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나에게 새긴 지도

박동식 작가 2026. 1. 2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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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식 작가

다행이다, 아직 있구나.

눈으로 찜해놓은 몇 권의 동화책과 위인전이 새 주인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늘도 안도한다. 이런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쓰는 일이 막막할 때가 있다. 이야기는 서로 엉킨 칡과 등나무처럼 풀리지 않는다. 제대로 꿰지 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찌르는 바늘 끝처럼 문장은 갈팡질팡한다. 막막함이 가슴을 죄어오면 여기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는다. 빠른 걸음으로 5분 남짓이면 충분한 골목을 오후 내 기웃거린다.

오래 잊었던 책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에 펼쳐 보면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희한하게 ‘읽은 나’가 ‘총천연색’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 올 때마다 내가 새 주인이 될지를 고민하게 하는 저 책들도 그랬다.

40여 년 전에는 아동문학, 위인전 등의 전집을 판매하는 외판원이 골목을 돌아다녔다. 방학 첫날이면, 으레 우리 집 나무 마루에는 카탈로그가 널렸다. 외판원 아저씨의 현란한 홍보가 끝나면 어머니는 그중 하나를 꼬깃꼬깃한 비상금을 탈탈 털어 사주셨다. 그리고 실패해선 안 되는 임무를 명령하는 사령관처럼 비장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보름 안에는 교환이 돼. 그때까지 깨끗하게 읽고 다른 전집으로 바꾸자.”

모자의 합동작전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원체 책을 좋아하니까 그런 임무를 주셨다고 한다. 난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책을 읽는 게 점점 좋아졌다고 기억한다.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법. 책방골목에서, 40년 전 책들을 발견하고 두 번 놀랐다. 아직 이 책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에.

색 바랜 표지를 보자마자 매캐한 모기향에 눈을 깜박이며 책을 읽던 여름밤이 떠올랐다. 뒷면에 적힌 ‘-하였읍니다’를 보고는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둔 아버지의 뜨거운 ‘스뎅’ 밥그릇 옆에 앉아 책을 읽던 후끈한 겨울이 생각났다.

내가 책을 펼쳐 볼 때, 책도 나를 펼쳐 보여주었다. 각기 다른 시공간의 ‘읽은 나’를 만나다 어느 순간 이렇게 중얼거린다. 막막해도 어쩌겠어, 더 헤매는 수밖에. 책방골목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대개 진취적 체념 상태가 된다. ‘읽고 쓰다’와 ‘행복하다’ 사이에 단단한 길이 이어진 마음의 지도를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의 지도는 누명 쓴 형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간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석호필의 문신을 닮았다. 감옥 설계도를 온몸에 새긴 문신은 그에게 선명하게 말해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세밑에 사람들을 만나면 AI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인간다움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쓸모가 한없이 낮아질 거라는 묵시록을 내놓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건전지가 된 인간처럼 말이다. 우리 직업은 얼마나 빠르게 대체될까, 아이들이 가질 직업이 남아있기나 할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이어지다 한숨으로 대화의 끝을 맺었다. 만나는 모든 이가 안갯속을 헤매는 막막함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우리가 주인공 배역을 손에서 놓지는 않은 것 같아서. 막막함은 주인공이라는 증거니까.

자욱한 안개 속에 할루시네이션(환각) 등대와 이정표가 사방에서 깜박거린다. 분주한 뜀박질 소리가 요란하다. 그 와중에도 귀를 기울이면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무얼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한지 되뇌는 속삭임들이다.

석호필이 자기 자신을 지도 삼았듯, 나도 내 마음의 지도를 무시로 들여다볼 수 있는 손거울을 하나 들고 안개 속을 걸어가 볼 참이다. 읽고 쓸 때 가장 행복한데 어쩔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뛰건 걷건 멈춰 섰건, 시계(視界) 제로의 안개 속에서 서로의 인기척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짧은 눈인사라도 건네는 우리이기를. 지도는 달라도, 길을 찾는다는 사실만은 같은 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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