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 다른 뜻…사랑의 언어도 다르다 [.txt]

한겨레 2026. 3. 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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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식의 세계 마음 사전
‘롤리그’, 스웨덴은 재미, 덴마크는 차분
‘사랑해’란 말도 나라마다 맥락 달라져
문화마다 다른 연애와 사랑의 방식
딱히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가 첫 만남 자리에서 줄창 재미없는 얘기를 떠들며 잠자리를 원하다가는 여자에게 차인다. 게티이미지뱅크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알게 되는 문구 중 하나가 ‘사랑해’다. 영어는 아이 러브 유(I love you)처럼 주어와 목적어를 다 써야 말이 분명해지지만, 한국어는 맥락만 통하면 동사만 있어도 되듯이 이 말 하나만 들여다봐도 언어들 사이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하지만 겉으로 뜻이 같다고 해서 속까지 똑같지는 않다. 언어마다 이 말을 하는 빈도나 상황, 맥락이 다르고 또 사람마다 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사람이 보기에는 서양 사람은 다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지만, 프랑스나 남유럽, 중남미 사람은 영어권이나 독일, 북유럽 사람이 감정 표현을 별로 안 한다고 느낀다.

스웨덴 티브이(TV) 드라마 ‘엘스카 메이’(Älska mig: 날 사랑해 줘)가 얼마 전 한국 드라마 ‘러브 미’로 리메이크 방영됐다. 스웨덴어 제목을 곧바로 한국어로 옮기면 너무 직접적인 감정을 드러내거나 간절한 느낌이 들다 보니 영어로 옮겨 그런 느낌을 희석시킨 셈이다. 첫 회의 첫 장면을 비교해보자. 공통점은 남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인데 외모가 딱히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가 자기 얘기만 주야장천 떠들고 결국은 그날 잠자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스웨덴판은 틴더 앱으로 낮에 커피숍에서 만났고 남자가 옷차림새도 후줄근한 반면, 한국판은 소개팅으로 저녁에 비싸 보이는 식당(술집)에서 만났고 변호사인 남자가 적당히는 차려입고 나온 점이 다르다.

한국 드라마의 위세가 세계적으로 대단해서 동남아시아, 중동, 중남미 등지에서 특히 인기가 많으나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 거리도 꽤 먼 북유럽에서는 반응이 별로 크지 않다. 북유럽은 아마도 여러가지 문화적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가장 멀 텐데 세계에서 양성평등이 가장 굳건하게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스웨덴의 드라마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되어 이채로운데,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원하는 남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지만 속내는 꽤 다르다. 어떤 짧은 동영상에서 노르웨이 여자 코미디언이 프랑스 여자에게 연애 상담 비슷한 걸 한다. 남자가 자신에게 데이트를 하자는데 사이코패스 같다는 것이다. 프랑스 여자가 그게 호감 표시인데 뭐가 문제냐니까, 노르웨이 여자는 잠자리도 안 한 남자가 왜 데이트부터 하자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약간의 과장과 개인차는 있겠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잠자리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사귀는 과정은 별개이며 때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거나 부담스럽게 느끼기도 한다. 진지한 교제는 그다음 문제다.

만남을 망친 것은 두 드라마가 같다. 스웨덴판은 남자가 커피값은 따로 내자고 해서 여자가 40크로나를 건네는데, 남자는 커피값이 44크로나이니 4크로나(600원 정도)가 모자란다고 한다. 여자는 첫 만남에 남자가 잔돈까지 요구하느냐고 묻는다. 네덜란드는 철저한 더치페이로 유명하지만 스웨덴은 조금 달라서 저 정도 잔돈은 남자가 적당히 계산하기 마련이라 이 장면은 남자의 옹졸함을 드러낸다. 한국판에서는 이보다 훨씬 비싼 저녁값이 나왔고 남자가 반만 내겠다고 하니까, 목적도 달성 못 하고 돈까지 내면 너무 아까울 테니 여자가 다 내주겠다고 한다. 더럽고 치사하니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이다. 아마 네덜란드판이 리메이크된다면 남자가 잔돈을 요구하는 게 이상하지 않고 흔한 태도일 테니 옹졸한 캐릭터로 묘사하려면 여자한테 다 뒤집어씌우는 쪽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원작과 비슷하게 리메이크도 여자가 남자에게 못생겨서가 아니라 매너도 없고 지루해서 싫다고 말한다. 원작은 남자가 갖추지 못한 성격을 스웨덴어 트레블리그(trevlig: 착하다, 상냥하다, 즐겁다), 롤리그(rolig: 재밌다, 흥겹다)로 나타낸다. 다른 언어들의 자막을 보면 영어 나이스/퍼니(nice/funny), 노르웨이어 휘겔리/아르티(hyggelig/artig), 덴마크어 쇠드/모르솜(sød/morsom)으로 번역된다. 어원이 같은 낱말들이 여러 언어에서 뜻이 달라지듯이 이 대사의 북유럽 세 언어도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롤리그는 덴마크어/노르웨이어에서 ‘조용/차분/침착하다’라는 뜻인데 스웨덴어에서는 더 긍정적으로 발전해 ‘재밌다’가 되었다. 여기에 스웨덴어 부정 접두사 o-가 붙은 오롤리그(orolig)가 ‘재미없다’가 아니라 ‘불안/초조/뒤숭숭하다’인 데서도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다. 극 중 남자는 혼자 떠들고 태도도 불손한데 아마도 (잘생겼으면서) 조용하고 정중하면 재밌는 사람이 된다고 풀이할 수도 있으려나.

스웨덴 원작은 남자가 여자에게 사진보다 늙어 보인다며 ‘디스’하고 한국판은 남자가 여자를 잘 안다며 키를 수치로 언급하고 몸무게는 좀 더 나가는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한다. 앞서 말한 스웨덴어 트레블리그(trevlig)는 영어 스라이브(thrive: 잘 자라다, 번창/번영하다)와 뿌리가 같아서, 원래는 덴마크어 트리벨리(trivelig)처럼 ‘풍채가 좋다, 통통하다’를 뜻했다. 현재 대부분의 언어, 적어도 주요 선진국의 언어에서 ‘통통하다’나 ‘풍채 좋다’는 칭찬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한국판에서 스웨덴어 트레블리그의 어원이 나온 셈이다. 두 드라마의 남자들이 돈을 아끼며 스리프트(thrift: 절약, 검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스라이브와 뿌리가 같다.

스웨덴과 한국이라는 서로 꽤 다른 문화권이라도 자신과 맞는 사랑을 찾고 싶은 마음이야 비슷할 것이다. ‘사랑’은 얼핏 뻔해 보이지만 한국 드라마가 제목을 영어 ‘러브’로 돌려 말했듯이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며, 드라마에 나오는 세 식구가 제각각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에서도 엿보이듯이 참으로 다양하다. 여주인공이 첫 만남에서 재미있는(rolig) 모습을 원했듯이 둘 사이에 재미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재미만으로 늘 함께하기는 어렵다. 재미가 없다고 해서 불안해지지(orolig) 않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신견식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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