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광장] 역사도시 라이벌 공주와 경주의 발전역량

고구려가 남진하자 공주와 경주는 나제동맹의 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광개토대왕의 북진정책이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다급해진 두 나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국가적 위기인 나제동맹 이전에 백제와 신라는 부족연합체를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475년 장수왕은 한성을 침략해 개로왕을 살해했다. 백제는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웅진으로 천도했다. 금강시대의 개막이후 100여 년을 보내며 남진정책이 완화되고 무령왕이 집권하자 백제가 부활했다. 6세기 중반 나제동맹이 와해되자 공주와 경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백제 중흥을 추구한 성왕이 충북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진흥왕에게 피살당한 일이 결정적이다.
금강 상류 웅진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조운에 유리한 사비로 천도했다. 백제의 관문이 웅진 곰나루에서 사비 구드레나루로 전환되었다. 요즘은 두 도시 중간에 고속철도 역사를 배치했다. 물길과 철도 모두에서 광역권이라는 의미다. 유네스코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가 공주와 부여 및 익산을 포괄한 것도 유사하다. 이러한 연계는 인구증가나 호족연합을 반영한 결과이다. 부여 아래 강경포구에는 평야지대인 익산 왕궁리를 무대삼아 젓갈을 유통한 상권이 성업중이다.
통일신라가 출범하며 경주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체제에서 공주에는 웅천주가 설치되었다. 퇴조한 금강 수계 도시를 대신해 대당무역에 유리한 완도나 영산강 수계 나주가 각광을 받았다. 새로운 요충지는 해상왕 장보고의 무역과 고려태조 왕건의 호족연합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후백제가 몰락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는 영남과 충청을 연결하는 동쪽의 육상교통이 강화되었다.
공주와 경주의 경쟁구도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변화했다. 영남을 연결하는 죽령너머 충주에서 신립이 패전한 반면에 호남을 기반삼아 이순신이 승전하자 차령산맥 이남인 공주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1602년에는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했다. 이러한 변화는 차령 이남을 경계한 고려와 달리 조선이 왕조의 뿌리 전주를 중시한 일과도 관련이 있다. 해운의 전성기가 도래하자 물산이 풍부한 호남이 영남보다 각광받게 되었다.
20세기에 등장한 현대적 교통망 덕분에 대구와 대전이 비상했다. 인접도시인 경주와 공주는 공동화가 촉진되었다. 두 도시는 문화도시로 라이벌 관계지만 상대적 위축현상은 심각하다. 산업화 초기에 발굴된 천마총과 무령왕릉이 중·고교 수학여행 특수를 촉발했지만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공주는 세종시 후광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명문고는 물론 교사양성의 산실 공주대와 공주교대도 약화되었다. 충남대와 공주대 통합 구상은 지역의 위협요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공산성이 장벽 역할을 수행하는 공주는 부소산성에 의존한 부여와 마찬가지로 협소한 지형이다. 도시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에 미흡하다. 다만 문화유산에 대한 시민의 만족도와 자부심은 재도약을 담보할 단서이다.
경주는 보문관광단지와 더불어 울산과 포항의 배후산업단지가 기회요인이다. 지역침체를 만회하려고 방폐장도 유치했다. 하지만 지역 대학인 경주대와 위덕대 및 동국대 WISE캠퍼스는 고전중이다. 명문고가 퇴조하며 교육중심지 역할도 약화되었다. 경주는 개방적인 벌판이지만 동남권에 치우친 자연지리가 활성화의 제약요인이다.
두 도시는 한국 고대사를 지탱한 기둥이다. 아늑한 금강변 공주가 섬세한 여성미를 자랑한다면 벌판이 둘러싼 경주는 야성적 남성미를 분출한다. 공주가 백제의 패기와 무령왕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면, 경주는 신라의 영화와 삼국통일의 기상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보완적 매력을 지닌 곳이다. 공주와 경주의 발전역량을 결집한 성과의 창출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