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 말라는 트럼프 발언... 최고 연구로 반박한 의학자들
영국·이탈리아·스웨덴 의학자들 국제공동연구로 반박
100만 이상 대상 연구 문헌 43편, 메타분석 17편 분석
최고 신뢰도 ‘황금 스탠더드 연구(최적표준리뷰)’ 시행
자폐·ADHD·지적장애와 아세트아미노펜은 무관 밝혀
연구진 “임신 중에도 안심하고 복용해도 된다” 권고

권위 있는 국제 의학학술지 랜싯(The Lancet) 계열의 여성의학 전문 학술지인 《랜싯 산부인과 및 여성 건강(he Lancet Obstetrics, Gynaecology, & Women's Health)》은 지난 1월 16일자에 의미심장한 논문을 한 편 실었다. '임신 중 파라세타몰 노출과 아동 신경 발달: 체계적 문헌 고찰 및 메타 분석(Prenatal paracetamol exposure and child neurodevelopment: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이라는 제목이다.
타이레놀 주성분 아세트아미노펜, 유럽에선 파라세타몰로 불러
논문 제목에 나온 '파라세타몰(paracetamol'은 한국에선 다소 생소한 용어다. 한국과 미국·캐나다·일본 등에서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이라는 성분명(일반명)으로 불리는 해열진통제를 가리킨다. 이 약은 타이레놀이라는 상품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타이레놀은 N-아세틸-파라-아미노페놀(N-acetyl-para-aminophenol)이라는 화학명에서 'tyl' 과 'enol'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코로나19 사태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이던 정은경 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해열진통제 복용을 권유하면서 이 브랜드명을 언급했을 정도로 해열진통제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이용된다.
해열진통제 시장에서 큰 몫을 점유하고 있는 아세트아미노펜과 아스피린은 여러 면에서 서로 비교된다. 아스피린은 해열진통과 함께 염증을 가라앉히는 소염과 피를 묽게 해서 잘 굳지 않게 하는 항응고 작용도 한다. 하지만 아세트아미노펜은 해열진통 작용만 하고 소염작용은 미미하며 항응고 작용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처럼 아스피린은 항응고 작용 때문에 출혈을 멈추는 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생리 중이거나 출혈이 의심되는 사람에겐 처방이나 복약을 권장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아스피린 대신 아세트아미노펜을 권유한다. 대신 아스피린은 장기적인 저용량 복용으로 혈전 생성을 막는 심혈관질환 예방약으로 처방되거나 이용된다.
아세트아미노펜, 부작용 적어 임신부에 아스피린 대용
부작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아스피린은 강한 산성으로 위장 장애를 가져올 수 있으며 과도하거나 장기적인 복용은 신장(콩팥) 기능 손상 우려가 있다. 심한 간 장애 환자에게도 사용하지 않도록 권장한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위장 장애나 신장 부담은 적지만 간에 부담을 줄 수 있어 음주자나 간질환자는 복용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 해열진통제는 독성과 부작용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의사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이른바 'OTC(Over-the-Counter) 제품', 즉 일반의약품이다. 이는 임신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미 안전성이 입증돼 오래전부터 임신부를 포함한 환자가 흔히 사용해온 아세트아미노펜이 아동 신경 발달에 영향을 주는지 아닌지를 왜 지금 시점에서 연구한 것일까. 그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임신부 타이레놀 복용 말라" 트럼프 발언에 과학적 연구로 반박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2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브랜드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타이레놀을 복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Taking Tylenol is not good)…(중략)…모든 임산부는 임신 중 이 약물 사용의 제한을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말라(Don't take Tylenol). 그래도 문제 될 게 없다(There's no downside)"고 잘라 말했다. 트럼프는 임신 중 이 의약품 복용이 너무 위험해서 행정부가 미국 의사들에게 임산부에 대한 사용을 피하라고 권고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의 이런 발언은 그동안 근거도 없이 자폐증이 일부 의약품이나 백신 등으로 유발된다고 줄기차게 발언해온 로버트 케네디 장관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케네디 장관은 백신회의론자로 취임 전부터 백신과 자폐증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발언을 계속해온 것은 물론, 아세트아미노펜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항암제 독성 완화 용도의 해독제인 화이저의 류코보린(Leukovorin) 주사제를 자폐 치료제로 허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러한 발언은 비과학적이고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 의학계의 반발을 불렀다.
연구팀은 트럼프·케네디의 발언과 이에 따른 논란, 의학계의 반발을 콕 집어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대신 '임신 중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 복용이 태아의 신경발달, 특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구의 배경으로 지목했다. 이러한 논란과 우려 때문에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노출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ADHD), 지적장애와 연관이 있는 지를 조사하기 위해 기존 연구를 종합해 살펴봤다고 밝혔다.
영국과 남유럽·북유럽 산부인과와 아동의학 연구기관 참여
이 국제 공동 연구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다양한 의대와 병원, 그리고 연구소가 참가했다. 범유럽적으로 이뤄진 이 연구에선 영국 런던의 세인트조지 대학병원 산부인과·태아의학과의 아스마 칼릴 교수가 교신저자로서 연구 책임을 맡았다. 이탈리아 키에티대 태아관리·고위험 임신센터의 프란체스코 단토니오 박사와 이탈리아 페라라대 환경 및 예방과학학과의 마리아 엘레나 플라코 박사가 공동 제1저자를 맡았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볼로냐대 의대, 스웨덴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여성 및 아동건강부와 카롤린스카 대학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아동병원, 노르웨이 오슬로대 바이오재료학과 기능성 조직 재건센터 등도 참가했다.
43개 문헌 고찰과 17개 메타분석 '골드 스탠더드 리뷰' 동원
연구팀은 43개의 문헌으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을 했으며, 17개의 연구를 바탕으로 메타분석(Meta-analysis)을 했다. 메타분석은 특정 주제에 대한 여러 선행 연구에서 나타난 여러 데이터와 연구결과를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해 하나의 통합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통계적인 연구기법이다. 이는 개별 연구의 한계를 넘어 더욱 높은 통계적 검정력으로 정확도와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연구방법이며, 현대의학의 골수를 형성하는 '근거 중심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의 핵심이다.
메타분석에다 체계적인 문헌고찰을 결합한 연구방법론을 학계에서는 '골드 스탠더드 리뷰(Gold standard review·최적표준 리뷰)'라고 부른다. 이는 해당 분야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고 정확하다고 인정받는 최고의 고찰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명확하고 재현 가능한 방법으로 검색·선정·평가해 편향(bias)을 최소화한다. 이 때문에 객관성과 정확성, 신뢰성이 높아 의학·보건학을 중심으로 학술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100만명 이상 분석 결과, 아세트아미노펜은 자폐·ADHD 등과 무관 확인

이러한 연구를 통해 연구진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은 18세 미만 아동 26만2852명, ADHD 진단을 받은 아동 33만5255명, 지적장애 진단을 받은 아동 40만6681명을 대상으로 한 기존 연구논문 43편을 분석했다. 대상자는 100만명을 넘는다. 그 결과 임신 중 아세트아미노펜 복용과 자폐 스펙트럼 장애, ADHD, 지적 장애 사이에는 아무런 통계적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임신 중 임신부의 아세트아미노펜 복용이 태아의 자폐증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대신 가족력과 유전적 요인, 특히 자폐증 특성이 같은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경향 등이 자폐증 발병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또 임신 중 여성이 아세트아미노펜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게 하는 질환 자체가 태아의 신경발달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연구를 주도한 킬릴 교수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은 지시대로 복용한다면 임신 중에도 안전한 선택지"라며 "안심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채인택 의학 저널리스트 (tzschaeit@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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