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건 금뿐" 금반지 줄 서서 산다... 지하 경제 양성화 나선 베트남[아세안 속으로]

정지용 2026. 3. 1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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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베트남 정부 '지하 경제'와의 전쟁
베트남 금값 국제 시세보다 최대 20% 비싸
정부의 금 통제,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 탓
코인 거래소 하나 없지만, 국민 21%가 보유
베트남 정부도 '지하 경제 양성화' 본격화
금 독점 포기, 코인 거래소 허가 등 파격 단행
시장 영향엔 시간... '통제된 자유' 시험대
베트남에서 '제물신의 날'인 2월 26일 하노이 금은방 거리에 아침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몰리자 가게 밖에 간의 주문대가 설치됐다. 하노이=정지용 특파원

지난달 26일 오전 7시 베트남 하노이 시내 딴수언 금은방 거리. 비 내리는 이른 아침인데도 금을 사려는 이들로 거리가 가득했다. 한 금은방 직원은 “원래 오전 8시 30분에 문을 열지만 밤샘 손님 때문에 새벽 6시에 가게를 열었다”며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간이 의자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날은 음력 1월 10일, 베트남에서 ‘테 탄 타이’라 부르는 ‘제물신의 날’이다. 이날 금을 사면 한 해 번영과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다만 새벽부터 줄을 서는 풍경이 단순히 미신 때문만은 아니다.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 정부 독점에 따른 금 품귀 현상 등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금은 핵심 자산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베트남 하노이 한 금은방에서 2월 26일 손님들이 신중한 얼굴로 금을 고르고 있다. 베트남 금값은 국제 시세보다 10~20%가량 프리미엄이 붙어 있다. 하노이=정지용 특파원

하노이 은행 직원이라 밝힌 르엉 린(34)은 신중한 얼굴로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들을 위해 순금 반지 3돈(11.25g)을 골랐다. 가격은 약 5,500만 동(300만 원). 베트남 관영매체 비엣남VN에 따르면 같은 무게 금의 국제시세는 약 268만 원인데 베트남 금값은 12% 비싼 것이다. 반면 한국금거래소(KRX)에서는 보통 국제 시세와 1% 안팎 차이로 관리된다.

린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꼬박 금을 모았다”며 “금값이 비싸지면 자산이 불어나는 것이라 좋다”고 했다. 옆에 있던 60대 남성도 “아들이 집값이 떨어졌다고 해 괜히 불안해졌다”며 “역시 믿을 건 금밖에 없다”고 했다.


왜 베트남은 ‘금’을 믿는가

베트남에는 공식 금융 시스템 밖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자산 시장이 있다. 장롱 속에 숨은 금 2,000톤과 국민 21%가 보유한 가상화폐다. 무허가 외화 거래도 빈번하다. 금·달러·코인이 왕성하게 거래되는 ‘지하 경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베트남 정부가 최근 금 시장 개방과 가상화폐 제도화 등 대대적인 금융 정책 전환에 나선 배경이다.

베트남인의 금 사랑은 굴곡진 역사에서 비롯됐다. 19~20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기, 베트남 전쟁, 통일 경제 혼란을 거치며 베트남에선 화폐 가치 폭락과 은행시스템 붕괴가 반복됐다. 1986년에는 연간 물가 상승률이 800%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도 겪었다. “현금은 언제든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1990년대 초까지 부동산, 오토바이 가격이 금으로 표시되거나 거래되는 경우도 흔했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베트남의 2024년 금 소비량은 55톤으로 세계 10위권이다. 하지만 이는 공식 집계일 뿐이다. 베트남 금거래협회(VGTA) 등 업계는 국가 통제를 피해 라오스 등에서 밀수되는 물량, 음지에서의 민간 거래 물량이 공식 통계의 20%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베트남 경제규모가 세계 30위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소비량이다.

베트남 정부에서 지정한 유일한 금괴인 사이공주얼리컴퍼니(SJC) 금. 베트남은 금 생산과 유통을 정부가 통제한다. 한국에서는 민간기업의 금 생산과 유통이 가능하다. 비엣남뉴스 캡처

정부 독점이 키운 프리미엄

여기에 정부의 금 시장 통제가 금값을 더욱 밀어 올렸다. 베트남 정부는 도이머이(개혁·개방) 정책 이후인 2009년 민간에 금 수입을 허용했지만, 금 수입 급증으로 외화 보유액이 크게 감소했고, 2012년 금 생산·유통·수입을 국가가 독점하기로 했다.

공급이 제한된 상황에서 수요는 급등했다. 그 결과 ‘웃돈’을 주고서라도 금을 사게 됐다. 지난달 26일 기준 베트남 금괴 표준 사이공주얼리컴퍼니(SJC) 골드바는 약 5,805달러(832만 원)로 국제시세 5,180달러(743만 원)보다 12%가량 높았다. 베트남 금값은 평소 국제시세보다 10~20% 프리미엄이 붙는다.

베트남 경제 전문가 레 쑤언 응히아 국가금융통화정책 자문위원은 지난해 11월 금 정책 관련 정부·협회·기업이 참여한 포럼에서 “평균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베트남에서 국민이 미국이나 유럽보다 20%나 더 비싼 가격에 금을 사야 한다”라며 “정부의 금 수입 독점이 시장 왜곡을 초래했다”고 했다.

베트남 닌빈 경찰서가 지난달 9일 난빈성 한 금은방 주인을 금 거래 수익 등 1조5,000억 동을 은닉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히며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베트남에서는 무허가 금은방에서의 거래, 라오스 등지에서의 금괴 밀수가 사회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난빈 경찰서 제공 VN익스프레스 캡처

2000톤 금을 잡아라

베트남 정부도 민간이 보유한 막대한 금이 고민이다. 베트남금거래협회는 민간이 보유한 금을 약 500톤으로 추산했는데, 베트남금융투자자협회(VAFI)는 최대 2,000톤에 달할 수 있다고 본다. 민간에 쌓인 자산이 약 2,500억 달러(366조 원)에 달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베트남 예산(775억 달러) 세 배가량의 자산이 '장롱 속, 침대 아래' 쌓여 있는 셈이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빈롱성의 타치 푸옥 빈 의원은 국회에서 “금은 민간 금고에 보관돼 경제 발전으로 전환되지 않는 막대한 자원”이라며 “가정이 보유한 금의 10~15%만 금융 시스템으로 유입돼도 인프라 구축과 기술 혁신을 위한 귀중한 자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거래소 없는데 코인 거래는 세계 4위

베트남은 가상화폐(코인) 투자 강국이기도 하다. 자동차 판매를 하는 르엉 딘(36)은 2021년부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샀고, 가격변화가 큰 알트코인에도 손을 댔다. 그는 “상승장에서 크게 벌기도, 하락장에서 투자금 절반을 잃기도 했다”며 “베트남엔 투자할 만한 게 마땅치 않고, 가상화폐는 금·부동산보다 적은 돈으로 할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코인플랫폼 트리플A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베트남의 가상화폐 투자자는 약 2,090만 명으로 인구의 21%에 달했다. 2023년 기준으로 글로벌 가상화폐 거래소 바이낸스 이용자 규모에서도 베트남은 중국·한국·터키에 이어 4위였다. 경제지 베트남인베스트는 민간이 보유한 가상화폐 규모를 약 1,000억 달러(139조 원)로 추산했다.

자산 축적에 관심이 많고 디지털에 익숙한 베트남 청년 세대가 가상화폐 거래의 주축으로 추정된다. 베트남 해외 노동자들이 송금 수수료가 ‘제로(0)’에 가까운 가상화폐 이용을 선호한다는 관측도 있다. 뉴욕 가상화폐 분석업체 체이나리시스는 “베트남은 송금, 게임, 저축 등 일상적 금융에 가상화폐가 자리 잡은 성숙한 시장”이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는 합법적 가상화폐 거래소가 없다. 정부가 가상화폐를 공식 화폐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개인의 보유와 거래를 금지하지도 않았다. 가상화폐 거래가 ‘법적 공백’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6일 찾은 베트남 하노이 하쭝 환전 거리. 한 환전소에서 환전이 이뤄지고 있다. 하노이=정지용 특파원

지하 경제 양성화 나선 정부

베트남 정부는 최근 금융 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나섰다. 지난해 9월에는 정부의 금 독점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했고, 상업은행과 민간기업에 금 생산 및 유통을 허용하기로 했다. 올해 2월에는 국가 금 거래소 설립 계획도 내놨다. 민간이 보유한 금을 금융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한 조치다.

가상화폐를 제도권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올해 1월 시범사업 형태로 5개 사업자에 가상화폐 거래소 운영 허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코인거래소 두나무도 베트남밀리터리은행(MB)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진출을 모색 중이다. 두나무 측은 “베트남에서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 이용이 커져 국부 유출이 심해지면서 베트남 내에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들려는 상황”이라며 “시장 잠재력을 고려해 협업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지하 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판단이다. 아세안 전문가인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전략실장은 “베트남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민간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라며 “음지에서 이뤄졌던 거래들을 합법화해 제도권에 편입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 “경제 발전을 위해 민간 부분의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달러 통제도 강화했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달 9일부터 금은방·여행업체·기념품 상정에서 이뤄지는 무허가 외화 환전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했다. 1,000달러 미만의 경우 경고 조치에 그치지만 재범이나 금액에 따라 벌금과 함께 환전 외화 전액을 압수한다.


통제된 실험 성공할까

그러나 제도 변화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6일 하노이 ‘환전 거리’로 통하는 하쭝 거리에서 기자가 한 금은방에서 “환전이 가능하냐”고 묻자 40대 여성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계산기를 두드려 1,700이라고 썼다. 100원에 1,700동을 쳐주겠다는 말이다. 이날 기자가 들른 4곳의 환전소 모두 환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한 환전소에 “단속은 안 하냐”고 물으니 “왜 그런 것을 물으냐. 단속을 한 적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금과 코인도 마찬가지다. 후인 쭝 칸 베트남 금거래협회 부회장은 VN익스프레스에 “금 관련 정책이 어떻게 시행될지 지침이 더 필요하다”며 “새로운 정책이 금값에 영향을 미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가상화폐 거래소를 만들더라도 규제가 생기고 세금이 붙으면 이용이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통제된 자유’를 원하는 베트남식 ‘금융 도이머이’가 이제 막 시험대에 올랐다.

하노이= 정지용 특파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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