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변곡점에 선 국제질서, 힘의 충돌과 경제안보

2026. 1. 2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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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원 서울대 특임교수·전 대통령실 경제수석
국제정세가 요동친다. 지정학적 갈등과 기술 변혁 속에 강대국 간 힘이 충돌하고 세계경제의 패권 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 약 25년 동안 세계는 부(wealth)의 추구와 권력(power)의 행사가 분리될 수 있다는 낙관론 속에 살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말’처럼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승리를 거둔 듯 보였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편입시키면 민주화와 평화가 뒤따를 것이라 믿었고 기업들은 안보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중국과 동유럽으로 공장을 옮겼다.

「 국제질서 힘의 논리에 좌지우지
약육강식의 정글로 바뀌는 중
한국 국가전략 새롭게 설계해야
패권국엔 대체 불가 파트너 돼야

이러한 낙관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기점으로 깨졌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막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국제정치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세계는 부와 권력이 결합하는 경제안보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그전에는 돈만 벌면 되었지만 이젠 반도체(wealth)가 미사일의 눈(power)이 되었고 희토류와 기술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무기가 되었다. 효율 중심의 시장 자본주의가 퇴조하고 냉혹한 힘의 논리와 부국강병 질서가 다시 열리고 있다.

국제질서는 사실 국가 간 경쟁과 세력 다툼이 본질인데 질서의 기준이 규범에서 힘으로 달라진 것이다.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의 싸움이 격화되고 국가 간 관계가 분절화, 정치화하고 있다. 그 결과 다자주의가 더 무력해지고 국제질서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 밑바닥에는 경제지형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밀라노비치의 ‘코끼리 곡선’이 시사하듯, 세계화는 후진국 성장을 도왔지만 선진국 중산층의 소득 정체와 분배 악화를 야기했다. 부모보다 가난해진 자식 세대의 분노는 세계화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브렉시트, 트럼프 정부 출범, 유럽 극우세력 부상 등 정치적 지각변동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리더를 자처해온 미국의 태도 변화는 질서 전환을 가속한 트리거이다. 그간 미국이 세계화와 다자주의를 지지했던 이유는 자국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성적인 재정·무역 적자에 지치고 중국의 부상으로 패권국 지위가 도전받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은 세계 질서를 떠받치는 ‘글로벌 보험제공자’ 역할을 내려놓았다. 더 나아가 자국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변국 주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힘을 이용해 동맹과 적대국 모두를 압박하는 ‘이익 추출자’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안보전략(NSS)은 이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리더십과 신뢰 상실 비용을 우려하는 견해도 있지만 질서 재편을 시간문제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국제질서의 미래를 두고 ‘완전한 디커플링’이나 ‘다자주의 복원’을 전망하는 전문가는 이제 드물다. 대신 미국 중심 단극에서 다극 질서로의 전환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에 맞서 중국은 현 갈등을 통상 분쟁이 아닌 패권 전쟁으로 인식하며 일대일로 등 우군 확보에 꾸준히 나서고 있다. 서방주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인도 등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도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있다. 그 결과 다자질서가 교착되고 지역, 소다자(minilateral) 협력 등 하이브리드 지배구조가 확산될 소지가 크다.

다극 질서로의 전환과정에서 힘 센 나라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하면 좋겠지만 힘의 충돌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브넷(Evenett) 스위스 장크트갈렌대 교수는 안보 핵심 영역의 진영간 교류는 통제하되 다른 분야 교류는 허용되는 ‘투과성 있는(permeable) 세력권’을 단기적으로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제시했다. 2030년 이후에는 ‘착취적 지역 패권’ 체제가 펼쳐질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패권국이 질서유지 대가로 기술과 시장을 강요하며 주변국에 보호세를 걷는 행태가 강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대외의존도가 높고 대외협력이 중요한 한국에는 위협적인 시나리오다. 홀로서기는 어렵고 누구 편들면 다른 편을 잃을 수 있는 구도 속에서 고난도의 줄타기를 요구한다.

세계화의 대표적 수혜국이었던 한국에 작금의 변화는 국가 전략을 재설계하라는 요구다. 눈을 뜨면 새로운 갈등 뉴스를 접하는 상황인데 세상이 설마 그리 변할까 보고만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기술 초격차를 통해 패권국이 우리를 대체 불가 파트너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기술주권의 국가적 중요성이 크다면 자잘한 국내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규제 혁파, 노동시장 선진화, 연구개발 혁신으로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 위험 관리(de-risking) 또한 중요해졌다. 높은 특정국 의존은 착취당할 약점이 된다. 경제안보 컨트롤타워를 고도화하고 시장과 공급망 다변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국제협력에 있어서는 다층적 레버리지가 필요하다. G20 등 다자 협의체, 소(小)다자, 지역 연합을 통해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해외 현장에는 도메인 전문성과 언어능력이 탁월한 대표선수를 보내야 한다. 잘못된 인사는 무익을 넘어 해를 끼치기 십상이다. 기업경영에서도 회복 탄력성이 중요하다. 안보 측면을 고려하고 위기관리 근육을 키워야 한다. 위험 전이를 막는 울타리도 높여야 한다. 요동치는 국제정세 속에 미래를 지킬 버팀목은 냉철한 상황 인식과 국익 기반의 전략적 대응이다.

윤종원 서울대 특임교수·전 대통령실 경제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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