에도 올랐다. 지난 주말 극장을 찾은 나 역시 단종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지난달 4일 개봉한 영화는 1453년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 등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 이홍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마을 부흥을 위해 스스로 유배지를 택한 촌장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의 삶도 함께 담아낸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군주에게 그 자리는 권위보다 위태로움에 가까웠다.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면서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하자 노산군으로 강등돼 청룡포로 유배됐다. 강물이 길을 막고 산이 둘러싼 외진 땅. 왕이 아니라 지워진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단종은 고작 열일곱에 죽음을 맞았다.
단종은 뚜렷한 치적을 남긴 군주는 아니다. 그럼에도 단종의 흔적이 남은 곳에는 지금도 발길이 이어진다. 유시민 작가는 오래전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단종과 관련된 유배길과 장소들을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장소마다 특정한 이름이 붙어 기억되고, 지금도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 결론은 세조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단종이 금성대군에게 보낸 편지의 뜻도 여기에 닿아 있다.
'숙부님, 저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한 유배자가 아닌 역사의 증언자로서 숙부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성공한 역모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면 앞으로의 조선은 창칼을 앞세운 피비린내 나는 난이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 했던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려 했다는 기록이 후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왕좌를 빼앗긴 나약한 왕이지만, 부정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설령 저항이 실패하더라도 잘못된 역사에 맞섰다는 기록은 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조는 국가 통치 규범을 확립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되레 부당하게 꺾인 삶에 더 마음을 둔다. 단종을 기리는 마음은 부정한 방식으로 무너진 정의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짧은 삶에도 단종이 오래 회자되는 이유다.
/문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