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꺼지고 '태양' 켜졌다, 태안의 '반전' 드라마
태안화력 부지, 재생에너지 복합단지로 전환
주민이 주인 되는 이익공유형 전환 모델 구축
지속가능한 전환, 협력과 제도개선이 관건

[지데일리] 기후위기의 경고음이 높아질수록 석탄의 그림자는 짙어졌다. 탄소가 만든 번영의 시대는 끝나가고, 이제 에너지의 지형은 ‘탈탄소’와 ‘지속가능성’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산업의 심장이었던 발전소 굴뚝이 멈추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폐쇄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첫 번째 실험이 된다.
대한민국 서해안의 작은 도시, 충남 태안. 그곳은 오랫동안 석탄화력발전의 상징이었다. 수십 년간 산업 발전의 불을 지켜온 태안화력발전소가 이제 새로운 전환의 중심에 섰다.
한국서부발전은 이곳의 노후 석탄발전 부지를 단순히 철거하는 대신, 청정에너지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에너지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석탄의 유산 위에 태양과 바람, 수소의 미래를 얹으려는 시도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지역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에너지 전환력’을 시험하는 국가적 실험이며,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과 지역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묻는 사회적 실천이다. 그 실험대의 이름은 바로 ‘태안 청정에너지 개발단지’다.
석탄의 도시, 푸른 전환을 준비하다
지난 12일, 한국서부발전은 태안 본사에서 ‘청정에너지 개발단지 전환방안 검토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중심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석탄화력의 끝에, 새로운 산업의 시작을 세운다.’
태안화력발전소는 1980년대 후반 착공 이후 대한민국 전력 수급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2050년 탄소중립 선언 이후, 전국 59기의 석탄화력 중 절반 이상이 폐쇄 수순에 돌입하면서 태안 역시 그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이정복 서부발전 사장은 “태안 발전소의 전환은 단순히 부지 활용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산업 전환의 공존 문제”라며 “석탄 이후의 새로운 지속가능 성장 구조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이번 검토회의는 단순한 기술 검토를 넘어 산업·사회·환경을 포괄하는 전환 전략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핵심 의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기존 석탄 설비의 활용 가치 재평가. 둘째, 태안 전체를 아우르는 청정에너지 클러스터 구축. 셋째, 주민 참여형 경제 구조를 통한 상생 비전 수립.
서부발전은 전환의 핵심 가치로 "공존과 회복”을 내세웠다. 석탄의 시대가 끝나더라도, 그것이 지역의 몰락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확신에서다.
산업의 유산이 에너지원이 된다
태안 발전소 부지는 넓이만 약 416만㎡에 달한다. 이 부지에는 송전선, 냉각수 시스템, 항만 물류시설 등 대규모 인프라가 집약되어 있다. 바로 이 인프라가 ‘청정에너지 전환’의 밑그림을 가능하게 만든다.
서부발전은 이 기반 위에 태양광, 풍력, 수소, 연료전지 등 다양한 재생에너지원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복합 에너지 단지’를 구상 중이다. 발전소 동쪽 부지에는 대용량 ESS(에너지저장장치)를 설치하고, 서쪽 항만지역은 해상풍력 기자재의 물류 거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기존의 석탄보일러동은 그린수소를 생산하고 저장하는 기지로 개조될 전망이다. 과거 ‘배출의 심장’이던 공간이 이제는 ‘흡수의 심장’으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냉각수용지 일부는 수열에너지 활용기지로 개발해 수송용 수소충전 네트워크와 연계할 계획도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단순히 친환경 발전소 건설을 넘어, ‘순환형 에너지 도시’ 모델을 제시한다. 산업 구조를 바꾸되 기존 자원을 버리지 않고 재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속가능한 전환의 철학이다.
주민이 만든 에너지, 주민이 나누는 소득
태안의 청정에너지 단지는 또 하나의 실험을 담고 있다. 바로 ‘이익공유형 에너지 모델’이다. 서부발전은 재생에너지 사업 수익을 지역 주민과 나누는 구조를 도입한다. 발전소 폐쇄로 인한 경제 공백을 최소화하면서, 주민이 전환의 수혜자가 아닌 ‘공동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 단지 건설 시 지역 주민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직접 투자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가 대표적이다. 마을 단위로 ‘햇빛소득’과 ‘바람소득’을 창출해 지방정부의 세수 감소를 보완하고, 주민 생활 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다.
이익공유형 사업은 이미 유럽 일부 국가에서 효과가 입증된 모델이다. 덴마크의 미델그룬덴 해상풍력단지는 지역 주민 8500여 명이 공동 출자해 운영하며, 지역 회의체가 직접 정책 방향에 참여한다. 서부발전은 태안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도입하려 한다.
이를 통해 단순한 에너지 산업이 아닌 ‘지역 자체 성장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환의 공간, 산업의 상징을 바꾸다
태안의 굴뚝은 오랫동안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청정의 상징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태안은 충남 서해안의 산업 중심지를 넘어, 환경·에너지·관광을 결합한 복합 생태도시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청정에너지 단지는 향후 친환경 교육센터, 체험관, 재생에너지 시뮬레이션 시설, 에너지 스타트업 캠퍼스와 같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확장될 방침이다. 즉, ‘에너지를 생산하는 도시’에서 ‘에너지를 배워가는 도시’로 진화하는 그림이다.
이 전략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면 태안은 한국형 ‘에너지 순환경제 도시’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획득할 수 있다. 산업단지가 지역문화와 연결될 때, 발전소는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공존형 생태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넘어야 할 네 개의 언덕
그러나 길은 쉽지 않다. 전환 과정에는 네 가지 핵심 과제가 자리한다.
먼저 송전계통 확보 문제다. 재생에너지는 지역에서 생산되지만, 수요지는 도시권에 몰려 있다. 송전선로 확충과 신재생 전력망 연결이 늦어지면 생산된 전력이 제때 수송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다음으로 인허가 체계의 복잡성이다. 태양광, 풍력, 수소 등 각 사업의 인허가 절차가 부처별로 분리돼 있어, 실제 전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불어 지역 주민의 수용성이다. 풍력단지 건설 시 소음과 경관 훼손 문제가 불거질 수 있고, 사업 이익의 배분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주민 동의 없는 전환은 지속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지속가능한 재원 구조다. 초기 투자금 대부분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부담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민간 자본과 사회적 투자 구조를 끌어들여야 진정한 자립형 모델이 완성된다.
서부발전은 이러한 과제 해결을 위해 지자체·산업부·충남도·태안군이 참여하는 협의체와 공청회 체계를 구축해 단계적 전환을 설계하고 있다.
환경복원, 전환의 또 다른 축
태안의 전환은 단순한 기술 프로젝트를 넘어 ‘환경 복원 프로젝트’의 의미도 지닌다. 오랜 기간 석탄재와 온배수 배출로 훼손된 해양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병행된다.
서부발전은 발전소 인근 해안 일대를 대상으로 ‘해양 생태 그린벨트’ 조성을 검토 중이다. 폐석탄재 매립장을 복원해 습지형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고, 이를 관광·교육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향이다.
또한 지역 주민이 조성·관리 과정에 참여해 복원 사업이 새로운 일자리로 이어지도록 할 계획이다. 과거 산업이 상처를 남겼다면, 이번 전환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첫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이 과정은 단순한 미관 개선이나 환경보전의 차원을 넘어, ‘생태 회복 기반의 경제 구조 전환’이라는 지속가능발전 원칙을 실천하는 모델이 된다.
세계가 주목하는 태안 모델
태안의 전환은 국내 차원을 넘어 국제 사회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유럽은 이미 탈석탄 지역의 산업 전환 경험을 가진 대표 사례들로 인정받는다. 독일 루르 지역이 대표적이다. 탄광이 사라진 자리에 미디어기업과 테크 스타트업이 몰려들었고, 산업유산을 관광자산으로 바꿨다.
한국서부발전은 이러한 글로벌 사례를 벤치마킹하면서 태안형 전환모델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산업 전환뿐 아니라 문화, 교육, 사회적 가치 창출을 아우르는 모델이다.
이 모델이 성공하면 향후 보령, 삼천포, 당진 등 전국의 화력발전 지역에도 ‘태안식 청정전환’이 확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곧 한국형 ‘포스트 석탄 전략’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에너지 전환, 사회 시스템을 다시 묻다
결국 이번 프로젝트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다. 석탄에서 청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단순히 발전 기술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의 삶과 산업, 공동체의 관계를 새로 짜는 일이다.
이정복 사장은 “전환의 본질은 공존에 있다.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지역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며, 태안이 청정에너지의 성공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단지 기업인의 수사학이 아니다. 실제로 에너지 전환은 도시의 구조와 사람의 일상을 바꾸는 ‘사회 재구성 과정’이다. 전력망은 바뀌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사람들의 태도다.
앞으로 태안 청정에너지 개발단지가 마주할 가장 큰 도전은 세 가지다. 우선 제도적 속도다. 에너지 전환 정책이 정치적 논의에 갇히지 않고 실질적 실행력을 확보해야 한다.
다음으로 주민 중심 거버넌스 구축이다. 기업·지자체·시민이 함께 설계하고 평가하는 구조가 정착돼야 한다. 더불어 차세대 일자리 창출이다. 단순한 발전소 전환이 아니라, 청년이 머물 수 있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태안의 과거가 ‘화력의 도시’였다면, 미래는 ‘청정의 도시’, ‘공존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 석탄의 불빛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태양과 바람의 에너지가 피어나고, 산업의 공회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화한다.
태안의 실험은 한국이 기후위기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에너지 전환은 결국 인간과 땅, 공동체의 관계를 새롭게 짓는 일이다.
석탄의 잿빛 굴뚝이 멈춘 자리에서, 깨끗한 풍력이 돌아가고 태양광이 빛나며 지역 아이들이 생태 체험을 하는 하루가온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은 멈춘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