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누가 주거 사다리를 걷어차는가

2026. 3. 7.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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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소설가
전세는 대한민국 밖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임차 형태다. 나는 학부 시절에 법학을 전공했는데, 해외(주로 독일)에서 민법을 전공한 교수들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 상당수가 전세여서 흥미로웠다. 해외 법학계의 눈에도 그만큼 전세가 흥미로운 연구 주제였던 모양이다. 전세를 보편적인 임차 계약 형태로 유지하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어서 주요 선진국처럼 월세로 일원화해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문제는 전세가 대한민국에서 임차의 한 형태를 넘어 월세에서 매매로 이어지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고, 그 대안도 현재로선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 정부, 부동산 대출과 거래 규제
공급 부족해 집값·월세 폭등 중
대통령은 주가 상승 홍보하지만
증시가 부동산보다 더 투기적

나는 사회 초년생 시절에 전세가 경제적 안정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경험했다. 당시 나는 몇 년 동안 월급을 쪼개 모은 적금으로 원룸에 전세를 얻었다. 내 생에 첫 전세살이였다. 소음이 심한 세탁기와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외에 옵션이 없는 낡은 원룸이었지만, 주거비로 나가는 고정 비용이 없으니 저축액이 크게 늘었다. 통장 잔액의 앞자리 수가 바뀔 때마다 나는 미래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돈을 모으는 재미를 느끼게 되자 일도 덩달아 재미있어졌다.

하지만 결혼 후 신혼집을 마련할 때 거액의 전세대출을 받는 대신 가진 돈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월세살이를 선택하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주거비가 확 늘어나자 그만큼 저축할 여력이 사라졌다. 혼자 살 때와 달리 돌발상황이 벌어져 모은 돈을 헐어야 하는 일도 잦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벗어나 김포 외곽에 아파트를 ‘영끌’로 매매한 뒤에야 팍팍한 일상에 겨우 숨통이 트였다. 대신 통근시간은 왕복하는데 평균 4시간으로 늘어나 퇴사 전까지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했다.

며칠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아파트 전세 시세가 안정됐다는 제목의 글을 읽다가 실소가 터졌다. 서울의 3000세대가 넘는 모 대단지 아파트에 매매 물건만 쌓여 있고 전세 물건은 단 한 건도 없는 현실을 풍자한 글이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연이어 내놓으며 대출과 거래 규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 전세를 끼고 주택을 매입하는 이른바 ‘갭투자’가 막혔다. 투기 수요를 억제해 부동산 시장을 실거주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공급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은 규제의 결과는 집값과 월세의 폭등이었다.

전세의 시대가 종말로 치닫고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정책의 방향에는 의문이 든다. 정부는 다주택자와 임대사업자를 압박해 공급을 늘리면 그만큼 전·월세 수요도 줄어든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돌아가는 시장 상황은 딴판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1월 서울 아파트 평균 월세가 사상 처음으로 150만원을 넘겼다(150만4000원)고 한다. 관리비를 최소 20만원으로 잡으면 서울에서 아파트 월세로 사는 데 매달 170만원 이상이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기본 생활비인 식비·교통비·통신비 등을 더하면 2026년 최저임금 월급(215만6880원) 수준으로는 숨만 쉬며 살아가기도 어렵다.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밀어붙이는 부동산 정책의 방향이 옳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연일 신고가를 경신했던 서울 강남권 초고가 아파트 단지를 시작으로 급매물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실수요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주택 임대차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에 따른 불가피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최근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초로 종가 기준 6000포인트를 넘겼다. 여당은 물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이를 치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실물 경제는 역성장하고 있는데 희한한 일이다. 국장 투자로 번 돈이 과연 부동산 투자로 번 돈보다 덜 투기에 가까운가. 내 눈에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투기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급격히 팽창한 증시가 부동산 시장 안정에 과연 긍정적인 영향을 줄까. 증시에 유동성이 풍부해지면 시차를 두고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된다. 이는 경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알게 되는 상식이다. 내 소박한 상식으로는 정부의 강력한 증시 부양책과 부동산 시장 규제는 모순처럼 보인다. 증시에서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는 사이에 급변하는 부동산 시장에선 실수요자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정부가 나서서 주거 사다리를 악의 없이 걷어차는 비극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정진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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