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시선] 우리시대의영화㉗ 접속 - ‘멜로’를 비틀어 새로운 영화시대를 열다

1990년대는 재야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제도권으로 진입한 시기였다.
영화에서는 독립영화 <파업전야>(1990) 등을 제작해 파란을 일으킨 ‘장산곶매’의 영화 청년 장윤현과 이은이 <접속>(1997)을 통해 제도권 영화로 들어왔다. 1980년대 투쟁의 시대가 1990년대 대화의 시대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접속>은 라디오 음악프로 담당 PD 동현(한석규)과 홈쇼핑 텔레마케터 수현(전도연)이 PC통신을 통해 ‘접속’하게 되고 호감을 갖게 되는 이야기이다. 동현은 예전에 입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수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현과 수현의 대면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은 세 번(영화관 앞, LP판 가게 계단, 지하철) 스쳐 지나간다.
관객은 매번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기를 바라는 관객들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서스펜스의 도가니에 빠진다.

동현은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호주로 이민 갈 계획을 세운다. 이것을 알게 된 수현은 동현에게 전화를 걸어 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남긴다.
망설이던 동현이 극장 앞에 갔을 때,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앨범을 들고 있는 수현을 바로 알아본다. 그러나 동현은 모른 척하며 극장의 2층 카페로 올라가 수현을 지켜본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수현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동현은 끈질기게 망설인다. 그동안 관객들은 두 사람이 끝내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될까 초조해진다.
시간이 너무 늦어지자 수현은 2층 커피숍에 올라가 동현의 바로 뒤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 메시지를 남긴다.
두 사람이 등을 마주한 상태에서 그들을 연결해준 노래 ‘페일 블루 아이즈’가 흐르는 가운데, 수현은 동현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고백하고 동현은 그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동현은 수현이 커피숍을 나가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다.
관객이 “빨리 일어나 그녀를 붙잡아!”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동현은 수현을 만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이 영화는 1997년, 한국 영화 흥행 1위(서울 관객 67만여 명)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한석규의 파워를 다시 확인하면서, 아울러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주목받은 전도연이 ‘멜로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계기가 됐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인 PC통신(유니텔)뿐만 아니라 호출기, 음성녹음 유선전화기, 폴라로이드 카메라, 라디오 음악방송, 홈쇼핑, 원룸 아파트, 편의점 등은 1990년대에 처음 등장했거나 유행하기 시작한 것들로 젊은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는 1980년대 흥행을 주도한 에로영화가 쇠퇴하고 새로운 장르영화가 등장한 시기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중심으로 한 멜로드라마(로맨스) 영화였다.
<접속>도 남성 중심의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극 중 주인공들이 영화 내내 현실에서 만나지 않는 설정이 당시에는 너무 실험적인 이야기로 평가되어 제작사인 명필름에서는 투자자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가 완성된 다음에는 극장주를 대상으로 한 시사회에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멜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손잡는 장면조차 없는 영화의 흥행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기존의 한국 영화와 다른 새로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한국 영화계에 필요한 건 과거의 성공 사례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참신한 웰메이드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2000년대 한국 영화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97년은 11월부터 IMF 외환위기의 파고가 몰아닥친 해였다. IMF 외환위기를 통과하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몰려가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가운데, 각자도생으로 생존하는 삭막한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접속>은 IMF 외환위기 직전인 9월 13일에 개봉했다. 현실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현과 수현의 모습은 여유와 낭만이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 같아 더욱 아려온다.
● 영화 '접속'의 새로운 이야기
1. 전도연 배우의 첫 번째 영화 출연작이다.
2. 1969년에 발매된 앨범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LP로 전 세계에 5만 5천 장이 팔려나가 희귀본이 되었다.
3. PC통신은 2017년 8월 31일에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4. 영화의 주요 공간인 피카디리 극장은 현재 ‘CGV피카디리1958’로 상호가 변경되어 운영 중이다.
글 : 영화평론가 김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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