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박정민이어야 했던 영화…서랍 속 묵혀둔 시나리오 꺼냈죠”

정시우 객원기자 2026. 2. 2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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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 류승완 감독

- ‘베를린’ 준비하며 취재한 소재
- 두 배우와 ‘밀수’서 함께 작업
- 상반된 매력에 반해 주연 낙점

- ‘박정민 멜로’는 예상 밖 화제
- 조인성 작품 아우르는 힘 가져
- ‘감정’ 담보한 액션 연출 방점
- 오랜만에 관객 북적… 감사하죠

“블라디보스토크 원-웨이!“(Vladivostok One-way)”

영화 ‘베를린’(2013)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블라디보스토크행 편도 티켓을 끊는 ‘베를린’ 표종성(하정우)의 마지막 대사이자, 영화 라스트 신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열린 결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베를린’ 속편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실제로 그사이 속편 제작이 급물살을 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란, ‘크랭크인’이 되기 전까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속편 계획이 흐지부지돼 보이던 찰나, 류승완 감독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휴민트’다.

▮‘베를린’과 연결된 ‘휴민트’

영화 ‘휴민트’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이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영화 ‘베를린’을 준비할 때 취재한 자료에서 ‘휴민트’가 비롯됐다고 소개했다. NEW 제공


명시적 속편은 아니지만 ‘휴민트’는 ‘베를린’의 자장 안에서 읽히는 부분이 많다. 류승완 감독은 영화 중간에 표종성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베를린’ 속편을 만들어 달라 요청하는 관객의 바람을 영리하게 사용했다. ‘휴민트’ 소재인 ‘북한 여성 인신매매’ 역시 ‘베를린’을 준비할 때 취재한 자료에서 비롯됐다.

이를 바탕으로 일찍이 초고를 써뒀지만, 바로 영화화하진 못했다. 취재하면서 느낀 분노가 필터 없이 담길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때 그 마음으로 찍으면 진짜 생으로(적나라하게) 갔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게 류승완 감독의 설명이다.

류승완 감독으로 하여금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들게 한 건, ‘밀수’에서 함께 작업한 조인성과 박정민이다.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가진 두 배우를 전면에 내세워서 만들어보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하다가, 이 대본이 생각났다”고 밝힌 류승완은 “배우를 먼저 상정해 두고 영화를 찍은 건 ‘베테랑’ 이후 두 번째(그의 친동생인 류승범과의 작업을 제외)”라고 강조했다. 배우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초고가 지녔던 톤과 내용이 모두 바뀌었다. 그 결과, ‘휴민트’는 첩보 대결보다는, 남한 국가정보원 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 그리고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 세 사람의 관계성과 감정에 집중하는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밀도가 높아진 건 멜로다. 그런데 멜로가 이렇게까지 이슈가 되리라고는 류승완 감독도 몰랐던 모양이다. “나도 그렇고 박정민도 그렇고, 멜로 부분이 이렇게 부각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인물들 간 감정선이 각본에 있긴 했지만, 박정민 멜로를 기대하게 분위기는 불과 얼마 전 발생한 일종의 ‘사고’ 때문 아닌가”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가 ‘사고’라고 언급한 건, 청룡영화상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박정민과 화사의 ‘굿 굿바이’ 축하 무대다.

멜로가 부각된 이유로 류승완 감독이 분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영화 안팎에서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한 조인성이다. “박건-채선화 둘만의 관계로 갔다면 (멜로를) 그렇게 세게 느끼지 않았을텐데, 그들을 지켜보는 조 과장이 있었기에 뉘앙스가 더 커진 것 같다”고 말문을 연 류승완은 조인성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조인성이 촬영 들어가기 전에 드라마 ‘모래시계’를 다시 봤다. 보통 배우가 ‘모래시계’를 보고 나면 최민수 선배님이 했던 롤에 대한 욕망이 확 올라오기 마련인데, 조인성은 박상원 선배가 연기했던 롤이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하더라. 그 말에 깜짝 놀랐다”며 “이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 배우가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과 힘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서 앞으로의 조인성이 더욱 궁금해졌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류승완 감독은 이날 조인성에 대해 ‘등대’ ‘키다리 아저씨’ ‘(쉬어갈 수 있는) 그늘’ ‘(기댈 수 있는) 형’ 등의 수식어를 붙였는데, ‘배우 조인성’뿐만 아니라 ‘사람 조인성’에 깊이 매료된 듯 보였다.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지닌 스펙트럼 역시 빼놓으면 섭섭하다. 박정민은 ‘헤어질 결심’에서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는 대사로 멜로드라마적 면모를 보인 바 있다. 류승완 감독은 해당 신을 언급하며 “박정민 출연 신이 얼마 안 되는데도, 두 남녀의 관계가 어떤지를 우리가 다 알게 되지 않나. 배우가 지닌 그 힘을 끌어오고 싶었고, 다 찍고 나서 ‘박정민 배우가 진짜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멜로 뉘앙스가 강하다고는 하나, ‘휴민트’는 충무로 ‘액션 키드’에서 ‘액션 거장’으로 거듭난 류승완의 액션 맷집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다. 이제껏 그래왔듯, 류승완 감독 액션의 중추는 ‘감정’이다. 액션이 인물의 ‘마음’을 대신하기에, 관객은 배우들의 통증이 스크린 너머 자신에게 전이되는 현상을 겪는다.

류승완은 이에 긍정했다. “액션은 결국 상황과 감정에서 출발한다. 인물의 선택이 쌓였을 때 비로소 폭발하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며 “아무리 화려한 퍼포먼스라도 인물의 관계가 쌓이지 않으면 그저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가령 작은 접촉 사고라도 내가 아는 사람이 연관됐으면 크게 보이지만, 차가 크게 뒤집히는 사고가 나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면 ‘아이고’하고 지나가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액션 지론이다.

조인성과 박정민의 액션 연기가 출중해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란다. “극 중 (악당) 알렉세이로 나오는 로버트 마세는 넷플릭스 ‘발레리나’에도 출연한 배우다. 나도 몸 쓰는 사람들을 꽤 봐 온 사람인데, 이 배우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몸을 쓴다. 우리 스턴트 팀들이 그의 몸놀림을 못 따라가서 스턴트 더블을 못 했을 정도로 잘 한다. 당연히 실력으로 따지면 조인성과 박정민이 크게 밀리지. 그런데 왜 그게 가능해 보이나! 그거야말로 감정이다. 그 상황 안에서 뿜어내는 두 배우의 감정이 이 모든 걸 말이 되게끔 보이게 하는 것이다.”

다만 류승완 감독은 ‘유리 박스에 갇힌 여성들’을 대상화한 일부 액션신을 향한 비판에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폭력적 묘사를 배제하고 카메라의 위치까지 신경 써가며 노력했으나 미흡했다. 시대 감수성을 또 한 번 배우게 됐다.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라고 버틸 문제는 아니라고 느낀다.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거듭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극장 붐비는 요즘 기쁘고 감사”

영화 ‘휴민트’의 한 장면. NEW 제공


‘휴민트’는 류승완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감안할 때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내는 중이다. 특히나 설 연휴 경쟁하던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와 갈수록 스코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 (깊은 속내는 알 수 없으나) 류승완 감독은 이에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는데, 오히려 “간만에 극장이 북적여 기쁘고 감사”하단다. “장항준 감독도 그간 고생했는데 ‘왕과 사는 남자’가 잘 돼서 너무 좋다”고 부언했다.

그는 ‘휴민트’ 언론 시사회 때 “유독 떨린다”고 말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무엇이 영화를 30년 가까이 찍어온 베테랑 감독을 그렇게 떨리게 했을까. 류승완 감독은 “환경이 변하고 있어 그런 것 같다”며 동네의 텅 빈 극장을 지난 몇 년간 지켜보며 영화를 한 편 한 편 만드는 일의 소중함을 체감한다고 했다. 그는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 영화계를 언급하면서 “돌이켜보면 한국 영화가 성장한 이유로 ‘세대교체’ ‘영화제의 성장’ ‘비평 저널리즘의 성장’을 주로 얘기하는데, 저는 ‘관객의 성장’ 아니었으면 주류 대중 영화가 산업적인 시스템으로 안착할 수 없었다고 본다. 수요 없는 공급은 없으니까. 관객들이 밀어줘서 지금까지 왔는데, 그 놀이터가 비니까 복합적인 생각에 더욱 관객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 것 같다”며 대중영화에서 관객이 점하는 중요성을 설명했다.

문득 그가 찍은 ‘짝패’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하다.” 미디어도 관객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이 대사는 아직 유효할까. 그는 “글쎄요”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나. 하지만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관건은 어떻게 진화하느냐다. 변화에 살아남지 못하는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사라질 것이고, 살아남는 것은 또 진화하겠지. 결국 그래서,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 어떤 족보도 없는 저예산 독립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혈혈단신 출발해서 범 대중이 주목하는 감독으로 진화한 류승완 감독이야말로 ‘오래 가는 놈이 강하다’의 표본이다.

정시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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