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7) 근대회화 태동지서 꽃핀 대구학생 미술운동의 저력
문화예술의 도시 대구는 다방면의 예술적 저력을 지녔다. 특히 대구는 우리나라 근·현대회화의 태동지이다. 대구의 근대미술이 곧 우리나라 근대미술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국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는 「50~60년대 대구의 학생 미술운동」(대구학 제4집)을 총정리하면서 대구를 우리나라 근현대회화의 태동지로 규정했다.

"학교만 마치면 모여서 고흐와 세잔 피카소를 얘기하고, 같이 야외스케치 나가고, 그림 그리고 신기해요. 지금 학생들은 꿈도 못 꿉니다."는 김 교수는 1955년에 발족된 고교미술동아리 연합 '대구학생화우회'를 시작으로 '미우회'(1958), '미구회'(1960), '젊은ART회'(1960) 등이 대구 학생 미술운동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대구의 학생 미술운동은 20세기 중반, 부산 대전보다 더 앞서 일어난 학생 미술운동이었으나 대구미술사에서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구학생화우회(지도고문 서동진, 회장 장진필, 이하 존칭 생략)는 1955년에 발족된 우리나라 근대기에 제일 먼저 일어난 학생미술연합이며 학생 미술운동이다. 1956년에 연 창립전(미국 공보원 USIS 화랑)에 장진필(대건고) 회장을 비롯, 김기한(대구공고) 부회장, 이락호(원화여고), 정복순(신명여고) 등 11명이 출품했다. 2회전에는 김영태(대건고, 도예), 권수현(영남고), 박인숙(신명여고) 등이 추가 입회하여 수채화 작품 27점을 전시하였다.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띤 미우회(회장 김응곤 대구공고)는 1958년에 창립전을 가졌다. 김용진(대구여중 교사) 신석필(대구서중 교사) 등 교직자가 고문을, 김 회장 외 문곤(능인고), 박현기(대구공고), 강위덕(성광고) 등 20여명이 창립전을 가졌다. 미우회는 창립전 이후 3~4개월 마다 전시회를 열며 이승만 하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내각 수립 등 정치적 혼란기를 작품전으로 이겨나갔다. 1960년에 2.28민주화운동과 4.19의거의 와중에도 미구회와 젊은ART회 두 그룹이 발족되었다.

미구회 창립회장은 민태일(대건고), 창립회원은 이두호(영남고), 박학배(계성고) 등인데, 대구시내에 아뜨리에를 마련하고 방과후에 모여서 미술활동을 했다. 2회전에 박무웅(영남고), 백경원(대건고) 등 5명이 신입으로 추가 참여했다. 이들은 각종 미술실기대회와 공모전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8회전에는 이일환·김영태(건축)·남충모 등 명예회원의 찬조출품과 금웅명(경북고) 오경섭(대륜고), 강정희(제일여상), 장경선(경북여고) 등 27명이 출품했다. 미구회는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70여명의 고교 미술부 재학생이 대를 이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대학에 진학한 미구회원을 중심으로 해서 미우회(1958년 미우회와 동명)를 창립하고 회장에 김영태(건축), 회원은 김우식·박비오·백순자 등이며 고문 배명학과 소헌 김만호 선생이 찬조출품하며 짧은 활동을 했다.
◆젊은ART회(1960~1965)
1960년에 문곤, 박찬호(대구농고), 한경아(효성여고) 등이 창립을 하여 대구시 삼덕동에 아뜨리에를 두고 모임을 가졌다. 이어서 박현(대구농고) 정병국(계성고), 이향미(경북여고), 변종곤(대건고), 박판돌(대구상고) 김춘옥(원화여고) 등이 추가로 참여하여 주로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왕성한 작품전을 펼쳤다.
"대도시 부산보다 대구가 더 먼저 학생미술 그룹 활동을 하면서 미술은 확실히 앞서갔다"는 김기한 계명대 명예교수는 "우리 학교만 해도 미술 교사가 없었지만 학생들끼리 모여서 작품 활동한게 미술 활동의 모체가 됐다"고 밝힌다. 당시 야외스케치는 주로 수성못, 교동시장, 동산동 장택상 99간 집, 동촌 등에서 했다고 들려준다.
◆지홍원 전 대구고법원장, 현 변호사·성운대 재단이사장 인터뷰
"가족 대부분이 의사인데 너는 미술대학 못간다, 법대로 가라고 한 거지. 당시만 해도 법이 뭐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변호사 하면 내 마음대로 그림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법대로 진학했지" 지홍원 전 대구고법원장의 실력에 대해서 대구 미술계 원로들은 한결같이 '원 탑'이라고 말한다.
"그림도 일정한 수준을 이뤄야 혼자 끌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전시회에 심사위원 오면은 내 작품을 들고가서 보여드리고 평도 듣고 하느라 안 찾아간 선생님이 없어"라는 지 전 고법원장은 "(아버지가 하던) 병원 2층을 아트리에로 만들어서 먹고 자고 하는 시간외에는 그림을 정말 열심히 그렸어요. 오히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는 고시돼야지 싶어서…"라고 돌이킨다.
"중고교 시절, 입시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캔버스 들고 돌아다녔다"는 지 변호사는 "학생 양성하는 거 좋아하던, 이인성도 키워준 서동진씨가 내게는 어디에 이인성 그림이 있으니 작품 보고 공부하라고 했다"고 들려준다.
"고교시절 밤새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가서 작품 출품하기도 했고, 김종필 씨 살아계실 때 명사 초대전도 같이 몇 번 했다"면서 "대구(고법원장) 오고 나서 친구들 만나고 하느라고 오히려 못 그렸고, 광주고법원장 때는 객지니까 시간이 많아서 주말마다 작품을 그렸다"고 했다.
"법조인의 길을 가면서도 그림은 본질적으로 나와 함께 였다"는 지 변호사는 다들 고생했지만 고교 미술운동을 하던 50년, 60년대가 인간적이고 따뜻했다고 돌이킨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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