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대충하면 금세 알아채, 물감 사려 적금 두 개나 깼죠

서정민 2026. 1. 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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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데뷔 30년 준비, 전시회 여는 ‘작은 거인’ 김수철
김수철이 가장 좋아하는 ‘바다’ 그림. “바다가 꼭 푸른 색만은 아니다”라는 그는 다양한 원색을 더했는데 어쩐지 자화상 같기도 하다. 김정훈 기자
2023년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음악계에 한 획을 그었던 ‘작은 거인’ 김수철이 또 큰일을 냈다. 이번에는 그림이다. 오는 2월 14일부터 3월 2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전관에서 대규모 전시 ‘김수철 소리 그림’을 연다.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이 국악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간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다면, ‘김수철 소리 그림’전은 30여 년간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그려온 그림을 수줍게 선보이는 자리다. 더욱이 연예인 프리미엄 없이, 전시 기획서를 내고 전문가 심사를 거친 후 치르게 된 전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김수철의 그림이 꽤 괜찮다는 얘기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그린 걸까. 음악 말고, 그림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지난 20일 서울 외곽에 있는 그림 작업실에서 김수철을 만났다.

Q : ‘소리 그림’이라는 게 뭔가.
A : “내게 들리는 소리들… 새싹의 소리, 살아있는 소리, 희망의 소리, 세상 돌아가는 소리, 행복한 소리, 슬픈 소리, 지구촌의 소리, 바다 속 소리, 어느 행성의 소리, 우주의 소리, 그리고 생명의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을 그린 그림이다.”

Q : 소리를 그렸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A : “움직임을 위한 소리는 무용 음악, 영상과 함께하는 소리는 영화·드라마 음악, 어느 공간에서 스토리가 전개될 때 들리는 소리는 연극 음악, 빛과 소리가 조화롭게 전개되면 행사 음악. 나는 그렇게 여러 소리들을 모아 음악으로 작곡해 왔고, 내게 들리는 소리들을 이미지화한 게 그림이다.”
흰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놓고 마음 가는 대로 붓을 놀린 듯, 형태도 불분명한 그의 그림들에서 두꺼운 물감자국들은 때로는 경쾌하게 뛰어다니고, 때로는 깊숙이 가라앉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의 기분을 그렸다는 그림일기들 앞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김수철이 딱 떠오른다. 외계 행성에 들린 소리를 그들의 언어로 옮겼다는 그림은 페루 남부 사막 지대에 그려진 나스카 지상화처럼 알 수 없는 기호들의 연속이다.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한 캔버스에 훅 끼어든 깨발랄한 핑크빛도 다른 행성이 보내는 소리란다.

그림도 무조건 재밌어야 감동·메시지 전달
회화 장르로 구분하자면 추상인데, 그에게는 이런 수식어들이 굳이 필요 없는 듯 보인다. 다만 그의 그림을 본 이들의 평은 이렇다. 이택광 문화비평가는 “김수철은 소리와 이미지를 사용하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소리와 이미지로 존재를 사유하는 사색가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뇌과학자인 정재승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우리는 흔히 음악을 시간예술이라고 부르고, 회화를 공간예술이라고 말하지만 김수철의 작업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 그의 그림들은 시간을 담고, 소리를 기억하며, 몸의 리듬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국 전 경기도박물관장은 이런 그림을 그리는 김수철을 “영원한 천진난만한 아이이자 초현실세계에 사는 광인(狂人)이고, 외계인과 교신하는 샤먼이자 선정(禪定)에 빠진 선승이기도 하다”고 표현했다.

Q :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건 언제부터인가.
A : “초등학교 때부터 대회에서 최우수상 받고 복도에 그림 전시되고 그랬다.(웃음)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에 빠지면서 멀어졌는데 대학 때부터 다시 수첩에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 노트를 보니 작곡 끝나면 옆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놓았더라. 팬데믹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집에서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50년 동안 문화예술계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친구들 중에 그림 그리는 이들도 많고, 전시장도 많이 들락날락해서 전혀 낯선 일도 아니다.”

Q : 30여 년 지속돼온 혼자만의 작업을 대중에게 보이려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
A : “1년 6개월 전쯤 서울 외곽의 공장형 건물에 작업실을 얻었다. 집에 그림이 많아지니까 내가 갈 데가 없더라.(웃음) 거실은 음악 작업을 하는 공간, 서재는 책 보는 연구실. 결국 남는 공간이 직사각형으로 생긴 2평짜리 부엌뿐이라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싱크대고 가스렌지고 그림들이 쌓이니까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답답해지더라. 물감 냄새 때문에 머리도 아프고. 창고 겸 작업실을 얻어 정리를 하면서 살펴보니 이 정도면 남들한테 보여도 되지 않을까 용기가 났다. 지인들 중 미술 전문가들을 불러 슬며시 보여줬더니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전시를 추진하더라.(웃음)”
30평 정도 규모의 작업실 한쪽에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김정훈 기자
그는 30평 정도의 작업실을 얻은 날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음악 작업이 없는 날에는 오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작업실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공간이 커진 만큼 그림 사이즈도 커져서 100호·200호 사이즈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짧은 팔·다리가 문제였다. “꼭 저 자리에 점을 찍고 싶은데…” 잡아줄 조수도 없고, 이럴 때 어떤 도구를 써야 할 지도 모르는 신인 화가의 비애다. 아크로바틱을 하듯 기묘한 자세로 붓질을 하다 정형외과 신세도 여러 번 졌다. “그런데 내가 또 환경 탓 하고, 세상 탓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있는 데서 최선을 다한다, 이런 쪽이라서. 이렇게 넓은 공간까지 생겼는데 이만하면 재벌이지, 이걸 만끽하자 생각한다. 캔버스를 세워 놓고 그릴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웃음)

Q : 작업실에 오디오 시스템이 하나도 없다.
A : “음악 한 지 50년이 넘었다. 작곡 안 하고, 공부 안 할 때는 음악 안 듣는다. 귀가 쉬어야 하니까. 차에서도 음악 안 듣는다. 그림 그릴 때는 전화도 안 받는다. 완전 몰두해야만 좋은 게 나오니까.”
그는 그림을 그릴 때가 작곡할 때보다 더 외롭다고 했다. 작곡할 때는 내가 만들고 있는 음이 들리고, 그 음악 소리에 위로 받을 수 있는데 그림은 철저히 혼자 하는 작업이라 적막뿐이다. 더군다나 물감이 마를 때까지 딴 짓도 못 한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팔만대장경 기념 음악을 의뢰받고 해인사 대장경 수장고를 방문한 날, 천년의 기운을 느낀 후로는 담배도 술도 모두 끊었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꿀 만큼 신심을 다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서도 그는 늘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내가 지금도 기타 칠 수 있는 건 술·담배 안 하고, 매일 연습하기 때문이다. 연주가가 술을 먹는다면 다 가짜다. 자기가 하는 일은 철저히 해야지. 대충 어지간하면 대중은 금세 알아챈다. 나는 음악이든 그림이든 길게 평생 하고 싶다.”

Q : 물감 자국이 손으로 잡힐 만큼 입체적이고 두꺼운 작품이 많다. 물감 값 꽤나 들었을 것 같다.
A : “아크릴 물감으로 내가 원하는 유화 질감을 내려면 계속 덧칠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적금을 두 개 깼다.(웃음) 물감 몇 번 짜면 몇만원이 날아간다.”
내달 14일부터 한가람디자인미술관서 전시

Q : 덕분에 색감과 질감이 살아 있다.
A : “내가 그림 그리면서 신경 쓰는 건 세 가지다. 첫째, 색의 세련됨이다. 회화는 색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색의 조합이 세련돼야 한다. 이건 뭘 보고 흉내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직감적으로 느껴져야 하는 거라 꾸준히 그리며 나만의 노하우를 쌓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둘째, 에너지가 느껴져야 한다. 화려한 그림이든, 어두운 그림이든 보는 사람에게 어떤 기운을 전달해야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내가 들은 소리들이 잘 보였으면 좋겠다.”

Q : 다시 ‘소리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바다 속 소리, 외계 행성의 소리를 듣는다는 건 만화적 발상 아닌가.
A : “그림도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 재미가 있는 속에서 감동도, 메시지도 줘야 한다. 내 그림의 메시지를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공생과 공존이다. 인간은 바다 속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어떤 소리가 들릴지 안 들릴지 잘 모른다. 그런데 바다 속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고 자만한다. 오만이다. 우주는 너무 넓어서 지구는 콩 한 알 크기도 안 된다. 하물며 그 속에 사는 인간은 한 줌 먼지도 안 되는 존재인데 잘난 척, 이기심이 끝이 없어서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를 병들게 한다. 인류를 발전시켰다는 과학도 결국 살상 무기 개발로 치닫고 있지 않나. 그러니 외계 행성에서 볼 때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가. 아마도 이러겠지. ‘정신 차려, 이 친구야’.”(웃음)
※지난 23일 김수철의 에세이 『김수철의 젊은 그대』(문학수첩·사진)도 출간됐다. ‘음악 인생 50년, 그림 인생 30년’을 돌아보며 지나온 삶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90년대생 사진기자가 “얼굴은 모르지만 노래 ‘날아라 수퍼보드’ 주제가와 ‘젊은 그대’는 잘 안다”고 한 것처럼, 70대를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는 ‘작은 거인’ 김수철의 ‘기타 하나, 붓 한 자루’ 인생이 흥미진진하다. 창작에 몰두하는 예술인 말고도 대인관계와 경제적 난관에 고민하는 생활인, 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하는 시민 등 대중이 미처 몰랐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만날 수 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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