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당신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01 시항
새벽에 배가 하나 있을 거야. (…)
배는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배야. 너는 조타실 바닥에 앉아서 배가 출발하고 도착하길 기다리면 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을 거야. (…) 너는 타거나 타지 않을 수 있어. 네가 타지 않아도 나는 거기에 있을 거야. 네가 없는 배가 오면 나는 거기에 있을 거야. 네가 없는 배와 함께 잠시 동안 거기에 있을 거야.
유진목,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나는 가끔 머릿속에서 이 시가 터진다. 피가 통하지 않을 때나 길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 있을 때. 울고 싶은데 터지지 않을 때, 그런 때. 누군가가 나를 데려다주려고 애쓴다니. 구원하겠다니. 이곳에서 나를 빼내주겠다니. 나는 이 시의 물기와 간절함과 의연함을 믿는다. 자주 이 시 속의 '너'가 된다. 불가항력의 한 사람이, 내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도 될 그 한 사람이 어느 새벽 물 위에 띄워놓은 배를 타러 간다.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6년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대표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02 고추잠자리
내 나이 댓 살 났을까 했을 때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먹은 외사촌 형이 땅바닥에 비틀배틀 옆으로 길게 줄을 한 가닥 그어놓고, 요걸 넘음 넌 죽는다 알았제! 하며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친구 몇이와 어디론가 가버렸다. (…)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푸르스름한 날개를 하고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저만치 장다리꽃밭을 두어 바퀴 돌다가 제 마음에 들었던지 장다리꽃 하나가 가앉는다. (…) 끝내 나는 그만 거기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김춘수,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 2004
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다섯 살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촌 형이 땅바닥에 '길게 줄을 한 가닥 그어놓고, 요걸 넘음 넌 죽는다 알았제! 하며 눈을 한번 부라리고는 친구 몇이와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다. 형은 같이 놀자 들러붙는 어린 것이 귀찮았을 것이다. 시의 마지막은 '따라오면 죽는다'는 협박이 무서워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있던 '나'가 잠이 드는 장면이다. 그런 다섯 살배기가 귀엽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하여튼 어린 '나'는, 혼자 버려졌던 저 시간에 본 풍경들, 그리고 거기서 느낀 감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모든 게 무서웠던 어린 시절, 동시에 그렇게 무서웠던 만큼 세계가 경이로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김상혁
2009년 세계의문학 신인상 시 부문 당선, 2023년 통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03 한국 여성들은 왜 꼭두새벽 비빔밥을 먹는가
(…)
어떤 것도 하지 못할 목마름. 나는 나물이 먹고 싶다. 그 보다는 나물같이 후루룩 마셔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 거다.
기억
비빔의 효용성
(…)
여자들은 대체 왜 불 꺼진 주방 한구석에 쪼그려앉아 양푼을 끌어안고 있는 걸까.
(…)
권태
다채로운 자연의
꼭두
(…)
기름져 때깔 좋은 암호들 그러니까 거짓말처럼
한술 더 떠진 뭉뚱그려짐이 새벽에는 참 좋다.
박유빈, <성질머리하고는>, 난다, 2025
시인의 첫 시집이 나오면 가장 먼저 구매한다. 그 시인의 첫걸음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반, 그 걸음을 지켜보며 해찰하는 나 자신을 다그치고 싶은 마음 반이다. 작년 말에 귀한 첫 시집을 만났다. 박유빈의 <성질머리하고는>이 바로 그 시집이다. 첫 시는 '한국 여성들은 왜 꼭두새벽 비빔밥을 먹는가'다. 이 시를 읽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구멍 뒤로 침을 자꾸 삼켰다. 꼭두새벽에 '불 꺼진 주방 한구석에 쪼그려앉아' 비빔밥을 먹는 이를 떠올렸다. 소화 이전에 섭취가 있고, 논리적인 배열 이후에 비빔이 있다. 권태를 해체하는 기막힌 손놀림은 필수다. 첫 시를 읽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새해에 새 참기름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오은
2002년 현대시 신인상 수상, 2019년 제27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당선대표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없음의 대명사>
04 그래서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누군가의 다정한 안부에도 무참히 무너지던 날이 있었다. 이미 혼자였지만 더 혼자가 되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그때 읽었던 김소연 시인의 시집은, 나의 고독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혼자여도 돌아볼 게 많은, 혼자여도 물어볼 게 많아진다는 사실을 시로 읽어주었기에.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너무 잘 지내고 싶지 않은, 지키고 싶은 슬픔도 있었다는 걸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서윤후
2009 현대시 신인상 수상, 2025년 통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대표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나쁘게 눈부시기>
05 초량 차이나타운
나야, 언니. 초량 차이나타운, 노란 문이야. 나도 처음이었어, 언니 같은 백보지는. 보다 보다 첨이었어. 배양접시 위에서 배양된 티 없는 보지랄까, 터럭도 없고, 냄새도 없고, 표정도 없는 유리 보진 첨이었어. 나야, 잡년이지. (…) 묻지도 마, 내가 얼마나 질긴 년인지, 급살(急煞)조차 나를 게웠다니까. 구렁이가 삼키다 뱉은 비둘기처럼 반쯤 녹아 회색 죽이 된 나를, 언니. (…) 그건 그렇고, 언니가 내 몸에 새로 뚫어놓은 구멍, 내 몸에 뚫려 있지만 내 것은 아닌, 사람의 것이라곤 할 수 없는 이 구멍의 용도는, 대체 뭐지, 언니, 혀를 대면 혓바닥을 종잇장처럼 찢어놓는? 김언희, <호랑말코>, 문학과지성사, 2024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김언희를 펼친다. 내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몸과 말과 목소리가 '나야, 언니' 하면서 쳐들어온다. '언희 언니'의 시는 포클레인처럼 여성 시의 영토를 갈아엎는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밀어닥치는 그 목소리에 몸을 맡긴다.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레이브 파티의 한가운데에 서듯 그렇게.
김보나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나의 모험 만화>
06 페루
(…)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2008년, 나는 시인이 되고 싶던 청년이었다.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집에 실린 이제니 시인의 '페루'를 읽고 또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는 못 쓸 것 같아서. 나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인이 된 뒤 이제니 시인을 만나, 그 시를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이야기했다. 누나도 내 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진심이었겠지? 최근 이제니 시인은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를 출간했다. 열흘째 들고 다니고 있다. 읽고 또 읽고. 다섯 번 울었다. 이제니 시인, 아니 제니 누나가 여전히 그렇게 쓰고 있어서. 문장으로 쌓은 섬. 기록하지 않은 것마저 읽게 만드는 신비의 의지. '페루'는 누나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 실려 있다. 온전히 시를 사는 이제니의 역사가 '아마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우성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07 트렁크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김언희, <트렁크>, 문학동네, 2020
시가 비단 아름답게 빚어낸 도자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작품이다. '몸뚱아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진다는 트렁크는 불미스러운 한편 그 자체로 진실된 언어를 담은 한 권의 시집 같다. 또는 한 편의 시, 한 사람의 시인 같다. 어떤 시집은 수상한 트렁크처럼 열어야 한다. 어떤 시는 비밀과 폭력을 누설해야 한다. 어떤 시인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을 명예로 삼아야 한다. 김언희 시인의 전언을 받아 들고 고민하는 작업은 언제나 즐거웠다.
신이인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08 그러나
(…)
내가 너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
너의 등을 볼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떼는 순간, 눈앞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
(…)
그러나 어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
대한 혹처럼 태양을 등지고 네가 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하며 나는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
거대한 화농이 터진 듯이 이 세상은 무섭도록 아름답다 김행숙, <1914>, 현대문학, 2018
1년 전 이맘때 우연히 <문장웹진> 기획면에서 양경언 문학평론가의 에세이를 한 편 읽었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 긴 시간의 미로를 살피는 시, 김행숙의 눈>은 다음과 같은 제사()로 시작한다.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한국일보> 진달래 기자가 취재한 세월호 참사 특별 기획 기사 부분이다. 에세이를 읽고 어깨가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간혹 '손이 두 개쯤 등에 더 돋아나서, 손과 팔의 위치를 내 맘대로 바꿔서 뭉친 어깨를 주무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뭉친 내 어깨를 풀어주는 것은 갑자기 새로 돋아난 또 다른 나의 손과 팔은 아니다. "어깨가 왜 이렇게 뭉쳤어···" 하고 가만히 뒤에서 나를 안아줄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얹어지면. 함께 시행착오를 거치며 근육을 풀어줄 수 있는 정확한 지점을 찾아갈 것이다. 이렇게 방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어렴풋하지만 아주 겸손한 마음이 앞에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해야 할까'로 바꾸었다. 등 뒤에서 날개가, 혹은 나 자신을 주물러줄 두 손이 돋아나게 할 수는 없지만, 그 지점에 가만히 함께 작은 손만큼의 온도를 얹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하며' '똑바로 걸어'가다 보면 어떤 행성을 다 돌아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홍지호
2015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 당선 대표작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
09 신생아실 노트
방치된 탄생이 관 같은 요람 위에 누워 있다. 푸줏간의 비릿한 냄새, 온갖 경험을 거쳐 늙은이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누가 저것들을 그 먼 곳까지 인도할 수 있으리. 나는 세면대 가득 물을 받아 손을 씻는다.
(…)
이것 봐, 총과 칼로써 네 몸을 무장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문제는 맨몸으로 기도문 한 구절 없이 버티는 용기와 저항의 힘이란다. 기도문이란 다만 죽은 자들을 위한 문장일 뿐이니까… 나는 알코올솜으로 정성들여 손바닥을 문지른다.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 이연주, <이연주 시선집>, 최측의농간, 2016
이연주는 파독 간호사였으며, 귀국 후 의정부 기지촌 인근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며 시를 썼다. 등단한 다음 해 여러 시편을 모아 출판사에 보냈고 스스로 생을 마쳤다. 여성의 비탄, 육체, 고통 등 저 끄트머리의 것을 이연주는 다루었고 자신을 통과시켰고 시로 남겼다. 시는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이연주의 시를 읽으면 지옥에 떨어져도 울컥거리고 뭉크러지는 것 속에서 자비로운 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시컴하늘'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더 이상 푹 꺼지지 않는 디딜 곳이 돼준다.
백가경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하이퍼큐비클>
10 20년 후에, 지(芝)에게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지난겨울,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실리며 다시 한번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순간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늦은 저녁, 버스 창밖으로 우연히 마주한 광화문 글판을 계기로 이 시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고, 동시에 그리움이 밀려왔다. 잠시 잊고 지냈지만 분명 가슴 어딘가에 박혀 있던 시였다. 어떤 맑은 날의 공기처럼, 아슬아슬한 존재의 아름다움처럼 최승자 시인의 언어는 '기억'이라는 감각 속으로 나를 푹 젖게 만들었다.
이형초
202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1 진눈깨비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슬퍼서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사람들은 박물관의 공룡들처럼 텅 빈 몸을 가진다
(…)
어떤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자신을 본다
(…)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겨울과 입 맞춘다
우리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가난과 입 맞춘다
(…)
우리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겨울의 시신을 천천히 혀로 녹여 먹었다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21
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시다. 눈이 비가 되고, 또다시 눈이 되는 동안 사람들은 '박물관의 공룡들처럼 텅 빈 몸을' 가지고, '백발이 된 자신을' 본다. 백 년 전에도 내렸고, 천 년 전에도 눈은 내렸다. 눈처럼 눈앞의 풍경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이미 사라진 풍경들이 지나간 다음에 동시대의 사람은 '겨울의 시신'인 눈을 먹는다. 아주 차갑고 소멸되는 것을 먹으며 화자도 사라질 것 같다. 사라짐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가볍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 좋다.
강우근
202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12 정든 병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계절이 바뀌는 마디마다 허수경 시인의 시 '정든 병'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시 선생님은 시인의 시를 연기하듯이 읽는 영상을 찍어오라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그때 허수경 시인의 시를 골랐습니다. 연기를 하듯이 시를 읽어보라니, 자연스레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되었습니다. 아프다며 골골대고 있을 화자이거나, 모든 것에 시큰둥한 화자처럼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조금 비뚜름하고 먹먹하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연기를 하지 않아도 때마다 시를 쓴 화자의 마음에 동감하게 됩니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게 될 때에, 그저 조금 지치고 병든 몸과 마음만 남았을 때, 내가 그 마음을 애정을 주어봅니다. 아주 열렬히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하고 애잔한 심정이 되어 병든 것들, 병들어가는 것들의 멍에를 만져보게 됩니다.
여세실
202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 부문 당선 대표작 <휴일에 하는 용서> <화살기도>
13 저녁 스며드네
(…)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대학 시절 시를 너무 쓰고 싶어서 '시창작론'이라는 수업을 무작정 들었다. 그때 교수님이 고요한 목소리로 이 시를 읽어주셨는데, 듣자마자 마음에 등불이 켜지고 곳간이 열리고 쌀과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시는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이구나. 그걸 알고 용감하게 사랑에 빠졌다. 이 시에서 사람은 울지 않는다. 그 누구도 슬프다고 고백하거나 직접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서 불판에 고기를 올리며 함께 먹는다. 잎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물방울이 동그르 맺히는 일. 대신 사랑하는 일. 대신 느끼고 안아주는 일. 시는 그런 '섬덕섬덕'한 사랑이란 걸 이 시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고명재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14 감새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
곤두박질 살아라
(…)
감꽃
노을 속에 살아라 머뭇머뭇 살아라
(…)
그림 없는
액자 속에 살아라
감새,
박용래, <먼 바다>, 창비, 1984
대학 때 시 창작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발문을 써야 했던 시집이 바로 <먼 바다>다. 짧은 시 속에 압축된 운율 그리고 비어 있는 듯 꽉 채워진 의미들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감새' 속 '곤두박질 살아라' '머뭇머뭇 살아라' '그림 없는 액자 속에 살아라'라는 문장이 대학 때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곤두박질 살라는 건 뭘까, 머뭇머뭇 살라는 건 뭘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그 문장처럼 살게 된 것 같다. 시인이 되었으니까.
봉주연
2023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 부문 당선 대표작 <두 개의 편지를 한 사람에게>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15 사이
시옷에서 이응까지 선 채로 포개었다가 아득히 눕는 이야기 보드라운 바람이 창문을 넘어오고 눈부신 커튼이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우리는 동그랗게 아야 어여 오유 우유 으이 가느다란 입술이었다가 오므린 입술이었다가 벌어진 입술로 누워 있는 사이 속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발끝에 거는 사이 까르르 속삭이고 웃어버린 이야기 (…) 말하자면 별게 다 근사하고 별걸 다 기억하는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서서히 멀어지다 아련히 돌아눕는 시옷에서 이응까지 아야 어여 오유 우유 으이 소인처럼 찍혀 있는 유진목, <연애의 책>, 문학동네, 2022
태초의 우리는 무의미한 소리를 들리는 대로 발음하며 언어를 배운다. 시옷이 들어간 글자를 모두 찾아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손에 쥔 레고 조각이 조립하는 방법에 따라 출입을 막는 울타리가 되거나 높은 곳을 오르는 사다리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하고 싶은 말과 할 수 있는 말을 구분하고, 타인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 시를 사샤 서셔 소쇼 수슈 스시 소리 내어 읽으면 커다란 창이 생기고, 별게 다 근사하고 별걸 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안과 바깥을 구분 짓는 바람이 이렇게 말한다. 사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개어진 몸을 떼어내야 해.
신원경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대표작 <축소모형>
16 하고 난 뒤의 산책
너는 거기에 가자고 한다
(…)
울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너는 뭔가 투명하고 징그러운 걸 만지고 있었다 생태 학습장 앞에서
너는 물갈퀴니
웅덩이보다 깊은 웅덩이니
(…)
자면서 하는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영원히 자게 될지도 몰라
그곳으로 가는 길가의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놓았다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사, 2015
반복해서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몸이 자라도 시간이 흘러도 순간은 퇴색되지 않고 눈을 감을수록 선명해진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뭔가 투명하고 징그러운 걸 만지고 있'는 너처럼. 장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 길어질수록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기지만 과거는 보이면서도 가닿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기에. '그곳으로 가는 길가의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놓'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이 시를 어느 날에는 계속 붙잡게 된다.
구윤재
202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17 새에게 준 시 1
뒤 숲에서 새알을 하나 주웠다
(…)
몇 날을 또 몇 날을 품어 주었다
(…)
밤새 시를 지우다가 날이 밝아 왔다
내가 남겨 둔 한 줄 끄트머리에서 노란 새가 한마리 지저귀고 있었다
(…)
하지만 내겐 그 한 줄 만으로도 족한 것 같다
어디다 발표 할 게 아니고 잘 묻어 줄 시니까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민음사, 2011
새의 지저귐. 사람의 나날이 추상적인 것들에 매일수록, 새의 한 점 소리는 더 깊은 함의를 지닐는지 모른다. 우리 외부를 일깨우니까. 새의 울음과 언어의 뭉치가 세계를 이루는 대등한 일부라면. 우리가 여전히 그로부터 무언가 기억해낼 수 있다면.
시에 나타난 '노란' 새의 부화는 어둠을 깨는 작은 빛의 생명, 햇볕, 혹은 우리 안의 우리 아닌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잘 기르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시로 적었다.
유주연
2023년 청색지 신인상 수상, 202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8 우연한 감염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내가 태어나지 않은 세상은 어땠을까, 가끔은 궁금하다. 시인은 탄생을 '우연한 감염'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의 이유 없는 외로움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외로움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만 같다. 사소한 우연과 찰나가 모여 오늘을 만들었다고 해도, 세상은 여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모든 찰나가 놀랍고 기적처럼 느껴진다.
김남주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
저 많은 협곡을 돌아 저 많은 태풍을 뚫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이 든 시인이 이 세계가 멸망의 긴 길을 나설 때 마지막 연설을 인류에게 했으면 했어
(…)
차곡차곡 접혀진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 넣는 것처럼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이 시를 읽고, 용서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냥 한번 말해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울지 말라고. 우리 삶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협곡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게, 태풍 속에서도 죽음을 향해 뜨거운 고백을 함께 나눌 이들이 있기에 고맙다.
이실비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오해와 오후의 해>
20 쓰레기통이 있는 풍경
절반은 귀신 같고
절반은 미친 거 같은
임시처소의 가족들
쓰레기의 어원은 뭘까
국립국어원도 모른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봐라)
다만 동사 쓸다에 붙은 접미사 에기래
(…)
우리 둘은 공처럼 꼭 붙어서 굴러다녔는데
(…)
나는 음식점 쓰레기통 아래
이제 에기야 김혜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난다, 2025
'절반은 귀신 같고/절반은 미친 거 같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동그란 우리가 반으로 갈라지고, 쓰레기에서 '에기'만 남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어원을 찾고, 존재의 강렬함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왜 나로서 나인가? 쓰레기통 앞에 쪼그려 앉아 나였던 반쪽을 들여다본다. 고요함만이 가득한 도서관에서 온몸이 진동하는 듯했다. 쓰고 싶어졌다.
오산하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대표작 <첨벙 다음은 파도>
Editor 김지수
Copyright © 아레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