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이 ‘와인 관세’ 높이면, 한국에선 와인이 싸진다

천호성 기자 2026. 2. 1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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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27일(현지시각)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경제 분야에 대해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AP 연합뉴스

27일 현대차 주가는 한때 5%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자동차에 물리는 관세를 25%로 올리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면서였다. 이튿날 그가 손바닥 뒤집듯 이를 철회했지만, 자동차 업계는 가장 큰 수출 시장을 잃을까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트럼프가 한국의 약점으로 자동차를 집었다면, 프랑스를 상대론 ‘와인’을 정조준했다. 자신이 설립한 ‘평화위원회’ 참여 제안을 19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거절하자,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200% 관세를 매기겠다고 으른 것이다. 이 정도 관세율이면 사실상 수출 길을 끊어버리겠다는 얘기라고 르몽드는 짚었다.

와인에 ‘200% 관세’ 윽박 이유

트럼프가 와인을 콕 집어 싸움을 건 건, 와인이 한국의 자동차 만큼이나 프랑스에 중요 산업이기 때문이다. 무역통계를 보여주는 트렌드이코노미에 따르면, 2023년 프랑스가 수출한 와인은 127억달러어치로 그해 프랑스 전체 수출의 2%였다. 이중 약 5분의 1이 미국으로 향해, 미국이 프랑스의 최대 와인 수출 시장이었다.

와인 수출 위축은 와이너리들의 주머니 사정만 쪼그라뜨리지 않는다. 노동집약적인 포도 재배·와인 양조에 종사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영향을 받고, 양조 설비·유통 등 유관 산업에도 충격이 번진다.

와인은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상품이다. 유럽에서 농촌은 전통적인 우파 강세 지역인데 최근엔 극우 열풍이 번진다. 이전엔 마크롱 정도의 중도·우파 성향 정치인을 밀어줬다면, 지금은 유럽연합 탈퇴와 농업 보조금 인상을 주장하는 극우 인사들이 인기를 흡수하는 추세다. ‘대통령이 보조금엔 인색하더니, 미국에 대거리하다가 농민들 돈줄만 막았다’는 비난이 일면 정부로선 뼈아프다.

2019년 11월 중국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의 프랑스 와인 부스에서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누아 등을 시음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와인 애호가인 마크롱 대통령은 와인 외교에도 열심이다. AFP 디캔터

무역 전쟁 단골메뉴, 와인

이런 이유로 와인은 무역 분쟁에서 ‘동네 북’이 됐다. 트럼프는 이미 첫번째 임기 때인 지난 2019년 유럽이 항공기 제조사에 주는 보조금을 문제 삼아 와인 관세를 25% 올렸다. 미국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취임 뒤 2021년에야 이 관세를 물렸다.

‘200%’라는 숫자가 등장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는 두번째 임기 시작 직후인 지난해 3월 미국에 수입되는 농산물 관세를 올리겠다며, 유럽산 와인에 200% 관세율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이후 실제로는 10% 세율을 매겼고, 유럽연합(EU)-미국 간 무역 협정이 타결된 그해 7월부턴 15%가 적용되고 있다.

이 만큼으로도 와인 산업엔 타격이다. 르몽드는 프랑스 와인·주류수출연맹(FEVS)을 인용해 지난해 1∼11월 미국으로의 프랑스 와인 수출이 17% 줄었다고 전했다.

200% 넘는 폭탄 관세를 정말로 매긴 사례도 있다. 2020년 오스트레일리아가 ‘코로나19 중국 기원설’을 조사하자고 주장하자 중국은 같은해 연말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에 대한 최고 212% 관세로 맞받았다. 그해 1∼3분기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의 39%가 중국으로 수출됐을 정도로 중국은 이 나라 와이너리의 주요 시장이었다.

2024년 두 나라 관계가 개선되며 관세는 사라졌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산업은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린다. 관세 인상 이듬해 중국으로의 와인 수출이 90% 넘게 줄며 재고가 쌓였고, 이는 세계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이 나라 와인을 안 마신 중국인들 입맛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협회는 지난해 전체 수출액이 전년보다 8% 줄어든 것으로 추산한다. 리터당 평균 가격도 3% 꺾였다. 현지 신문엔 “2, 3년 안에 포도 농사를 접겠다” “포도밭을 팔겠다”는 양조자들의 푸념이 이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인 ‘콜로니얼 이스테이트 엑자일 쉬라즈 바로사 밸리’ 2004년 빈티지. 천호성 기자

의외의 좋은점

다만 한국 소비자들에겐 ‘빅 마켓’ 나라들끼리 관세 폭탄을 날리는 게 나쁘지만 않다. 국제 와인 가격이 내리는 데다, 대체 시장인 한국에 물량이 몰릴 수 있어서다.

예컨대 중국-오스트레일리아 간 무역 분쟁 이후, 한국 대형마트나 로드샵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형 와이너리 제품 상당수 값이 10∼20% 떨어졌다. 진한 과실 풍미와 높은 알코올 도수로 인기가 좋은 ‘몰리두커 더 복서 쉬라즈’(Mollydooker The Boxer Shyraz)의 경우 한병 4만원대에 팔리다가, 2023년께부터 3만원 중반에 구할 수 있게 됐다.

또다른 쉬라즈 명가인 ‘투핸즈’(Two Hands)의 다양한 라인업도 가격표 앞자리가 바뀐 채 매대에 올랐다. 이보다 몸값 높은 ‘르윈’(Leeuwin Estate) 등도 이전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집을 수 있었다. 높은 주세와 유통 마진으로 술값이 유독 센 한국에서 가격 인하는 좀처럼 드문 일이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에 맛을 들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평소 궁금하던 보틀을 사다가 맛봤고, 지인들과 술자리엔 오스트레일리아산 쉬라즈나 샤르도네가 자주 나왔다. 특히 입맛을 바꿔놓은 술은 ‘콜로니얼 이스테이트 엑자일 쉬라즈 바로사 밸리’(The Colonial Estate Exile Shyraz Barossa Valley).

‘콜로니얼 이스테이트 엑자일 쉬라즈 바로사 밸리’ 2002년 빈티지. 천호성 기자

2022년 9월에 맛본 이 와인의 2004년 빈티지는 강인함과 유려함을 두루 갖췄다. 검은 자두·블랙베리류 주스가 마치 먹물을 머금은 듯 두터운 질감으로 혀를 눌렀고, 야성적인 흙향과 버섯향이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달달한 밀크티를 마신듯한 향기로움이 비강을 거슬러 코를 자극했다. 어느정도 숙성도 됐던지라 송이를 씹을 때처럼 그윽한 솔향이 술을 넘긴 뒤 길게 따랐다.

지난해 11월 다시 만난 같은 와인 2002년 빈티지 역시 발군의 풍미를 뽐냈다. 앞서의 밀크티 향은 한층 눅진한 연유 맛으로 바뀌어 와인의 뼈대를 이뤘고, 피스타치오와 다크초콜릿·에스프레소 같은 쌉쌀함이 뒤를 받쳤다. 타임류 허브가 은은히 이어져 한참을 음미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쉬라즈 하면 대개 후추 같은 매콤함과 15도를 웃도는 알코올 볼륨을 떠올렸는데, 그런 요소 없이도 맛에 빈틈이 없었다. 와인의 세계는 새삼 넓었다.

물론 세계가 끝없이 관세 전쟁을 벌이면 한국 와인 팬에게도 손해일 것이다. 새 시장을 찾지 못한 와이너리들이 생산을 포기하면 즐길 와인이 줄어드니까.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와인 값이 합리적일 날을 기다려본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천호성의 천병까기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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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마셔도 맛있을 가성비 와인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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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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