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에 7만 명 목숨 걸고... 맥아더, 사상 최대 도박을 시작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中: 인천, 그리고 서울 ①
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3월 출고되는 두 번째 파트(중편)는 맥아더 최대의 성과 인천상륙작전을 다룹니다. △상륙 배경과 준비 단계 △상륙 실행 및 여파로 나눠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4490000739)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5490003090)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6390001288)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20217340004485)
“자네,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겐가?”
매캐한 포연 속 최전방에 최고사령관이 나타났다. 이곳은 영등포 동양맥주 공장 옆 야트막한 언덕. 여의도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북한군의 120㎜ 박격포탄이 수시로 내리 꽂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오르던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참호 속 한국군 일등중사(하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맥아더가 보기에 일등중사 운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맥아더는 저 일등중사의 목숨, 더 나아가 한국군 전체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 건너 서울 북쪽은 이미 전날 북한군 손에 떨어졌고, 폭격과 포격 여파로 도시 이곳저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개전 직전 10만 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단 나흘 만에 2만5,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한 파죽지세 북한군은 한강 남안으로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홍일 소장이 이끄는 시흥전투사령부가 부랴부랴 낙오병을 재편성해 남안에 진을 쳤지만, 이렇게 얇은 방어선으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여기가 한국군 최전방인 동시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김홍일 부대마저 뚫리면 한국은 끝이었다.
걱정스럽게, 그리고 한국군의 임전 태세가 어느 정도일지를 가늠해 보고자, 맥아더는 일등중사에게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돌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시 맥아더의 통역을 담당했던 김종갑 대령(당시 시흥사령부 참모장·이후 중장 예편)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의 질문을 받은 일등중사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르는 법입니다. 상관의 철수 명령이 있던가, 아니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겁니다.”
①영등포 6월 29일: ‘통찰’의 힘
답을 들은 맥아더는 일등중사 어깨를 두드리며 통역관 김종갑을 통해 약속했다. “그에게 말해 주게. 내가 곧 도쿄로 돌아가 지원 병력을 보낼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고.” 맥아더는 진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일등중사도 틀림없이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이날은 1950년 6월 29일, 6·25 전쟁 다섯 번째 날이다. 당시 동양맥주 공장은 영등포역 바로 옆에 있었는데, 지금 영등포공원 자리다. 이곳엔 시흥전투사령부 산하 수도사단 8연대 3대대가 참호를 파고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 기록을 보면 이날 맥아더는 맥주 공장 옆 언덕에 올라 약 20분(맥아더 회고록엔 1시간) 동안 강 건너편을 유심히 바라봤다고 한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 ‘회상(reminiscence)’에서 “한강에서 본 한국군은 이미 방어 능력이 소진된 상태였다”며 “서울에서 시작해 한반도 끝 부산까지, 공산군의 전차를 막아설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맥아더의 이 전선 시찰은 6·25 전쟁 초반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이미 1949년 철수했고, 한국군 자문을 위해 479명(장교 176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군을 막을 미군 전투 병력은 한반도에 없었고, 가장 가까운 일본에 맥아더 휘하 4개 사단이 있었다. 맥아더가 일등중사에게 약속한 이 ‘지원 병력’은 주일미군(미8군)을 말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한국군이 직접 싸우는 것을 봐야만 미 지상군 투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례적으로 최전방을 방문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이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과연 미국 해공군으로만 충분할 것인가? 미군 지원을 받는 한국군이 북으로부터 밀려오는 전쟁 기계에 맞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군 지상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인가? 이걸 판단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가서 보는 것이었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맥아더의 한강 방문은 미국 정부가 기존 방침을 뒤집고 한반도에 지상군을 전쟁 초기부터 신속하게 파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맥아더는 서울에서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한국군 방어 능력이 사라져 미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전문을 본국에 타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해·공군만으로 한국을 지원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맥아더 보고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6월 30일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포병·방공포·공병 등 소규모 부대) 투입을 곧바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쟁 7일째 7월 1일 미군 선견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나중에 노획된 문서 등에 따르면 전쟁 직전 북한과 소련은 미군 전투병력 증원까지 최소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군 투입 전에 이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적시에 최전선을 방문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미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북한의 속전속결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군은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해 경무장한 군대일 뿐, 기갑이나 공군 공격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국군은 반격할 능력이 전혀 없다. 적이 계속 전진해 온다면 이 공화국은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빠질 것이다.”
(1950년 6월 29일 한강 시찰 후 맥아더가 기자에게 한 말)

맥아더는 극도로 오만한 인간이었고 뼛속까지 정치군인이었으나, 군사적 천재성과 감각만큼은 ‘역대급’이라고 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 천재성은 20분 짧은 시찰 동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6월 29일 한강 남쪽에서 서울 시내 쪽을 바라보던 동안, 맥아더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번뜩 스쳐갔다. 한국군이 한강 남안에서 버티는 동안 미군 2개 사단을 신속하게 증원해 서울 남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펼쳐 전선을 고착한 다음, 상륙작전 훈련을 받은 미군 1개 사단(1기병사단)으로 서해안을 우회 상륙해 북한군 배후를 치는 반격이었다. 맥아더가 그때 이미 ‘인천’을 염두에 뒀는지, 아니면 ‘서울 근처’를 상륙지로 고려했는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두 달 반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현실화되는 대규모 반격 작전의 원형을 전쟁 5일 차에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맥아더가 돋보였던 점은 남들보다 훨씬 멀리까지 내다보는 통찰력이다. 모두들 ‘어떻게 이걸 막을까’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하던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 혼자서만 몇 수 앞을 예측하고 언젠가 미래에 있을 ‘반격 작전’을 떠올린 것이다. 기약 없는 후퇴의 순간 난데없이 승리를 상상한 맥아더 특유의 낙관주의가 빛을 발했다.
맥아더에게 상륙작전은 매우 친숙한 역공법이다. 그가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 바로 이 상륙작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호주→뉴기니→필리핀 축선의 모든 섬을 점령하는 대신, 방어가 잘 된 섬을 피하고 준비 태세가 비교적 허술한 섬에 상륙하는 개구리 뛰기(leap frogging·섬 건너뛰기라고도 한다) 작전을 쓰며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 적의 배후를 단숨에 쳐 보급선을 끊은 뒤, 사기가 떨어지고 장비·물자가 부실한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게 맥아더의 장기였다. 대양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작전 개념을 대륙인 한반도에서 응용해 보려 했던 것이다.
머리를 스친 맥아더의 ‘한강 구상’은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가 상륙작전에 진심이었다는 점은 그의 이후 행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쿄로 돌아온 다음 맥아더는 참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 검토를 지시했고, 7월 2일 맥아더 사령부는 ‘블루하트(Blueheart)’라는 작전명으로 한반도 상륙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7월 22일 상륙작전 실행을 목표로 7월 4일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블루하트 작전을 그대로 끌고 가기엔 전황이 너무 빠르게 나빠졌다. 처음으로 투입된 미 지상군 부대인 24사단은 오산, 금강(지금의 세종), 대전에서 차례로 무너졌고, 미군과 한국군은 끝내 소백산맥 동쪽으로 밀려났다. 상륙은커녕, 뚫린 방어선을 메우기에도 병력이 모자랐다. 전선 고착 부대 중 하나였던 미24사단은 사단장(윌리엄 딘 소장)까지 포로로 잡히며 와해됐고, 상륙부대로 지정됐던 미1기병사단은 낙동강 방어에 투입됐다. 상륙을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라 블루하트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인천 상륙 후 서울 타격’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인천 장악은 서울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다. 낙동강에 몰린 북한군의 후방을 끊고, 병력 강화와 재보급을 막을 수 있다. 그때 월튼 워커의 8군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된다. 인천 상륙 구상은 그 단순함, 우아함, 명료함에서 숨이 막힐 듯 훌륭했다.”
(미국 전쟁사학자 스티븐 타페)
②도쿄 8월 23일: ‘웅변’의 가치
알고 보니 맥아더는 블루하트보다 훨씬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1950년 8월로 접어들며 낙동강 방어선에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야 했지만,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참모들에게 구체적 계획 수립을 독려했다. 새로운 상륙작전에 ‘크로마이트’(크롬철광)라는 이름을 붙이고, 오히려 상륙군 규모를 ‘사단급’에서 ‘군단급’(2개 사단 이상)으로 확대했다. 1기병사단 대신 상륙 전문 부대인 미해병대 1개 사단을 넣고, 후속 부대로 미육군 1개 사단을 상륙시키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상륙 후보지는 서해안에선 인천 군산 진남포(북한 남포시), 동해안에선 주문진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상호에 따르면, 크로마이트 작전은 총 네 개의 시나리오로 구성돼 있었다. 100-A 계획은 군산에 상륙하는 작전이다. 미 상륙군단이 군산을 점령한 후 대전까지 동진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워커의 8군이 대구에서 출발해 추풍령을 넘어 대전에서 상륙군과 합류한다. 그러면 북한군을 한반도 남쪽에서 포위하고 격멸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음 100-B 계획은 실제 역사로 구현된 인천 상륙이다. 미군 2개 사단이 인천으로 들어가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의 북한군 증원을 막는 사이(모루 역할), 망치 역할을 맡은 워커의 8군이 모루에 고착된 북한군을 내려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100-C 계획은 인천 상륙 후 필요시 군산에 추가 상륙을 하는 것, 100-D 계획은 인천과 주문진을 통해 동서해안으로 동시 상륙을 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100-C와 100-D는 인천 상륙의 보조 작전에 불과한 셈이어서, 결국 상륙 후보지는 인천 아니면 군산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당시 8군사령관 워커,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가 군산을 밀고 있었다.

“상륙작전에서 피해야 할 환경을 모두 모아 리스트를 만든다면, 그게 바로 인천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당시 상륙 계획에 참여한 어느 해군 장교의 촌평)
맥아더가 인천으로 가려면 ‘전문가의 벽’부터 넘어야 했다. 2차 대전 내내 이골이 나도록 상륙작전을 반복했던 해군·해병대 장교들이 볼 때, 인천은 절대로 상륙작전만은 피해야 할 최악의 후보지였다. 인천항은 ①지형상 좁은 수로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해 이 수로가 포격 사정권에 들어오거나 기뢰로 방해받으면 제아무리 최강 미해군이라도 손쉽게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다. ②또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공격군 입장에선 하루 2회 밀물이 들어왔을 때만 상륙이 가능하고 ③방어군 입장에선 인천항을 가로막은 천연 성벽 월미도(당시는 완전한 섬이었음)에서 철벽 방어를 할 수 있었다. ④또한 당시 인천 해안에는 높이 4m가 넘는 콘트리크 구조물(안벽)이 길게 깔려 있어 상륙정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⑤해안 바로 옆 인구 25만 명의 도심지가 이어지기 때문에 상륙 직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러야 했다. ⑥게다가 어렵게 인천을 차지하더라도 최종 목표인 서울을 점령하려면 한강에서 다시 한번 상륙작전과 유사한 도하작전을 해야 했다. ⑦마지막으로 9월 중순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태풍이 빈발하는 시기여서, 대규모 함대가 일본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상륙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 전문가들의 반대 말고도 합동참모본부(당시 구성원은 합참의장+3군참모총장)의 회의적 시각도 함께 극복해야 했다. 우선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부터가 상륙작전 회의론자였다. 브래들리는 6·25 전쟁 발발 8개월 전인 1949년 10월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2차 대전 때와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은 앞으로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압도적 핵무기와 가공할 공군력을 보유한 이상, 인명 피해가 큰 상륙작전을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전략폭격을 통한 공군 만능주의를 추구하던 공군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은 상륙 자체엔 동의했지만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육군 위주)가 주도하는 작전에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맥아더의 직속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인천 대신 군산에 상륙해야 병력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정책 결정자와 해군의 상륙작전 실무자가 모두 ‘인천’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맥아더는 처음부터 인천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인천은 여러 가지 지형적 단점을 안고 있었지만, 일단 상륙에 성공하기만 하면 곧바로 서울을 노릴 수 있는 서해안 최고 요충지였다. 당시 북한은 서울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 두고 있었고, 전쟁 중엔 낙동강 전선 공략을 위한 병력 집결지 및 장비 보급처로 서울을 활용하고 있었다. 서울을 단시간 안에 수복할 수 있다면, 유엔군은 북한에 정치적·심리적 타격과 군사적 손실을 동시에 가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했지만, 맥아더는 큰 승리를 위해선 하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국가적 자존심, 막대한 전비, 수만 명 유엔군 장병의 목숨을 담보로 내건 지상 최대의 도박이었다. 그 도박판으로 가려면 워싱턴의 상관들과 도쿄의 부하들을 동시에 설득해야 했다. “인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반대 의견을 단숨에 반전시키기 위해, 맥아더는 화려한 뒤집기 쇼를 준비했다. 1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위치한 도쿄 중심가 다이이치(第一) 빌딩이 맥아더의 무대였다. 1950년 8월 23일이다.
“당시 우리는 맥아더가 부산 교두보를 지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지금 당장 부산이 위험한데, 상륙에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 게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천 상륙은 너무나도 위험한 기동이어서, 실패했을 때 한 나라의 재앙을 넘어 국제적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시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회고록 중에서)

미 합참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맥아더가 “9월 중순 인천에 군단급 병력을 상륙하겠다”고 계속 고집했지만, 합참이 볼 땐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박임에 분명했다. 그렇다고 당시 미군 내 최고 전쟁영웅의 요구를 명령서 한 장으로 물리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육해공 지휘부를 현지에 보내 맥아더 얘기를 직접 듣고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해군참모총장 셔먼, 공군참모부장 이드월 에드워즈 중장 등 11개의 별이 워싱턴에서 도쿄로 날아갔다. 태평양사령관 아서 래드포드 제독(대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중장), 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제독(중장),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 8군사령관 워커 중장, 상륙전 전문가 제임스 도일 제독(소장) 등도 도쿄에 모였다. 2차 대전 이후 이렇게나 많은 별이 한 회의실에 모인 적은 없었다.
회의는 8월 23일 오후 5시 30분 시작됐다. 8명의 해군 장교가 각 분야에서 8분씩 브리핑을 이어갔다. 작전 개요, 상륙 환경, 피아 전력 비교, 위험 요소, 작전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 등을 상세히 평가했다. 역시나 인천에 대해선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특히 해군의 반대가 심했다. 썰물 때 뻘밭이 3㎞ 이상 펼쳐져 함정이 고립될 수 있는 바닷가, 상륙지 바로 옆에 시가지가 위치해 어디서 어떤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해안에 함대를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제독은 없었다. 해군은 조차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포승면(평택)을 대체지로 꼽았다.
발언을 이어간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의 선택은 여전히 ‘군산’이었다. 2차 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양쪽 전선에서 맹활약했던 명장 콜린스도 상륙작전엔 일가견이 있었다. 6년 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선봉 7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콜린스는 인천이 상륙 지점으론 낙동강 방어선에서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8군, 인천에 내린 상륙군단이 경기나 충청 어딘가에서 만나기 전에 북한군이 포위망을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군산에 상륙하면 워커 8군과 상륙군단 사이 거리를 좁힐 수 있어, 모루(상륙군단)에 망치(8군)로 후려치는 시점을 훨씬 앞당길 수 있다. 서울 수복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인천 상륙보다 더 신속하게 북한군 잔당을 섬멸할 수 있는 상륙지가 바로 군산이었다. 당시 워커를 수행한 전용기 조종사 마이크 린치 대위의 회고에 따르면, 콜린스는 이 회의 직전 한국 전선을 시찰했을 때 워커와 상륙 후보지를 논의하면서 ‘군산이 가장 적합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를 본 상태였다.

“군산 상륙은 위험이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가치도 적다. 거기를 때려봐야 적의 보급선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육해공군 지휘부에 인천 상륙을 역설하는 맥아더)
맥아더는 해군 장교들과 콜린스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맥아더의 발언만 남겨두고 있었다. 모두가 맥아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맥아더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느긋하게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을 좀 더 즐겼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판단한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전설적 전쟁 영웅의 아우라를 방패 삼아, 맥아더의 ‘쇼타임’이 시작됐다.
그는 인천 상륙을 걱정하는 워싱턴과 해군의 지적은 이해가 가지만, 가장 효과적인 상륙 목표가 인천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군산이나 포승면에 상륙해선 북한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자신은 해군이 이번에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작전 성공을 확신한다면서, 가장 반대가 심했던 해군 제독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원맨쇼는 45분 동안 이어졌고, 처음에 나직하고 온화하던 맥아더의 목소리는 결론을 향해 갈수록 점점 웅변조로 커지고 있었다.
“서울을 장악함으로써 나는 적의 보급 체계를 완전히 마비시키려고 하오. 작전 당일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상륙작전을 현지에서 중단시키겠소이다. 그러면 잃게 되는 것은 내 평판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천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 인천은 성공할 것이고, 이 작전은 10만 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외다.” 맥아더의 발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발언이 시작될 때처럼, 말이 끝나고서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맥아더의 역전승으로 끝난 게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장교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다”며 “역사에 남을 일을 직접 목격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워커의 파일럿 린치 대위는 “워커 장군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맥아더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혼자서 인천을 고집하던 맥아더가 결국 인천을 관철시킨 뒤집기 한판승이었다. 합참이 크로마이트 작전을 최종 승인한 것은 9월 8일이었지만, 이날 맥아더의 원맨쇼 이후 인천 이외 상륙지를 언급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결국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하기로 했다.

※인천 상륙, 서울 탈환, 상륙작전 후 상황을 다루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3월 9일 출고 예정입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맥아더 자서전>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맥아더 전기>
-리처드 프랭크 ‘맥아더’
-마이클 샬러 ‘더글러스 맥아더’
-윌리엄 맨체스터 ‘맥아더 1·2’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Carol Petillo ‘Douglas MacArthur, the Philippine years’
-Clayton James ‘The Years of MacArthur’
-H.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Mark Perry ‘The Most Dangerous Man In America’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당시 미 합동참모본부 구성원들의 회고>
-매슈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J. Lawton Collins ‘Lightning Joe’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Omar Bradley and Clay Blair ‘A General’s Life’
<상륙작전 과정>
-고든 L. 리트먼 ‘인천 195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Gerry Van Tonder ‘Inchon Landing’
<한국전쟁 관련 서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남시욱 ‘6·25 전쟁과 미국’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T. R. 페렌바크 ‘이런 전쟁’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f the Korea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Max Hastings ‘The Korean War’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논문>
-김광수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김대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요인에 대한 군사전략적 분석’
-박동찬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의 한국전쟁 인식과 대응’
-서치종 ‘인천상륙작전의 계획수립과정과 4가지 작전계획’
-유영옥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평가’
-이상호 ‘인천상륙작전 초기 구상과 좌절’
-이상호 ‘인천상륙의 크로마이트 작전 4가지 계획과 그 함의’
-조상근 ‘한국전쟁에서 중공 지도부의 인천상륙작전 예측과정’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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