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칼럼] 이 대통령의 회견에 거는 기대
보수 진보의 이념적 진영정치 무의미
탈이념정치 가능성 보인 李 기자회견
기대는 되나 견제세력의 부재는 우려

정치행위의 외양은 권력게임이되 본질은 가치의 경쟁이다. 권력게임의 승부는 어느 편이 시대적 가치를 선점하느냐는 본질의 문제에 달렸다는 뜻이다. 한국의 정치는 오랜 기간 보수와 진보의 이념진영 간 가치경쟁의 역사였다. 바꿔 말하면 산업화 세력으로 대표되는 보수진영과 민주화 세력을 자임하는 진보진영과의 격렬하고도 배타적인 대립구도였다.
21세기 들어 IT기술혁명에 따른 사회의 다원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전통적인 보수 진보의 단순 이념구분은 급속하게 의미를 잃었다. 시대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는 여전히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 간의 도식적 헤게모니 쟁탈전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대착오적 이념 갈등에 대한 누적된 피로감이 지금처럼 중도층을 갈 곳 잃은 절대다수로 키운 토양이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일찌감치 이 사안을 짚었다. ‘보수 진보의 낡은 이념은 역사의 박물관에 보내고, 박정희 김대중 정책도 다 쓰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되겠다’는 언명이다. 물론 과거 여러 대통령에게서 배웠듯 취임사는 믿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잦은 말 바꾸기 전력도 이유가 됐다. 엊그제 그의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이재명 시대가 낡은 이념의 틀을 허무는 시대적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물론 사안별 각론으로는 얼마든지 시비할 만한 발언들이 있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기자회견에서 주목한 것은 분명한 탈이념 선언이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이 가장 의미 있게 반복한 단어가 성장이었다. 성장 없이는 분배도, 국민적 삶의 질도, 나아가 국가의 균형발전도 가능하지 않다는 실용적 현실인식이다. 지역 계층의 균형론으로 진보 가치를 끌어안되 방점은 분명하게 성장에 찍었다. 분배가 성장을 견인한다는 식의 비현실적인 진보적 경제론과는 확실하게 거리를 두었다. 한국적 이념 기준인 대북입장에서도 핵 현실론과 강력한 국방력을 함께 거론함으로써 어느 편에게서든 일방적 공격을 당할 소지를 줄였다. 이러면 남는 건 북핵문제 해결의 구체적 로드맵과 유효성에 대한 생산적 논쟁이다.
대통령의 분명한 탈진영적 노선이 또한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정치문화의 혁신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망국적 정치팬덤 문화를 실용적 정책논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팬덤으로 성장하고 팬덤으로 정치생명을 이어가고 팬덤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당사자다. 팬덤정치는 반대진영에 대한 극단적 적개와 혐오로 합의민주주의와 통합을 부질없는 짓으로 만들면서 한국정치를 엉망으로 오염시켰다. 이 대통령에게는 그가 키운 정치팬덤 문화를 스스로 거둬야 할 책임이 있다.
어쨌든 중도보수까진 모르겠으되 분명히 중도층에는 소구하는 이 대통령의 노선은 정치게임의 측면에서도 아주 유효한 전략이다. 국민의힘과 강성 보수진영이 윤석열의 환영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정치적 중원에 확실하게 깃발을 꽂았다. 국민의힘과 강성 보수진영은 변방 구석에 몰려 그나마 남은 작은 성을 지키는 데도 힘겨워하는 처지가 됐다.
물론 이 대통령의 진정성은 아직은 더 지켜볼 일이다. 외교 안보 등에서의 괄목할 성과를 칭찬하다가도 내란 2차특검 강행이나 가덕도 피습 재조사 등으로 실망하는 경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지지율이나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여유는 여전한 윤석열 잔영효과와 함께 실력 있는 견제세력의 부재 덕이기도 할 것이다. 견제 없는 자신감은 자칫 아집과 독선으로 뒤집히기 십상이다. 결어(結語)는 그래서 또 국민의힘의 각성이다.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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