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인만 34명 수몰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역사 재조명될까
전쟁 시기 노동력 동원 일환으로 조선인 ‘모집’돼
한일정상 회담 ‘물꼬’…유해 발굴 등 갈 길 멀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가 최근 한일정상 회담에서 주목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과거사 문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낼 수 있어 뜻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136명, 일본인 47명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로 숨졌다. 경남 출신 34명도 이 아픔의 역사에 포함해 있다.
'감옥'이었던 조세이 탄광
1942년 2월 3일 오전,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해안가에서 대규모 해저탄광 수몰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지 두 달쯤 지난 시기였다. 갱도 천장이 무너지면서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이때 수장된 광부 183명 중 136명이 조선인이었다. 사고 수습과 규명이 필요했지만 다음날인 4일 자 아사히신문 야마구치판 보도를 끝으로 참극은 빠르게 묻혔다. 그 언론 보도마저도 '입갱자 대부분은 구출하였으나 여전히 잔류자 약간명의 생사는 불명이며 원인, 피해상황 등은 조사 중'이라는 거짓으로 진실을 감췄다. 탄광회사도 갱도를 막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일본 광산감독국 자료도 사라졌다. 진실은 그대로 영원히 바닷속에 묻히는 듯했다.

"간혹 '물이 터졌다'며 안쪽에서 사람들이 본선 쪽으로 왕창 도망쳐 오는 거예요. '천정이 무너져서 물이 터졌다'며 도구고 뭐고 내팽개치고서. 저도 영문을 모르니 함께 도망칠 수밖에요. 그리고서 갱 밖으로 나왔더니요, 세상에 마구 때리는 거예요. (중략) 그리고는 '이 집 한번 봐라. 이 천정보다도 훨씬 튼튼하게 만들었으니 절대 걱정 마'라고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당했어요. 뭐 도망쳐 갱 밖으로 나와도 매만 맞아버리니."
수몰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경북 출신 이종천 씨는 여러 차례 '전조 증상'을 증언했다. 누수사고가 잇따라 발생했지만 가혹했던 노무관리 탓에 작업은 계속됐다.
결정적으로 조세이 탄광은 붕괴가 예상돼 채탄이 금지된 지역이었다. 해저에다 갱도가 얕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버팀목을 지나치게 제거해 결국 갱도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조선인 노동자에게 조세이 탄광은 도망칠 수 없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역사
일본 야마구치현 탄광지대인 우베탄전에 포함된 조세이 탄광은 수몰 사고 직전인 1941년 출탄량이 정점을 찍었다. 당시 우베 해저탄광 3위 규모일 정도였다. 급성장 발판은 전시기 노동력 동원이었다. 그 중심에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당시 조세이 탄광 측은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많은 조선인 동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세이 탄광은 '조선탄광'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조세이 탄광 측이 모집 형태로 실제 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는 1258명으로 파악된다. 66.1%(831명)는 경상북도 출신이다. 참사 때 희생된 경북 출신 노동자가 많은 배경이다.
경남 출신 노동자 피해도 컸다.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때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136명 중 34명은 경남(당시 부산 포함) 출신으로 밝혀졌다. 희생자 명부에서 경남 출신을 분석한 결과, 고성 14명·사천 11명·부산 2명·선녕(옛 지명) 2명·김해 1명·영천(옛 지명) 1명·울산 1명·진주 1명·합천 1명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문제 조사와 연구에 집중해온 허광무 박사는 2007년 논문 <전쟁시기 조세이 탄광과 조선인 노무동원>에서 "1939년 당시 조선에는 1938년에 이어 한해(가뭄 재해)가 극심해 농가경제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며 "송출지역은 한해 피해지로 판단되며, 농가경제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농가 노동력이 '모집'에 응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추정했다.
조선인 노동자는 현금으로 임금을 받지도 못했다. 생존자들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둔 것이라고 증언했다. 가족을 동반한 광부 사택과 독신 광부 기숙사는 성인 키 약 3배 높이(약 3m 30㎝) 울타리로 출입이 통제됐다. 울타리 위에는 전선 같은 줄이 설치됐다. 생존자 이종천 씨는 누군가 건드리면 초인종이 울리도록 고안된 '탈출 감시용 장비'라고 증언했다.

남은 과제
1991년 일본 현지에서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水非常)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결성됐다. 이들은 참사 실체 규명과 희생자 추모 활동에 집중했다. 지난해 8월 두개골을 포함한 인골 4점을 해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새기는 모임' 공이 컸다. 이들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자금을 확보해 유골 수습 잠수 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음 달에도 추가 수색이 예정됐다.
일본 정부는 그간 조세이 탄광 유골 수습 지원을 관망해왔다. 2004년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조선인 유골 반환에 합의했지만, 조세이 탄광만큼은 조사 안정성 등 이유로 논외였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DNA 감정에 협조하기로 하면서 유골 수습 등 작업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양심적인 일본 시민사회 노력으로 진상 규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양새다. 그러나 경남 출신을 포함한 희생자 유해를 찾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추가 발굴뿐만 아니라 DNA 확보, 유족 판명 등 남은 일이 많다.
2024년 12월 기준 유족이 판명된 경남 출신 희생자는 12명뿐이다. 대조 DNA를 채취한 사례도 8명에 그친다. 어렵게 유해를 발굴해도 '미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지자체 추가 노력이 요구된다.
이밖에 경남 출신 피해자 강제동원 경로를 파악하고 피해 사실을 지역사 자료로 구축할 필요도 제기된다.
/최환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