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한 문화유산, '올리브영 투어'가 정답일까 [왜 지금]
쇼핑이 곧 문화 체험, 변하는 여행의 패러다임
전통문화 외면 속 K뷰티가 새 정체성으로 부상
소비를 문화로... 지속 가능한 관광 전략 과제
[지데일리] 서울 한복판,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한국 최대의 H&B(Health & Beauty) 스토어 ‘올리브영’이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단체 여행객들이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 유산보다 ‘한국식 뷰티 문화’에 더 열광한다. 한국의 ‘핫한 브랜드’와 ‘인스타그램용 제품’이 그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문화 체험인 셈이다.

전통 관광지 대신 쇼핑이 목적지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통계에 따르면, 2025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약 1800만 명. 그중 절반 이상이 방문 목적 1순위로 ‘쇼핑’을 꼽았다. ‘한류 콘텐츠 체험’과 ‘음식 탐방’이 뒤를 이었다. 반면 ‘문화유산 관광’은 상위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경복궁, 불국사, 수원 화성 같은 역사 유적지는 외국인들이 꼭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그러나 최근 20~30대 젊은 세대의 소비 중심 관광 트렌드가 급변했다. 전통보다는 ‘체험 가능한 소비’,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 ‘인플루언서가 추천한 상품’이 여행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어릴 때 교과서로 본 경복궁보다, 유튜버가 소개한 올리브영 화장품이 더 궁금했다”고 말했다. 한류 드라마 속 화장품, 아이돌이 쓴 립밤, SNS에서 ‘인생템’이라 불리는 마스크팩이 ‘한국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K뷰티, 관광의 중심으로 부상
올리브영은 단순한 리테일 스토어를 넘어 외국인에게 ‘K뷰티 문화 체험관’이 되었다. 명동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다국어 안내 직원이 배치되어 있고, 결제 시스템은 알리페이·위챗페이·태국 QR 결제까지 완벽히 대응한다. 제품 하나하나에는 ‘Made in Korea’라는 문구가 아닌 ‘Korean Style’이라는 브랜드적 가치가 녹아 있다.
최근 올리브영 매장 안에서는 단순 구매를 넘어 ‘브랜드 인증샷’ 문화가 형성됐다. 전시된 색조 제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매장 직원보다 더 많을 정도다. 제품은 ‘기념품’이자 ‘문화 코드’다. 한국 문화의 새로운 상징이 미(美)의 산업으로 대체된 셈이다.
외국인들의 발길이 향하는 방향은 이젠 명확하다. 전통보다 소비를 통해 한국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 흐름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한국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변화한 여행의 의미, ‘소비’가 곧 ‘문화 체험’
SNS 시대의 여행은 ‘무엇을 봤는가’보다 ‘무엇을 샀는가’, ‘어떤 경험을 공유했는가’로 요약된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올리브영은 ‘한국 트렌드의 물리적 집합소’다. 이곳에서의 쇼핑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미감, 라이프스타일, 트렌드 감수성을 직접 체험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한국에는 여전히 방대한 문화유산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젊은 글로벌 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전통 문화는 ‘보러 가는 것’에 머물지만, 올리브영은 ‘직접 체험하고 참여하는 공간’으로 진화했다. 관광의 패러다임이 ‘관람형’에서 ‘참여형’으로 이동한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컬처 커머스(culture commerce)’가 부상하는 이유도 같다. 쇼핑은 단순한 상업이 아닌, 문화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국가 브랜드를 강화하는 창구다. 한국의 H&B 산업은 이러한 흐름을 선제적으로 비즈니스로 전환한 사례로 꼽힌다.
전통문화의 과제와 기회는
그러나 이는 한국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문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외국인에게 한국은 더 이상 삼국시대의 유적이나 궁궐의 단청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대신, 화장품 매장의 향기와 패키징 감각, 빠르고 편리한 결제 시스템으로 인식된다. 전통을 대체하는 새로운 ‘K컬처’의 언어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전통이 박물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산업적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정체성과 역사성을 반영할 통합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례로 경복궁 근처 전통문화재지구에 ‘한류 뷰티 체험관’을 조성하거나, 전통 성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화장품 브랜드를 문화유산과 결합하는 방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쇼핑 관광’이 아닌 ‘스토리 있는 소비 경험’으로 발전시킨다면, 전통과 현대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새로운 관광 전략이 절실하다. 관광 자원의 다변화만으로는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를 따라잡기 어렵다. 전통문화의 디지털 콘텐츠화, 체험형 큐레이션, 지역 기반의 브랜드화 등이 핵심 과제가 될 수 있다.
기업 측면에서는 외국인 소비 데이터를 활용한 문화 연계 마케팅이 필요하다. 올리브영, 아리따움, 시코르 등 H&B 리테일 브랜드들은 이미 각국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을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K컬처 노선’이 더해진다면, 단순 쇼핑을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 교류’의 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복궁 뷰티 루트' 같은 새로운 관광 상품을 만들어 화장품 쇼핑과 한복 체험, 전통 향 체험을 하나의 스토리로 묶는다면 관광객의 동선이 자연스럽게 문화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는 변한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올리브영 앞에 줄을 서는 현상은 단순히 ‘K뷰티의 인기’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한국이 세계에 보여주는 ‘새로운 문화 정체성’의 단면이다.
전통이 외면받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는 ‘새로운 방식의 소비문화’로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이에 소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디자인, 전통의 현대적 재맥락화, 지속 가능한 관광 모델 구축이 과제로 제기된다.
한국의 문화유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이제는 ‘찾아오게 해야’ 할 때다. 그 출발점은 바로 올리브영처럼 세계인이 줄 서는 공간 안에서 ‘한국다움’을 새롭게 정의하는 일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