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완릉 이야기] 27. 조선왕릉 인조의 장릉

인조는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선조 28년 1595년 임진왜란 때 피란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 능양도정이 되었으며 이후 능양군에 봉해졌다.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綾陽君)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仁烈王后)와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의 정비이자 조강지처인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의 소생으로 17세의 나이로 능양군과 혼인하였고, 소생으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생산하였고, 1635년 7번째 자식을 낳다가 산욕(産褥)으로 사망하였다. 인열왕후 사망 3년 후인 1638년 간택된 계비가 장렬왕후이다.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보다도 5살 어렸다. 장렬왕후는 인조 승하 후에 자의대비(慈懿大妃)로 불렸는데, 효종이 승하한 뒤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예(禮)에 관한 쟁송(爭訟)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조선 역사상 가장 격하게 논쟁이 된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광해군과 북인(北人) 정권의 극단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능양군은 1623년 서인(西人)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과 '반정(反正)'을 일으킨 뒤 이복형 광해군을 폐위하고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들을 죽였다는 '폐모살제(廢母殺第)'였다. 능양군 인조는 즉위 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부상하는 시대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기도 하였다. 내적으로는 즉위한 뒤 정국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공신록에 불만을 품은 반정 공신 '이괄'이 난을 일으키는 혼란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두 번의 큰 전쟁으로 국력 소진과 수난을 겪었다. 인조 5년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고,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화친으로 끝났지만, 9년 후 병자호란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고 두 달을 버티며 항쟁했지만 한강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항복례를 올리는 최악의 굴욕을 당하였다.


인조 13년 1635년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파주 문산읍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준비하였다. 인조는 1649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승하하였다. 14년 전 미리 수릉(壽陵)을 준비해 두었기에 승하 후 신속하고도 논쟁 없이 파주 문산읍 운천리로 결정하였다. 택지 과정에 대사헌 조익이 터가 좋지 않다고 차자를 올렸지만, 문제가 없다며 운천 2리로 결정한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풍수에서 충렴(蟲廉)이라 불리는 뱀과 벌레가 자주 출범하고, 벌레들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變)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0세 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후손을 얻지 못했던 영조가 초장 82년 후인 영조 7년 고조부 능인 장릉을 현재 자리인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천릉하였다. 충렴은 천릉의 명분이고, 실제는 아들 못 낳는 것도 조상 무덤 탓으로 돌리려는 영조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천릉 4년 후 영조가 사도세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인조 장릉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이다. 옛 장릉의 석물과 천릉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장릉(長陵) 국세도를 보면 왕릉이 있는 땅의 세는 현무봉까지 힘차게 달려왔으며, 형(形)은 그치고 기(氣)가 멈추어 기운이 모이는 땅이다. 세래형지(勢來形止)의 조건에 부합하고, 능까지 태식잉육의 절차를 갖추면서 현무수두(玄武垂頭)도 형태가 나타난다. 청룡은 능에서 재실까지는 꿈틀거리며 혈장을 보호하고 응축하는 역할이 아주 좋지만, 재실을 분기점으로 또 다른 청룡맥이 매표소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밖으로 돌아앉아 버리는 아쉬움이 있다. 백호는 혈장을 보호하고 준거(蹲踞)의 형태로 회전하면서 환포(環抱)한다. 외청룡이 안산 역할을 하나 갈현초등학교를 지나 갈현리 마을을 곧장 뻗어 장릉을 완전히 감싸지 않아 다소 부족하다. 수세는 수구 쪽 관쇄(關鎖)는 강하며, 왕릉은 산과 물의 음양 조화가 되는 터이다. 장릉은 내청룡의 일부 배역(背逆), '산래수회(山來水回)'의 미비 등의 부족함도 보이지만 왕릉의 자리가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의 전후(戰後) 복구는커녕 아버지 정원군과 어머니 묘를 옮기고 원으로 추승, 또 천원, 추존하는 등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민심 이반과 국력 소실이 너무 컸다. 인조는 선조와 함께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군주라 불린다. 병자호란 때의 유약한 처신과 약한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에 자기만의 틀에 갇힌다. 열등감으로 인해 세자 소현세자를 죽게 하고,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자신의 독살 혐의로 폐서인시킨 후 사사(賜死)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