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되나” 중동 사태에 기업들 로펌 자문 쇄도... 면책 조건은

김우영 기자 2026. 3. 1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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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계약 조건 검토 필수... 선언 절차도 철저하게 지켜야”

이 기사는 2026년 3월 13일 오후 2시 54분 조선비즈 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중동사태 초기였던 지난 1일 호르무즈 해협 인접 항구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제벨알리 항이 폭격을 당해 연기가 나는 모습. /선원노련 제공
중동 지역 지정학적 긴장으로 ‘불가항력’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석유화학 기업 한화솔루션이 지난 10일 고객사에 보낸 공문 내용 일부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으로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5%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차질 가능성이 커지자 원료 수급과 제품 운송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알린 것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다른 국내 기업들도 고객사에 불가항력 상황 발생 가능성을 통보했다.

◇기업들 “불가항력 적용되나” 로펌 자문 쇄도

중동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국내 기업들의 법률 문의도 급증하고 있다. 원자재 수입과 해상 운송 계약을 맺은 기업들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불가항력을 적용해 책임을 면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불가항력은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당사자의 통제 밖 사유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질 때 적용되는 법적 개념이다. 인정될 경우 계약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될 수 있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로펌들은 중동 사태 대응팀을 꾸리고 기업 자문 요청에 대응하고 있다. 중동에서 원자재를 들여오는 기업뿐 아니라 이들과 계약을 맺은 기업들까지 계약 이행 문제와 운송 지연에 따른 법적 책임 여부를 묻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특히 수출입·운송 계약과 관련해 계약서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 많다고 한다. 이번 이란 사태가 계약서에 규정된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하는지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 법에는 불가항력 개념이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다. 다만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불가항력이 인정되려면 사건이 당사자의 지배 영역 밖에서 발생했고, 당사자가 통상의 수단을 다했더라도 이를 예견하거나 방지할 수 없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대한상사중재원이 제공하고 있는 표준 물품매매계약서의 불가항력 관련 조항 내용. /대한상사중재원

계약서에 불가항력 조항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해역의 위험도가 높아졌더라도 항로 통과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불가항력이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 대체 운송 경로나 대체 공급 수단이 존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해운사의 경우 대체 항로가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핵심 쟁점이 된다.

계약서에 ‘전쟁’이나 ‘해상 봉쇄’가 불가항력 사유로 명시돼 있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대한상사중재원(KCAB)이 공개한 표준 물품매매계약서는 정부 규제, 천재지변, 전쟁, 해상 봉쇄, 혁명, 반란, 파업, 전염병 등을 불가항력 사유로 제시하고 있다. 계약 당시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없었고 이를 피하거나 해결하기도 어려웠다는 점을 입증하면 계약 불이행에 대한 면책을 주장할 수 있다.

불가항력 사유로 전쟁이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적용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계약서에 ‘정부의 행위’나 ‘정부의 법 집행’이 포함돼 있다면 전쟁 역시 정부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율촌 국제제재팀장 신동찬 변호사는 “통상 계약서에는 포괄 조항(catch-all clause)을 두어 불가항력 조항에 명시된 사유와 유사한 사건까지 포함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며 “개별 계약에서 해당 조항이 적용될 수 있는지 전문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운임·보험료 상승만으로는 인정 어려워

보험료와 운임 상승만으로는 불가항력이 인정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중동 사태로 선박 보험료나 해상 운임이 크게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계약 이행 면책을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 국제 중재 사례와 판례에서도 단순한 경제적 불리함만으로 계약 이행이 면제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외도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박윤정 외국변호사는 “보험사가 선박 보험 제공을 거부해 실제로 보험을 확보할 수 없게 되면 운송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며 “이 경우 불가항력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보험사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을 운항하는 선박에 대한 보험 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정서희

불가항력 조건뿐 아니라 선언 절차도 중요하다. 해협 봉쇄 등으로 운송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계약 상대방에게 계약서에 규정된 방식에 따라 통지해야 한다. 대부분의 계약서에는 이메일, 우편, 직접 통보 등 구체적인 통지 방식이 명시돼 있다. 신동찬 변호사는 “현지 상황이 외신을 통해 널리 알려졌더라도 계약서에 정해진 방식으로 통지하지 않으면 불가항력이 인정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도 기업 지원에 나섰다. 법무부는 지난 11일 ‘기업의 불가항력 대응 전략’ 보고서를 배포하고 해외 진출 기업 국제 법무 지원단을 통해 중소·중견기업에 법률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펌들도 적극 대응 중이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국제중재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기업 자문에 나섰고, 법무법인 세종은 김세진 선임외국변호사와 주이란 한국대사 출신 윤강현 고문이 참여하는 통상산업정책센터를 통해 대응 중이다. 법무법인 광장은 방산·기업 자문·해외 건설·보험·해상 분야 전문가로 ‘중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법무법인 율촌은 오는 18일 중동 사태에 따른 기업 대응 방안을 주제로 긴급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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