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공감과 연민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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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역사와 지리, 언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깊은 감동을 준 인물이다.
다산은 시대가 발전할수록 기술도 진보해야 하며, 선진 기술의 수용은 국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산의 이용감은 AI중심의 국가 컨트롤 타워의 구축, AI윤리와 국제표준의 선점 등 오늘날의 국가정책과 다르지 않다.
시가 왕숙신도시 내에 수도권 최대 규모인 왕숙첨단산업단지에 우리금융그룹, 카카오, 신한금융그룹 등으로부터 총 2조원에 달하는 대형 AI인프라 유치에 성공한 점도 다산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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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역사와 지리, 언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깊은 감동을 준 인물이다.
새로운 국가 모델을 설계한 거인으로, '우리 민족의 선각자'라는 수사가 과하지 않은 위인이다. 다산은 뜰 가득 국화꽃을 심어두고 그윽한 향기를 즐기던 낭만주의자이자, 나라의 고단한 현실을 문학 속에 새겨 넣은 애민사상의 선구자다.
18년이라는 고달픈 유배 생활 속에서도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버림받은 백성을 향한 연민을 억제하지 못했던 휴머니스트였다.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에 아내를 떠올리는 애틋한 남편이었고, 아내의 낡은 치마를 잘라 아들에게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서신을 보낸 자상한 아버지였다.
다산은 새해가 되면 이웃과 지인들에게 달력은 선물했으며, 달력에 한 해의 목표와 실천 방법을 적어 내려가며 몇 가지 당부를 남겼다.
학문적 성취라는 거대한 산맥에서 눈을 돌려 다산의 삶을 따라가는, '인간 정약용'의 진면목과 마주해 본다.

다산은 15세 나이에 성호 이익의 학맥을 이어받아 사실과 사람을 중심에 둔 실학의 길을 걸었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과 행위를 긍정했으며, 역사와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는 국가를 꿈꿨다.
다산은 당대의 지식인 계층인 선비들에게 준엄을 요구했다.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스스로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는 '수기(修己)'와 사람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치인(治人)'이 학문의 본질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다산이 규정하 참된 선비의 학문은 관념의 유희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외세를 물리쳐 자주권을 수호하고 재정을 넉넉히하는 것, 문무를 겸비해 세상의 모든 변화에 능동적으로 부응하는 것을 핵심가치로 뒀다.
학맥과 학파를 뛰어넘어 각자의 성취를 나누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대안 지식인'의 역할이 다산이 생각한 지식인의 존재이유였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도 여기에 있다.
다산이 보여준 문제의식과 탐구정신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역의 인문학적 토대 위에서 문화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질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가는 태도는 AI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속성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통찰을 지녔다. '인시순속(因時順俗)', 즉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세태에 맞춰 제도와 문화를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명분에 사로잡혀 변화를 거부하던 당대 사대부들과 차별화된 혁신적 사고였다.
특히 개인이 경제 활동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적극 옹호했다.
사회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익 추구는 권장돼야 하며, 부의 균형이 무너질 때만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독점적 상업을 규제하고 공정한 세금을 징수하는 동시에 상업을 관리할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함을 강조했다.
국가 차원의 상업 진흥과 생산기술 발전을 위해 전담 관청인 '이용감(利用監)'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선진 기술을 수용하고 국제적 교류를 넓혀야 한다는 다산의 주장은, 미국 패권주의에 따른 무역 전쟁이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을 바라보면 시대를 앞서간 혜안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시대가 발전할수록 기술도 진보해야 하며, 선진 기술의 수용은 국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산이 저술한 '기예론(技藝論)'을 보면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지혜를 합치면 기술을 진흥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조선 전체가 기술을 천시하던 시대적 흐름을 생각하면, 다산은 과학과 공업의 중요성을 최초로 제기한 혁명가라 할 수 있다.
서구 열강이 산업혁명을 통해 도시화와 기술 발전을 구가하던 시기, 다산은 농업 중심의 조선을 과학기술 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백성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외국 기술을 도입하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기술로 발전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다산의 이용감은 AI중심의 국가 컨트롤 타워의 구축, AI윤리와 국제표준의 선점 등 오늘날의 국가정책과 다르지 않다.
시가 왕숙신도시 내에 수도권 최대 규모인 왕숙첨단산업단지에 우리금융그룹, 카카오, 신한금융그룹 등으로부터 총 2조원에 달하는 대형 AI인프라 유치에 성공한 점도 다산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외형적 성장이 아닌, 첨단산업으로 왕숙지구를 조성해 질적으로 성장한 '자족도시 남양주'로 거듭나기 위한 시의 그동안의 노력의 결실이다.
여기에 탄소중립시대에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할 전략 에너지로 '수소'를 정확히 인식, 3기 신도시 최초로 왕숙2지구를 수소에너지 자족형 신도시로 조성하려는 시의 전략적 접근은 다산을 웃음짓게 하기 충분하다.
# 농업의 기술혁신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기본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실천적 삶의 지혜가 가득하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는 아들에게 다양한 종묘법과 사육 방식을 실험해 책으로 엮으라고 주문한 것은 기술의 공유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이익을 얻는 행위는 '매우 좋은 일'이라 격려했고, 개인의 경제적 성취를 긍정한 점은 매우 인상적인 행동이었다.
다산은 농업 품종 개량, 농기계 혁신, 2차 가공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을 강조하며 농민의 삶을 질적으로 개선하는 '삼농(三農)' 의식을 실천했다.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이 농촌의 발달을 견인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남양주시로 이어진다.
지난 21일 시 주도로 급변하는 농업 환경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미래 농업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듈형 스마트팜' 연구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공간적 제약이 큰 도시 환경에서도 기능하도록, 모듈 단위로 설계와 확장이 가능한 스마트팜 기술을 도입하려는 새로운 시도다.
작물 생육과 환경 관리도 자동화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청년 및 신규 농업인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계획이다.
이처럼 AI 기술이 농업에 접목돼 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세상이 바로 다산이 꿈꿨던 농촌의 미래상이었다 할 수 있다.

오랜 군주제에서 백성은 세금을 내고 부역을 하는 피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산은 인간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주권(自主權)'을 가진 존재로 인식했다.
백성의 뜻을 따르고 그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다산의 신념은 확고했다.
백성을 돌봐야 할 목민관들이 오히려 고혈을 짜내는 세태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오직 백성을 위해서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위민(爲民)'의 정치를 강조한 다산이다.
다산은 교육을 통해 폭정이 발 붙이지 못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산은 지금 시대의 공직자들에게 백성(시민)의 뜻을 경청하고 그들을 위하는 '정학(正學)'을 실천할 것을 끝없이 되새기게 만든다.
지식인이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고,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며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치가 시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세상이 다산이 꿈꾸던 세상이다.
현재 남양주에는 467개 자원봉사 단체와 21만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등록돼 있다.
시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수치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시민들 스스로 이웃을 돌보고 성공적 공동체를 형성한 성공사례로 볼 수 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주적 시민사회, 다산이 그려왔던 남양주시의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새해의 시작에 달력에 할 일을 하나씩 적던 정성스러운 다산을 품고, 혼란스러운 국제정세와 혹독한 경제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용기를 가져본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사진=<남양주시 제공>
다산 정약용(1762.6.16~1836.2.22)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저술가·시인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업적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정조 승하 후 천주교도 박해 등과 연관돼 약 18년의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 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했다.
현종 2년인 1836년 고향인 남양주 마현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실학자로서 그는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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