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리스본 28번 전차와 부산 86번 버스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매거진 ‘집앞목욕탕’ 발행인 2026. 3. 1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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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직항편도, 가이드북도 없던 시절, 리스본으로 떠났다.

칭칭 소리 내며 달리는 전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부산의 86번 버스가 떠올랐다.

86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든, 가공되지 않은 부산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스본의 28번 전차는 대서양의 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고, 부산의 86번 버스는 태평양을 곁에 두고 망양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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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매거진 ‘집앞목욕탕’ 발행인

포르투갈 직항편도, 가이드북도 없던 시절, 리스본으로 떠났다. 경유지인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론리 플래닛을 사 들고 도착한 리스본은 놀랄 만큼 부산을 닮아 있었다. 시민들의 휴식처인 테주강 어귀는 낙동강 하구처럼 넓었고, 4월 25일 다리는 광안대교를 떠올리게 했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 첩첩이 쌓인 스카이라인은 산복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던 부산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리스본의 도심 언덕을 오르내리는 28번 전차.


리스본을 찾은 진짜 목적은 28번 전차였다. 노랗고 작은 전차는 90년이 넘은 차체로 꼬불꼬불한 경사지 골목을 오르내리며 건물과 스칠 듯 말 듯 달렸다. 대부분의 리스본 트램이 현대식으로 교체되었지만, 28번 노선만은 여전히 1930년대 제작된 레모델라도(Remodelado) 모델을 고집한다. 구시가지의 골목이 좁고 굴곡이 심해 최신형 트램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전차는 퇴역하지 못한 채 오히려 도시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양쪽 벽이 손에 닿을 것 같은 골목을 빠져나갈 때마다 전차 안에서는 웃음과 탄성이 터져 나온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는 순간, 빨간 지붕 물결 너머로 대서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열린다. 언제나 만원인 전차 안에서 현지인과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같은 리듬으로 흔들린다. 누군가 기획해서 만든 관광상품이 아니라, 도시의 지형이 낳고 시민의 일상이 키워온 풍경. 그렇게 평범한 이동 수단 하나가 리스본을 찾는 이유가 되어준다.

칭칭 소리 내며 달리는 전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부산의 86번 버스가 떠올랐다. 한국전쟁 당시 교통부 청사가 자리해 ‘교통부’로 불렸던 범곡교차로와 수정동, 초량동을 지나 대청동 가톨릭센터까지, 피란민의 층위로 다듬어진 산복도로 망양로 구간을 완주하는 노선이다. 1969년 첫 운행을 시작한 버스는 산비탈에 자리 잡은 시민들의 발이 되기 위해 가파른 경사와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갔다. 버스는 왕복 2차선을 아슬하게 달리며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부산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지금도 망양로 구간은 숙련된 버스 기사만이 소화할 수 있는 고난도 노선으로 통한다. 어린 시절, 영주동 가파른 오르막에서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여유롭게 돌리던 기사님의 모습은 경외감마저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도시의 굴곡진 지형을 수십 년에 걸쳐 온몸으로 익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아닐는지.

86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든, 가공되지 않은 부산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다. 산등성이를 따라 굽이치는 골목과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부산만의 자산이다. 이러한 부산 특유의 역동적인 질감은 이제 가장 로컬다운 설렘으로 다가온다. 요즘 여행자들은 연출된 포토 스폿도 좋아하지만, 그 도시만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원형을 더 원한다. 처음 온 도시의 화려함보다, 다시 찾은 도시의 깊숙한 속살을 궁금해하는 ‘n차’ 여행자들이 늘고 있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리스본의 28번 전차는 대서양의 바람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고, 부산의 86번 버스는 태평양을 곁에 두고 망양로를 달린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두 노선은 닮은꼴 지형 위에서 오늘도 각자의 도시를 묵묵히 통과하고 있다. 부산의 다층적인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면, 86번 버스 여행을 권한다. 오늘도 버스는 눈부신 봄기운을 실어 나르며 산복도로의 가장 정직한 풍경 속으로 우리를 안내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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