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수필집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출간

곽성일 기자 2026. 1. 22. 16:0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공개 편지 수록해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사랑의 윤리 조명
절제된 문장으로 한국 수필 미학 재확인
▲ 악수도없이헤어졌다 표지.민음사

'사랑을 하고 갔구나.'라는 한숨이 남는 문장. 그 문장은 대개,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양복바지를 말아 올리고 젖은 모래 위 조가비를 줍는 순간, 다스한 햇볕과 흙냄새가 유일한 강장제가 되는 하루, 오월 속에 '지금'이 들어오는 찰나. 피천득의 산문은 늘 그 작고 낮은 시작점에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반짝이는 곳으로 데려간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피천득 수필집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그 투명한 문장의 정점들을 다시 묶어, 오늘의 독자 앞에 '한국 수필의 미학적 기준'을 또렷하게 세운다. 이번 판본은 기존 수필집 『인연』을 바탕으로 구성하되,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식에게 보낸 편지를 새롭게 더해 피천득 문학의 정서를 확장했다.

△딸 '서영이'만이 아닌, 아들 '수영이'에게

피천득은 독자들에게 '서영이'를 그리워한 아버지로 널리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또 다른 자식이 있었고, 다른 방식의 사랑이 있었다. 이번 책에 새로 수록된 편지들은 '수영이에게'라는 파트로 묶였다. 절제된 문장, 과장 없는 걱정, 멀리 둔 자식에 대한 담담한 마음. 이 편지들은 피천득 산문에서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아버지로서의 얼굴을 비춘다. 동시에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드러내기보다 지켜 내는 방식의 답을 제시한다.

이로써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단순한 수필 선집을 넘어선다. 독자는 '딸을 향한 애틋함'으로만 알려졌던 작가를, 노년의 적적함과 책임, 태도의 윤리를 함께 품은 한 사람으로 새롭게 만나게 된다.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라는 제목이 드러내는 것

제목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피천득의 대표 수필 '인연' 속 한 구절에서 왔다. 그 문장은 만남의 낭만을 강조하기보다, 인연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미완의 끝맺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악수조차 나누지 못한 관계, 애초에 스쳐 지나갔어야 할 만남, 물러섬이 필요했던 순간들. 이 책은 그런 '인연의 그림자'를 통해, 피천득 문학이 품고 있는 사랑과 윤리의 이면을 비춘다.

피천득의 사랑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소유하려 들지 않고, 변화시키려 들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인내의 형식. 그 절제는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극적인 서사 대신, 사소한 일상과 관계의 미세한 결을 끝까지 붙잡아 기록하는 방식으로.

△'개인'을 알고 '개인'으로 살려 했던 20세기의 지식인

1910년에 태어나 2007년에 생을 마감한 피천득은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산업화를 통과한 20세기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구호보다 '개인의 감정과 일상'을 신뢰했다. 그의 산문은 마음을 위로하는 소박한 글이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개인'이 어떻게 사유되고 체현되었는지 보여 주는 드문 기록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단정하고 절제된 문장들은 한국 수필을 교양의 문학으로 끌어올린 이정표가 되었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정신'을 우아하게 전해 왔다.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그 정수를 한 권으로 다시 묶어, "늙지 않는 글"이 무엇인지를 증명한다.

△김지수 '인터뷰 해설', 텍스트 바깥의 인물을 다시 부르다

이번 판본의 또 다른 특징은 김지수 작가가 맡은 '인터뷰 해설'이다. 이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피천득의 삶과 글을 오늘의 독자가 다시 읽도록 돕는 확장된 비평이다. 딸에 가려져 있던 아들과의 관계, 작가의 가족으로서의 삶,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같은 질문을 따라가며, 피천득 산문을 '태도에 관한 문학'으로 다시 세운다. 독자는 텍스트 안팎에서 작가를 입체적으로 만나며, 피천득을 더 깊고 다르게 읽는 길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