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미식 혁명; 지속 가능한 낙원의 맛

양재필 매경비즈 온라인기자(sohnsb@naver.com) 2026. 3. 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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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적인 유기농 식재료 생산과 커뮤니티 연계
지역 생태계 복원과 제로 웨이스트 주방 혁신

세계 미식 시장의 패러다임이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미식이 화려한 테크닉과 희귀한 식재료의 향연이었다면, 현대의 미식은 윤리적 가치와 친환경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해 있다. 단순히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팜 투 테이블(Farm-to-Table)’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파괴된 토양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재생 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과 지역 공동체의 식량 자립을 뜻하는 식량 주권(Food Sovereignty)이 웰빙 다이닝의 새로운 글로벌 표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 제도는 전 세계 미식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가장 치열한 다이닝 실험실로 주목받고 있다. 대륙으로부터 4,000km 떨어진 지리적 고립성은 역설적으로 하와이를 식량 안보의 최전선이자, 지속 가능한 미식 모델의 최적지로 만들었다. 소비 식량의 88%를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고대 하와이의 완벽한 순환 농법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이곳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가 제시하는 이 새로운 미식 혁명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섬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는 두 명의 요리 거장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와이 오아후 알라 와이 보트 하버(Ala Wai Boat Harbor) 근처 전경
◇ 다사다난한 하와이 식문화 연대기

하와이 식문화의 역사는 세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서기 300년경, 폴리네시아 항해자들이 카누에 타로(Kalo)와 빵나무(Ulu; 올루), 고구마(Uala) 등 약 30여 종의 카누 식물을 싣고 도착했을 때 하와이는 완벽한 순환의 땅이었다. 산 정상의 맑은 물이 평원을 적시고 바다의 어장으로 흐르는 유역 기반 시스템 아후푸아아(Ahupuaʻa)는 당시 120만 명의 인구를 외부 원조 없이 먹여 살렸다. 땅은 수탈의 대상이 아닌 왕처럼 모셔야 할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서구식 토지 제도의 도입과 플랜테이션 농업의 등장은 이 평화로운 자원 순환을 해체했다. 하와이는 식량 자급 기능을 잃고 외부 수입에 의존하는 섬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 시기 유입된 일본,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간장(쇼유), 된장(미소)과 같은 다양한 소스를 들여오며 하와이만의 독특한 로컬 푸드 정체성이 형성되는 아이러니한 풍요를 낳기도 했다.

이 혼돈을 딛고 일어선 것은 1991년 시작된 ‘하와이 리지널 퀴진(HRC)’ 운동이었다. 로이 야마구치, 피터 메리먼 등 12명의 선구적인 셰프들은 하와이 현지 농부·어부·목장주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 로컬 식재료를 요리에 적극 도입하기로 했다. “셰프가 주문하면 농가는 반드시 생산한다”는 이들의 약속은 오늘날 하와이를 세계적인 지속 가능 미식의 성지로 탈바꿈시키는 결정적 발판이 되었으며, 현재 그 바통은 다음 세대 요리 거장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소토 콘토스(Soto Kontos) 총주방장
◇ 화산토 위에 심은 셰프 정원과 양봉

하와이 아일랜드(별칭:빅 아일랜드) 코할라 해안에 위치한 웨스틴 하푸나 비치 리조트(The Westin Hapuna Beach Resort)의 메리디아(Meridia) 레스토랑. 이 곳의 맛을 책임지고 있는 소토 콘토스(Soto Kontos) 총주방장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와 터키 혈통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요리계의 아이콘이다. 노부 마쓰히사, 알베르 루와 같은 거장들과 함께하며 실력을 연마한 그는 자신의 요리 철학이 영화 300으로 유명한 지역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 근처 증조부모의 농장에서 보낸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그 농장엔 200마리의 닭과 100마리의 염소, 150종이 넘는 작물이 있었다. 어느 날 냉장고를 열었는데 슈퍼마켓 라벨이 붙은 통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증조할머니가 치즈부터 소스까지 모든 걸 직접 만드셨기때문이다”

소토 셰프는 이 라벨 없는 냉장고의 기억을 하와이 화산토 위에서 구현했다. 그는 하와이 연안의 스내퍼(Snapper) 어종인 우쿠(Uku)에서 에게해 생선의 질감을 발견했다. 그는 “질감과 섬세한 풍미가 지중해 생선과 똑같았다. 이 생선으로 요리할 때 태평양과 지중해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감자로 만들던 그리스식 뇨끼를 하와이의 빵나무 열매로 대체해 요리를 만들고 있다.

셰프 정원 내 양봉 시설
소토 셰프의 주방 바로 옆에는 그가 ‘나의 보물’이라 부르는 ‘셰프 가든(Chef’s Garden)’이 자리 잡고 있다. 정원에는 바질, 로즈마리, 레몬그라스, 라벤더와 같은 허브들이 하와이 화산토의 기운을 머금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요리에 강렬한 느낌을 더해주는 신선한 하와이안 칠리(고추)들도 줄지어 매달려 있다.

특히 정원 한편에서 키워지고 있는 양봉 시스템은 메리디아의 상징과도 같다. 이렇게 직접 레스토랑에서 양봉을 운영하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소토 셰프는 이곳에서 채취한 유기농 꿀을 캄파치 크루도의 마리네이드나 시그니처 칵테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가 벌을 치는 진짜 이유는 수확물 때문이 아니다.

“벌이 사라지면 이 섬의 모든 생태계와 야생화가 사라진다. 벌은 수분(Pollination; 꽃가루가 옮겨지는 과정)을 통해 이 땅의 생명 순환을 지탱하는 중추이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단순히 재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섬의 생태적 고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 빌딩 숲에서 실현하는 ‘제로 푸드 마일’

오아후의 심장부 와이키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프린스 와이키키 호텔(Prince Waikiki Hotel)의 브룩 타데나(Brooke Tadena) 총주방장은 16세에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준도미너스(Joondominus) 같은 전설적인 파인다이닝을 거쳐온 하와이 미식의 산증인이다. 그는 대규모 리조트와 컨벤션 센터를 운영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제 도심 호텔에서 지속 가능성이라는 난제를 ‘루프탑 가든’으로 돌파하고 있다.

“와이키키 같은 도심 호텔에서 식재료 자급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옥상에서 직접 키운 유기농 채소와 식용 꽃은 엘리베이터 단 한 번의 이동으로 주방에 도착한다. 탄소 발자국이 사실상 ‘제로’인 셈이다.”

브룩 셰프의 주방에는 대량 조리 관행이 없다. 이 호텔의 대표 레스토랑인 원헌드레드 세일즈(100 Sails) 레스토랑은 뷔페 형식이지만, 그는 5~6인분씩 자주 조리하는 소규모 배치(Small Batch) 방식을 고집한다. 이는 고객에게 갓 만든 음식의 온도와 질감을 제공함과 동시에 음식물 쓰레기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이 레스토랑만의 비결이다. 남은 고품질 식재료는 지역 푸드뱅크 ‘알로하 하베스트(Aloha Harvest)’에 기부하거나 지역 양돈 농가의 사료로 보낸다.

특히 일본계 어머니를 둔 그는 아시아 식문화에도 애정이 많다. 그는 “최근 미국 주류 사회에서 고추장(K-Gochujang)이나 갈비 양념 같은 한국적 풍미가 건강한 미식의 새로운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섬에서 잡은 신선한 해산물에 한국의 발효 문화를 접목한 웰빙 다이닝을 연구하고 있다는 그의 관심과 열정이 하와이의 새로운 미식 문화 창조에 기여하고 있다.

브룩 타데나(Brooke Tadena) 총주방장
원헌드레드 세일즈 레스토랑(100 Sails Restaurant) 뷔페
◇ 하와이 미식의 새로운 문법: 자급-순환-공동체

소토 콘토스 셰프의 ‘셰프 정원’과 브룩 타데나 셰프의 ‘자원 순환’은 단순한 메뉴 구성을 넘어 하와이 미식 체계의 구조적 전환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개별 요리사의 창의성을 넘어 지리적 고립성을 지닌 도서 지역이 기후 위기와 공급망 불안정성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생태적 생존 전략으로 기능하고 있다.

통계적 관점에서 하와이의 식량자급률을 단 10%포인트 향상시키는 것만으로도 연간 약 3억 1,300만 달러(약 4,600억원)의 역내 경제 효과가 발생하며, 약 2,300여 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미식 활동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강력한 사회경제적 파급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셰프들이 주도하는 하와이의 고대 ‘아후푸아아’ 모델의 현대적 복원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탄소 배출 저감과 하와이 섬의 자본 순환을 극대화하는 가장 현실적인 경제 모델인 셈이다.

하와이의 지속 가능한 미식은 도서 지역의 한계를 혁신적 기회로 전환한 글로벌 벤치마킹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자연, 주방, 그리고 지역 공동체(커뮤니티)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들의 실천은 미식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태평양의 고립된 낙원에서 시작된 이 주방의 혁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중이며, 글로벌 식량 안보와 미래 미식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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