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AI 혁신’… 첨단기술 넘어 ‘시민의 신뢰’를 짓다
①인공지능, 행정의 판을 바꾸다
민원 폭증과 한정된 행정 인력 사이
AI는 기술의 유행 아닌 ‘체력’ 문제
단순 반복 업무 줄여 판단 역할 집중
흩어진 데이터 연결 답변 시간 단축
싱가포르·두바이 해외사례로 보듯
도입보다 ‘안정적 운영’ 성과 거둬
‘AI 행정’ 기술보다 신뢰 쌓는 과정
무엇보다 보안·윤리 기반 운영돼야



"행정은 늘 바빴지만, 지금은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행정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지금 행정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짚는 표현에 가깝다. 민원은 해마다 늘고 내용은 더 복잡해지는데, 이를 처리하는 인력과 시간은 언제나 한정돼 있다. 여기에 인구 구조 변화, 복지 수요 증가, 재난과 안전 문제의 상시화까지 더해지면서 행정의 부담은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행정이 다루는 정보는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부서마다 시스템이 다르고, 규정과 지침, 과거 사례는 수많은 문서 속에 쌓여 있다. 시민은 "지금 당장 답을 듣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행정은 그 답을 만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필요한 정보를 찾는 데만도 시간이 걸리고, 관계 부서와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행정기관에서 'AI'가 화두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특정 도시만의 고민이 아니다. 전국 어느 행정기관이든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다. 늘어나는 민원과 한정된 역량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이 같은 현실 앞에서, 기존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 불편은 절차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
행정이 느끼는 부담과 시민이 느끼는 불편은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시민이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은 대개 비슷하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해야 할 때,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부터 막막할 때,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때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시민은 자연스럽게 "행정이 내 삶과 멀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신뢰의 문제로 이어진다. 행정이 복잡하고 느리다고 느끼는 순간, 시민은 행정을 믿기보다 피하려고 하게 된다. 반대로 행정이 시민의 질문을 빠르게 이해하고,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일관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행정은 시민에게 가까워지고, 신뢰는 조금씩 회복된다.
AI는 바로 이 '거리'를 줄이는 도구로 이해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기술을 하나 더 도입한다는 뜻이 아니라, 행정의 방식 자체를 시민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시 설계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AI를 쓴다.'가 아니라, '행정이 달라진다.'라는 체감이다.
◇ "왜 AI인가?"… 유행 아니라 행정 체력문제
AI 이야기가 나오면 일부에서는 "또 새로운 기술 유행 아니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행정 현장에서 AI는 유행이 아니라 '체력'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공무원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진다.
민원이 들어오면 내용을 정리하고 담당 부서를 나누는 일부터 시작한다. 공문서와 보고서 초안을 만들고, 관련 규정을 확인한다. 과거 사례를 찾아 정합성을 맞추고, 회의 내용을 요약해 후속 조치를 정리한다. 자료를 모으고 표를 만들고 문장을 다듬는 일도 반복된다. 이 모든 과정은 행정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공무원의 시간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만약 이 반복 업무의 상당 부분에서 AI가 '첫 번째 조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공무원은 단순 반복에서 조금 더 벗어나 판단과 조정, 책임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AI가 결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위한 준비 작업을 돕는 구조가 된다.
그래서 "AI는 기술자 영역이 아니라 누구나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공무원과 시민이 함께 체감하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AI 행정은 첨단 기술 도입이 아니라 행정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실무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 공공 AI, 이제는 내부 행정을 바꾸는 단계로
공공 AI는 처음부터 거대한 혁신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많은 행정기관이 상담 '챗봇'처럼 시민과 만나는 접점에서 출발했다. 24시간 응대할 수 있고, 기본적인 안내를 빠르게 제공하며, 반복 문의를 줄여주는 방식은 그 자체로 행정의 부담을 덜어준다.
하지만 최근 공공 AI의 흐름은 한 단계 더 깊어지고 있다. 단순히 '시민에게 답한다.'를 넘어, '행정이 답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바꾸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미 앞서 움직인 도시들은 AI를 상담 창구에만 묶어두지 않고, 행정 내부의 문서 작성과 규정 확인, 자료 정리 같은 업무까지 확장하고 있다.
행정 내부의 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시민을 위한 설명과 현장 확인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 AI를 민원 응대 도구로만 이해하면 효과는 제한적이다. 반대로 AI를 행정 내부의 준비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도구로 이해하면 시민이 체감하는 변화는 훨씬 커진다.
◇ 해외 사례가 말해주는 공통된 결론
해외 공공부문에서도 AI는 편의 기능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행정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싱가포르의 정부 챗봇 운영 사례는 공공 AI의 대표적인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시민 문의를 줄이고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데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챗봇 자체보다 그 뒤에 붙는 '운영'의 문제 때문이다. 어떤 질문을 어디까지 자동으로 응대할 것인지, 정책이 바뀌면 답변과 정보는 어떻게 업데이트할 것인지, 품질 관리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책임질 것인지가 결국 성패를 가른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공공 AI는 도입 자체가 아니라 관리와 개선 체계가 성과를 만든다는 뜻이다.
두바이 역시 통합 서비스 플랫폼과 AI를 활용해 시민이 민원과 생활 서비스에 더 쉽게 접근하도록 설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한 번에 해결'이라는 점이다. 시민은 부서의 경계를 모른다. 시민은 그저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결국 통합된 서비스와 AI는 그 경로를 짧게 만들어준다.
이런 흐름이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공공 AI는 시스템을 들여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행정의 업무 흐름을 재설계할 때 비로소 성과가 난다. 응답 속도와 정확도, 접근성처럼 시민이 체감하는 변화가 있어야 정책은 지지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안과 윤리, 책임의 틀을 함께 갖춰야 신뢰가 따라온다. 결국 AI 행정은 기술 프로젝트가 아니라 신뢰를 쌓는 과정이다.
◇ 흩어진 정보가 행정을 느리게 만든다
행정 현장에서 "데이터가 흩어져 있다."라는 말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선다는 지적이다. 이는 곧 업무 지연과 오류 가능성을 뜻하기도 한다. 민원이 들어왔을 때 해당 시민의 이전 민원 이력, 관련 부서의 처리 기준, 유사 사례, 적용할 수 있는 조례와 지침을 한눈에 확인하기 어렵다면 담당자는 다시 자료를 찾고 관계 부서에 문의해야 한다. 그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시민은 기다린다.
복지 분야에서는 필요한 정보가 제때 전달되지 않으면 사각지대가 생기고, 재난과 안전 분야에서는 정보가 뒤엉키면 대응의 우선순위가 흔들릴 수 있다. AI는 이런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흩어진 정보를 연결하고 정리하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
공공 AI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없는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정보를 더 빨리 찾아오고, 더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리해 주는 것이다. 공무원이 가장 먼저 체감하는 변화는 '답변을 대신해 주는 AI'가 아니라 '찾는 시간을 줄여주는 AI'다. 시민이 가장 먼저 체감하는 변화 역시 '똑똑한 말'이 아니라 '정확한 안내'다.
◇ 행정 변화는 도입이 아니라 작동에서 증명
AI 행정을 추진할 때 가장 흔한 실패는 '도입했지만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공공부문에서 AI는 민감한 정보를 다루고, 행정의 책임 구조 속에서 운용된다. 그래서 기술을 갖다 붙이기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AI가 어디에 쓰이고 어디에는 쓰이지 않는지, 누구의 책임 아래 어떤 절차로 활용되는지, 오류가 발생하면 어떻게 수정하고 알리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행정이 AI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결국 업무 흐름으로 결정된다. 민원 처리 과정에서 AI가 어디에서 요약과 분류를 돕는지, 문서 작성에서 어느 지점에서 초안과 문장 다듬기를 지원하는지, 규정 확인에서 어떤 지점에서 근거를 찾아주는지, 복지 상담에서 어디까지 안내하고 어디부터는 사람이 판단하는지. 이 구분이 명확할수록 공무원은 안심하고 활용할 수 있고, 시민은 이해할 수 있다.
공공 AI는 "도입했다."라는 사실로 평가받지 않는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굴러가는지,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되는지, 얼마나 시민의 경험을 바꾸는지로 평가받는다. 각 행정기관에 맞는 모델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런 작동의 기준을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 행정이 얻어야 할 것은 '절차'가아니라 '경험'
AI 행정의 목표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행정이 시민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시민은 행정을 절차로 기억하지만, 행정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경험이다. 민원인이 반복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 복지 정보가 내 상황에 맞게 안내되는 경험, 재난 문자와 안내가 더 정확해지는 경험, 공공데이터가 시민의 삶에 쓰이는 경험. 이 경험의 총합이 도시와 행정의 품격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빠름만이 아니다. 시민이 행정에 바라는 것은 빠른 답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다. 왜 이 부서가 담당인지, 어떤 근거로 이런 절차가 필요한지,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는지, 내가 추가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행정이 설명을 잘할수록 불신과 갈등은 줄고, 행정의 비용도 함께 줄어든다. AI가 행정을 시민 쪽으로 당긴다는 말은 결국 이 설명의 문턱을 낮춘다는 뜻이다.
◇"왜 지금 AI인가"에 대한 답
"AI 시대, 행정이 변해야 시민이 산다."라는 화두는 다시 묻는다. 왜 지금 AI인가? 답은 단순하다. 민원은 늘고, 인력은 한정돼 있으며, 정보는 흩어져 있다. 행정이 변하지 않으면 시민의 불편은 구조가 된다. 그래서 많은 행정기관이 AI를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답은 동시에 과제를 던진다. AI를 기술로만 이해하면 행정은 변하지 않는다. AI를 행정의 새 언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공무원에게는 업무 부담을 덜어주는 실무 도구로, 시민에게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이해하기 쉬운 서비스로 체감돼야 한다. 보안과 윤리, 책임의 틀 위에서 운영돼야 하고, 개선과 업데이트가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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