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푸름의 결, 한국과 유럽이 만나다

전남일보 2026. 1. 1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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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파랑을 다루는 두 개의 시선-한국과 오스트리아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국립무형유산원 특별기획전.

느림의 결, 파랑을 다루는 한국(나주)적 방식

국립무형유산원 특별기획전 '푸름의 대화: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쪽빛' 이 주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 및 구타우 염색박물관과의 협력 아래 지난해 12월 16일부터 올해 3월 22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기획전시실(전주시)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쪽염과 오스트리아의 인디고 염색 블라우드루크(Blaudruck)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블라우드루크는 지난 2018년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 등 유럽 5개국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공동 등재하였다. 인디고는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염료이다.

화학적 작동원리는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크게 다르지 않다. 쪽풀에서 추출한 인디칸이라는 무색의 유기 화합물이 발효를 거쳐 분해되고 환원과 산화를 통해 염색 가능한 상태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과학적 기반이다.

하지만 두 전통이 만들어내는 파랑은 놀랄 만큼 다르다. 하나는 겹겹이 스며든 깊이와 여운을 남기는 데 반해, 다른 하나는 명확한 문양과 반복 가능한 정형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흔히 자연염색과 공업염색, 혹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다. 한국 쪽염에서 발효와 환원은 단지 색을 얻기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다. 파랑이 스스로 드러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유예의 장치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염색해야 하는 겹염이 단지 색을 진하게 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이다. 매번 다른 상태의 파랑을 겹치며 시간의 층위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이때 파랑은 결과물이 아니라 시간의 내력과 장인의 공력으로 존재의 정당성을 얻는다.

이에 비해 오스트리아 블라우드루크 전통에서는 시간을 안정적인 재현을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방염을 사용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염(防染)은 염료가 스며드는 것을 막는 약을 풀에 섞어 무늬를 찍은 뒤 천을 염색하여 무늬를 만드는 날염을 말한다. 즉, 방염 인쇄는 형태를 명확히 남기기 위한 장치이며 염색은 그 형태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 기능한다.

파랑의 변화보다는 문양의 동일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느림의 결(Neurim-gyeol)' 즉 'Slow Grain'과 정형의 결(Formal Grain)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느림의 결은 결과와 과정을 모두 포섭하고 정형의 결은 결과가 중시된다. 복잡한 문제는 논문이나 학술서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핵심만 말한다. 느림의 결은 느린 속도를 미덕으로 삼는 태도가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미세한 차이를 보존하며 실행을 지속시키는 작동원리를 가리킨다.

'느림'은 '느리다'의 명사형으로 너그럽다. 느릿느릿하다, 느슨하다, 완만하다, 천천히 하다 등의 뜻과 동시에 더디다, 늦다, 둔하다, 무겁다, 헐겁다 등 많은 의미를 포획할 수 있는 낱말이다. '결'은 성품이나 바탕의 상태라는 뜻으로 숨결, 물결, 소리결, 바람결, 살결, 피부결 등 아우라가 넓은 용어다. 나는 이를 일본의 와비사비(侘び寂び)에 견줄 수 있고 결과와 과정까지 포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착안하였다.

한국 쪽염뿐 아니라 시김새와 나툼새로 표현할 수 있는 한국의 음악, 붓의 결과 먹의 결을 중요하게 다루는 민화를 포함한 한국회화, 그리고 발효를 중심으로 한 생활문화 전반에 공통적으로 작동해 온 시간 감각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흔히 느리게 살기 등으로 단순화하여 표현하지만, 한국 미학의 시간을 다루는 고유한 방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컨대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한국적인 독특한 결이 있을 때, "아, 저것은 한국 것이야"라고 느낄 때 즉, K-컬처의 토대를 설명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립무형유산원 특별기획전.

정형의 결, 파랑을 다루는 오스트리아 인디고의 방식

한국 쪽염과 오스트리아 인디고 염색의 비교는 전통의 우열이나 정통성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두 전통은 동일한 화학적 기반을 공유하며 모두 장인적 숙련과 오랜 전승을 통해 발전해 왔다. 어느 쪽이 더 자연적인가 혹은 더 예술적인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색과 시간이 어떻게 조직되는가 즉, 어떤 작동원리가 염색의 공정을 지배하는가에 있다. 방염 인쇄로 대표되는 블라우드루크 전통은 결과의 명확성, 반복 가능성, 재현성을 중심으로 시간을 조직하는 미학적 태도가 도드라진다. 밀랍이나 특수한 방염제를 사용해 문양을 먼저 찍어내고 이후 인디고 염액에 담가 배경을 염색한다. 이 공정에서 색은 주체가 아니라 문양을 드러내기 위한 장(Field)으로 기능한다.

공정의 각 단계는 명확한 목적과 종료 지점을 가진다. 동일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재현할 수 있도록 조건이 표준화된다. 환원과 산화는 염색이 가능할 정도로만 수행되며 그 이상의 변동성은 최소화된다. 이 구조에서 강조되는 것은 색의 미세한 변화가 아니라 형태의 동일성이나 문양의 아름다움이다.

파랑이 그 자체로 변주되기보다는 문양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배경으로 기능한다. 매번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동일한 결과가 다시 나타나고 시간이 축적되기보다는 하나의 성공적인 결과를 향해 수렴된다.

여기서의 숙련이란 변화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능력이라기보다는 변화를 최소화하는 능력이다. 공동체적 신뢰, 교환 가능성, 전통의 안정적 계승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다.
국립무형유산원 특별기획전.

남도인문학팁

느림의 결, 정형의 결, 현현(나툼새)의 시간 가로지르기

느림의 결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해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정형의 결과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적 사유방식과 서구적 사유방식에 대한 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동일한 쪽물 염색으로 상호 비교적인 측면을 톺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포인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느림의 결에서 파랑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난다. 발효와 환원은 색을 붙잡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색이 나투도록 허용하는 과정이다. 파랑은 매번 다른 조건에서 다르게 현현하며 그 차이가 예술적 감각의 '결'로 남게 된다. 우리가 '결 고운'이라는 형용을 미학적 준거로 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이게 우리 쪽염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정형의 결에서 파랑은 이미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초점이 있다.

색은 문양을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이며 그 변동성은 최소화된다. 현현의 주체가 아니라 정형을 지지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형식이 선행적으로 규정되고 그 형식이 안정적으로 재현되고 반복되도록 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느림의 결은 완성과 고정을 유예하며 실행을 지속시키고 현현이 반복 축적되도록 한다. 물론 이 차이는 기술의 문제보다는 미학적 선택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각각의 문화가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선택해온 시간 조직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 비교가 아니라 미학적 작동원리의 차이로 읽어내는 눈이다. 즉, 이 두 가지는 가치판단의 상하가 아니라 미학적 작동 방식의 문화 차이다.

굳이 이름짓기를 시도해본 것은 시김새와 나툼새, 너름새를 넘어 신명의 구조로 가기 위한 빌드업이고 장차 일본이나 중국 등 아시아 미학에 견주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이를 심화시켜 음악적인, 또 회화적인 맥락으로 연결하여 한국문화 전반을 해석하거나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대입하여 풀어볼 것은 느리게 살기, 발효의 본향, 느림의 미학 등이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와 공장 염색에 대응하는 지점에서 쪽물 염색의 위치는 생각보다 깊다.

정관채 염색장을 비롯한 나주 전통의 쪽물 염색 작품들, 오스트리아의 전승자들이 마련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 관람할 수 있다. 특별하게 열리는 전시회의 파랑에 대한 시선, 두 개의 시간 철학을 상고하는 즐거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