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부터 민주화까지…근현대사 관통한 참스승”

전남고 등 제자 40명 구술 받아 집필
평양숭실중 재학 중 민족의식 눈 떠 신사참배 거부로 100일 수감되기도
일제 말 ‘신사회 사건’으로 옥고
해방 뒤 전주·광주서 교편 잡았으나
유신 반대 시위 배후로 지목돼 해직
5·18 직후 제자들 숨겨줬다고 징역
“김용근 선생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험난한 시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강의실에 머무르는 전형적인 교사 이상의 존재였다. 그에게 ‘감전당한’ 제자들은 그를 ‘목소리로 가르친 스승’ ‘프로메테우스처럼 불을 건네준 먼저 아는 자’ ‘별이자 거울’로 기억한다.”
김용근선생기념사업회가 ‘시대의 스승’으로 불린 고 김용근(1917∼1985)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시대의 교사 김용근 평전’(글통)을 출간했다. 기념사업회는 “오는 26일 오후 3시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21일 밝혔다. 평전 출간을 위해 제자 40여명이 구술에 참여했다. 집필은 은우근 촛불행동 대표가 맡았다.
제자들은 스승 김용근을 “스승이자 선배이고 친구이며 동지”라고 기억했다. “제도 교육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시대의 교사’”라고도 했다. 그의 교육 철학과 교육적 실천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평전을 보면 김 선생은 평생 외압에 굴하지 않고 마음 속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191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이 세운 영흥보통학교를 다니며 애국심을 키웠다. 1932년에는 평양숭실중학교로 진학하며 민족의식에 눈떴다. 그는 종교부장을 맡았던 1936년 1월 일제가 신사 참배와 궁성요배(일왕 궁성 방향으로 하는 절)를 강요하자 거부 운동에 나서 평양경찰서에 100일간 갇혔다.
출옥 뒤에는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김 선생이 “민족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시라”고 청하자 안창호는 “고향에서 돼지 한마리만이라도 전문적으로 기르는 것을 공부하면 민족의 현실에 기여할 힘이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은우근 대표는 이때를 가리켜 “김 선생이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고, 민족을 위해 보람된 일을 구체화하겠다고 다짐한 순간”이라고 했다.
1937년 숭실중을 졸업한 김 선생은 두달 뒤 영광군 염산 야월교회 개량서당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탈과 국제 정세를 이야기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는 치안유지법 등을 위반했다며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만기 출소 뒤 목포 유달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23살 때인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총독암살단을 결성하고 ‘신사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나섰다. 다만 총독암살단과 신사회와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김 선생은 1942년 1월 신사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3년3개월 뒤인 1945년 4월 전주형무소에서 나왔다.
강제징용을 피해 만주행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넌 지 하루 만에 해방을 맞은 그는 1946년 연세대 사학과 1회로 다시 입학해 1950년 졸업했다. 사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으로 입대해 3년4개월간 문관으로 복무하며 전쟁의 참상을 지켜봤다. 1954년 군 제대 이후에는 전주고에 교사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광주고, 광주제일고 등을 거쳐 1973년 전남고에 부임했다. 1975년 전남고, 광주제일고 학생들은 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 시위에 나섰고 시위 배후로 지목된 김 선생과 동료 교사였던 문병란 시인은 사직해야 했다.
당시 전남고 2학년이었던 임형칠 김용근선생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75년 5월 둘째 주 오전 국사수업 중 교장의 부름을 받고 나간 선생님이 돌아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보니 교장실에서 교장과 정보경찰, 중앙정보부 요원과 선생님이 함께 앉아 있었다”고 기억했다. 마지막 수업이었다.
이후 강진으로 귀향해 농사를 지었다. 1980년 5월23일께 고 윤한봉 등 제자 4명이 계엄군을 피해 김 선생을 찾아왔다. 김 선생은 6월30일 범인은닉죄로 경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 수감됐다. 고 김양래 등 전남고 제자들은 이곳에서 졸업 후 처음으로 김 선생과 해후했다. 김 선생은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받고 1980년 11월 석방됐다. 1985년 5월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강진 작천교회 장로로서 지역을 위해 봉사했다.
김 선생은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독립유공자가 됐고 2002년에는 5·18유공자로 추서됐다. 제자들은 1995년부터 김용근민족교육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김이수 김용근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발간사에서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줬던 강인한 기개, 철학과 역사와 기독교를 종횡하며 인간사를 파악한 그의 인문 정신은 제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고 평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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