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감선거 정당공천, '정치화' 아닌 '책임의 제도화'

정용주 서울천왕초등학교 교장 2026. 1. 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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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전 교육감발 논쟁'의 확대를 바라며

중립은 '정당 지우기' 아닌 책임지게 하는 것

얼마 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정당공천 교육감 선거를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김현철 서울교육자치시민회의 대표는 반론 글을 기고했고, 이에 대해 곽노현은 재반론의 글을 기고했다. 나는 곽노현이 던진 교육감 선거와 관련된 제안에 대해 좀 더 토론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쓴다.

곽노현의 첫 번째 기고는 교육감 선거가 무당적이어도 정치는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깜깜이 선거"와 "법적 근거 없는 단일화" 같은 비공식 정치가 커진다는 지적이다. 정당공천을 금지해 놓으니 정당은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영향은 행사하고, 유권자는 후보의 철학과 정책 패키지를 비교할 정보가 부족해진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정당공천과 예비경선 같은 제도 장치를 통해 선택의 정보를 늘리고, 선거 이후에도 "누가 무엇에 책임지는가"라는 책임사슬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정당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들이는 일이라는 논리이다.

김현철의 반론은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짚는다. 정당공천이 교육을 정쟁의 장으로 끌고 가고, 당권과 계파가 공천을 장악하면 교육자치는 중앙정치의 하청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정당 딱지"가 해법이라는 단순한 상상력은 학교의 복잡한 문제를 정치공학으로 축소할 위험이 있고, 그 피해는 다시 현장에 쏠릴 수 있다는 문제제기이다. 정당공천이 '책임'을 강화하기보다 '종속'을 강화할 가능성을 우려한 김현철의 지적은 타당하다.

이에 대한 곽노현의 재반론은 김현철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논점을 다시 "책임"으로 밀어붙인다. 정당공천이 만능이라는 말이 아니라, 무당적 제도가 이미 정치적 편향과 조직 동원을 낳고 있으며 그 과정이 제도 밖에서 이뤄져 더 불투명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제한하면서 교육감에게는 '무당적 중립'을 강제하는 것은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약화시키는 비대칭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중립성은 정당과의 분리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행사가 공개되고 평가되며 책임이 귀속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당공천은 그 재구성을 위한 한 방법일 수 있으나, 그 전제는 당권 종속을 막는 통제장치와 공개 규칙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나는 교육정치학을 연구하는 현직 교장으로서 이 논쟁이 여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학교는 지금, 늘봄과 돌봄의 설계, 급식과 안전의 노동조건, 민원과 분쟁의 책임 체계, 인력과 예산의 배분, 인권과 교권보호의 경계 같은 문제를 하루의 일상으로 받아 안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교육청의 행정역량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정치적 의제이며, 동시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 현장이 고스란히 비용을 떠안게 되는 의제이다. 그래서 나는 이 논쟁에 참여한다. 정당공천을 찬반의 싸움으로 끝내지 않고, 김현철이 제기한 학교 현실의 복잡성과 권리의 지형을 품으면서도, 곽노현이 요구한 책임사슬의 복원을 교육정치학적으로 더 정교하게 설계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중립을 신화로 남기지 않고 책임으로 바꾸는 일, 권리를 침묵으로 봉인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절차로 확장하는 일, 그 두 가지를 함께 성립시키는 제도 상상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11일 중구 소공동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공보물을 보고 있다. 2024.10.11. 연합뉴스

중립은 정치를 지우는 규범이 아니라 권력을 묶는 규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오랫동안 "정당과의 분리"라는 한 문장으로 축소되어 왔다. 그러나 중립성은 정치가 사라진 무균실을 가정하는 규범이 아니다. 중립성은 권력이 교육을 사유화하지 못하게 하고, 학생의 발달과 배움이 특정 진영의 언어로 포획되지 못하게 하는 통제 원리이다. 그래서 중립성의 핵심은 정당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이 들어올 때마다 흔적과 책임을 남기게 만드는 장치이다. 다시 말해 중립은 "정치가 들어오지 말라"가 아니라 "정치가 들어왔다면 반드시 공개하고 정당화하라"라는 명령에 가깝다. 중립은 침묵이 아니라 절차이며, 절차는 곧 책임의 기록이다.

교육감의 법적 성격으로 보면, 결정은 행정적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예산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 늘봄과 돌봄의 설계를 무엇으로 정당화하는가, 급식·시설·행정의 노동조건을 어떤 기준으로 보장하는가, 악성 민원과 분쟁의 책임을 누구에게 배치하는가가 모두 가치 갈등의 조정 문제이다. 학생인권과 안전의 경계, 교권과 보호의 경계, 격차 완화의 경로 역시 선택의 문제이다. 이런 선택은 "전문가의 계산"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선택의 결과로 누군가는 보호받고, 누군가는 방치되고, 누군가는 더 오래 기다리게 된다. 그러니 교육감에게 "정치가 아닌 척"을 요구하는 순간, 중립은 미덕이 아니라 면책의 기술로 변질되기 쉽다. 교육감은 정치적 선택을 하면서도 "나는 중립이라서"라고 말하는 구조에 갇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핵심 질문은 "교육이 정치화되는가"가 아니다. 교육은 이미 정치이다. 교육정책은 분배의 기술이면서 인정의 기술이고, 규율과 보호를 동시에 수행하는 권력이다. 문제는 그 정치가 공개된 책임의 형태로 작동하느냐, 아니면 비공식 동원과 내적 거래의 형태로 작동하느냐이다. 무당적 선거는 종종 정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정치를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제도 바깥으로 밀려난 정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는 정치는 책임질 수 없다. 그 순간 중립은 규범이 아니라 신화가 된다. 신화는 제도를 지키지 못한다. 신화는 권력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떄 곽노현의 주장과 재반론의 주장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정당을 배제하면 깨끗해지는가라는 질문이다. 정당을 금지하면 중립이 지켜지는가라는 질문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정당을 지우는 순간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더 자유롭게 떠다니게 된다. 중립을 지키기 위한 첫걸음은 정당의 삭제가 아니라, 권력의 경로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경로 위에 책임을 묶는 일이다. 중립성은 이제 "정당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권력 행사의 조건을 공개하고 통제하는 규범"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정당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보이게 하는 것이 중립의 실천이다.

곽노현의 주장과 재반론의 핵심은 '정당 딱지'가 아니라 '책임사슬'의 복원

현재 시행되는 무당적 교육감 선거는 정치적 중립성을 가진 것처럼 치뤄진다. 공정해 보이고, 덜 정치적이며 중립적으로 보이고, 덜 시끄러워 보인다. 그러나 작동 논리는 냉정하다. 후보 정보를 얻는 비용이 커지고, 유권자의 선택은 개인의 탐색 능력과 시간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저관여 다수는 멀어지고, 고관여 소수는 가까워진다. 참여의 문턱이 높아질수록 조직화된 집단은 유리해진다. 이때 선거는 "시민 전체의 의사"라기보다 "조직된 의사의 합산"으로 수렴되기 쉽다. 이것이 비당파 선거의 민주주의적 역설이다. 덜 정치적으로 보이는 제도가, 실제로는 더 편향된 영향력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곽노현이 "깜깜이 선거"와 "비공식 단일화"를 문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당이 공천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진영은 단일화를 통해 사실상의 예비경선을 치른다. 문제는 그 과정이 제도적 규칙, 공개 검증, 책임 주체 없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누가 후보를 고르는지, 어떤 기준으로 탈락시키는지,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무엇을 약속했는지가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선거 전에는 "누가 무엇을 결정했는지"가 흐릿하고, 선거 후에는 "누가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지"가 흐릿하다. 이 흐릿함은 우연이 아니다. 제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당적 선거는 '중립'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비가시성'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곽노현이 김현철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에서 제기한 문제는 사실 본질적이다. 교육감이 막대한 정무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정당정치가 그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는, 정당에게 가장 편한 구조라는 점이다. 정당은 교육의 갈등을 선거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집권 이후의 비용을 함께 부담하지 않는다. 늘봄·급식·민원·교권·인권·격차 같은 난제는 교육청 내부의 행정역량으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법·예산·노동정책·지방정부 협치가 얽힌 문제이다. 그런데 정당이 책임사슬 바깥에 있으면, 교육은 "정치의 자원"이 되지만 "정치의 의무"는 되지 못한다. 이 구조에서는 누가 늘 이기는가.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쪽이 이긴다. 그리고 늘 지는 쪽은 현장이다.

그래서 곽노현이 주장하는 정당공천의 의미를 '정당 딱지'로 축소하면 논쟁은 빈약해진다. 정당공천의 핵심은 정보 표지가 아니라 책임 사슬이다. 정당은 공약을 패키지로 제시하고, 언론과 의회가 그 패키지를 검증하고, 다음 선거에서 그 패키지가 되돌아오게 만드는 장치가 공천이다. 공천은 정당의 권한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설계되면 정당의 구속이 된다. 실패의 비용이 후보 개인에게만 전가되지 않고, 정당 조직과 지도부로 되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 책임의 사슬이 생기면, 적어도 도망칠 길은 좁아진다. 그래서 곽노현의 주장과 재반론의 주장은 "정당이 개입하라"가 아니라 "정당이 개입한 만큼 책임을 져라"라는 요구로 읽을 때 비로소 교육정치학적 의미를 가진다. 정당공천은 정치의 확대가 아니라 책임의 귀속이다.
22일 강원 강릉시 씨마크호텔에서 열린 제102회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총회에서 전국시도교육감 및 참석자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5.22 연합뉴스

김현철의 비판은 정당공천 반대가 아니라 '통제된 정당공천' 설계 요구

곽노현의 정당공천 선거 주장에 대해 김현철의 비판이 겨누는 표적은 단순히 정당공천이 아니다. 김현철이 비판하는 것은 "정당공천이 만능"이라는 행정적 상상력, 그리고 학교 현실을 단순한 진영 구도로 환원하는 정치공학적 습성이다. 학교는 교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급식·돌봄·행정·상담·시설·안전의 노동이 맞물린 공적 조직이다. 학생의 배움은 이 노동들의 결합 위에서만 성립한다. 이 현실을 지우고 "조직화된 이익"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면, 교육정치학은 곧바로 현실을 배반하게 된다. 김현철의 비판은 이 지점을 찌른다. 교육정치는 '교실'만이 아니라 '학교의 운영 조건' 전체를 다뤄야 한다는 요구이다. 누구의 노동이 보이지 않게 되는가를 묻는 순간, 정당공천 논쟁은 훨씬 더 윤리적이 된다. '중립'이라는 말이 노동과 권리를 지우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중립은 공공성의 규범이 아니라 침묵의 규율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공천은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당권과 계파의 줄서기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교육감 선거가 중앙정치의 하청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행정권력 종속은 나쁘고 당권 종속은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정당공천 찬성론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정당공천이 교육자치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교육청을 당의 인사·동원 기구로 만들면, 중립성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붕괴된다. 이때 정당공천은 책임사슬이 아니라 권력사슬이 된다. 그리고 권력사슬은 대개 약한 고리부터 끊어진다. 그 약한 고리가 바로 학교 현장이다. 이 경고는 정당공천이 '책임의 제도화'가 되려면, 공천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보다 공천을 제한하는 규칙이 먼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제도는 선의를 증명하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의 남용을 막는 장치라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 정당공천이 낳을 수 있는 근본적 위험은 '당권 종속'만이 아니다. 정당은 본질적으로 적대적 경쟁의 기계이며, 승리를 위해 갈등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처럼 다층적 이해와 복합적 가치가 얽힌 영역에서 이 기계가 작동하면, 정책은 "증거와 설계"가 아니라 "우리 편 vs 저쪽"의 프레임으로 재배열되기 쉽다. 그 결과 교육감 선거는 학교의 문제를 풀기 위한 공론장이라기보다, 중앙정치의 감정 동원을 재현하는 무대가 된다. 이때 학생의 삶과 교사의 노동, 학부모의 불안은 '근거'가 아니라 '상징'으로 사용되고, 현장의 언어는 '정책의 언어'가 아니라 '진영의 구호'로 번역된다. 통제 없는 정당공천은 책임사슬을 만들기 전에 적대사슬을 먼저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김현철의 비판을 수용한다는 것은 정당공천의 절차만이 아니라, 선거 담론의 형식 자체를 제도적으로 묶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지역주의 역시 교육감 선거에서 정당공천이 촉발할 수 있는 오래된 균열이다. 정당은 전국정당을 표방하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지역의 동원 네트워크와 결합하며, '정책'이 아니라 '지역 정서'에 기대어 표를 조직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감 선거가 이 논리에 포획되면, 교육의 쟁점은 돌봄·노동·안전·격차 같은 실질 문제에서 벗어나 "우리 지역 몫"과 "우리 지역 사람"의 경쟁으로 기울 수 있다. 특히 교육재정과 시설, 학교 신설과 통폐합, 학생배치와 특화사업은 지역적 이해가 강하게 작동하는 의제이므로, 정당공천이 지역주의와 결합하면 '책임'이 아니라 '전리품'의 언어가 강화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통제된 정당공천'은 공천 절차의 공정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영적 적대와 지역적 편중이 교육자치의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의제 설정과 캠페인 방식 자체를 규칙으로 묶는 설계를 포함해야 한다.

그래서 정당공천을 "하자/말자"의 이분법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 정당공천을 하더라도, 정당공천이 교육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정당공천을 도입한다는 것은 정당의 권한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정당을 공개 규칙으로 묶어 두는 일이어야 한다. 즉 '정당공천 찬성'은 "정당에 맡기자"가 아니라 "정당을 묶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곽노현의 주장과 김현철의 주장은 충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 곽노현은 책임을 세우자고 말하고, 김현철은 그 책임이 권력 남용과 진영주의·지역주의로 변질되지 않게 통제하자고 말하는 셈이다. 둘의 결합점은 "공개성과 구속"이라는 단어이다. 공개되지 않으면 책임은 사라지고, 구속되지 않으면 공개는 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통제된 정당공천' 패키지이다. 공개경선과 개방형 경선의 의무화로 전략공천을 제약하고, 후보 검증을 당내 거래가 아니라 시민의 평가로 돌려야 한다. 교육전문성 요건은 강화하되 교사중심주의로 환원하지 않고, 학교노동 전반에 대한 이해와 권리·안전의 책임 설계를 검증하는 기준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공천의 조건으로 "학교노동–돌봄–격차–인권/교권–민원 책임체계"에 관한 최소 협약을 부과하고, 임기 중 이행을 공개 평가해 정당의 연대책임을 실체화해야 한다. 정당이 교육을 '말'로만 소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더 나아가 진영주의를 '이익'이 아니라 '비용'으로 만들 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허위·과장 프레임과 혐오 동원을 제재하는 선거운동 규칙, 정책토론의 의무 횟수와 검증 기준, 지역 편중 공약의 재정·형평 영향평가 공개 같은 장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패키지가 '선의에 기대는 권고'가 아니라 '강제되는 규칙'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현철의 논리를 품는다는 것은 이 구속의 설계를 정당공천의 본체로 삼는다는 뜻이다.

새로운 비전: 정치기본권 확대와 '중립성=책임'의 재구성이 함께 가야

곽노현의 정당공천 주장이 촉발한 논쟁이 진짜로 커지는 지점은 정치기본권이다. 교사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정치 권리를 거의 인정하지 않고, 후보에게는 당적 금지를 통해 정치적 정체성의 공개를 막는 구조는 중립적이지 않다. 권리를 제한하면서도 책임을 묻기 어려운 구조가 고정되기 때문이다. 권리 없는 참여는 공론장을 메마르게 만들고, 정체성 없는 선택은 유권자의 판단을 무력화하며, 책임 없는 결과는 현장의 고통을 반복시킨다. 이 삼중 결함이 제도를 오래 갉아먹는다. 무엇보다 "정치적 중립"이 권리 제한의 근거로 남는 동안, 중립은 민주주의의 규범이 아니라 침묵의 규율로 기능하기 쉽다. 침묵의 규율은 갈등을 줄이지 않는다. 갈등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정치적 중립성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교사에게 필요한 중립성은 수업에서의 주입 금지와 공적 책무의 규범이다. 교사가 정치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교사는 시민이며, 동시에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이다. 교육감에게 필요한 중립성은 탈정치가 아니라 책임정치의 규범이다. 교육감이 정치적 정체성을 공개하고, 그 정체성에 따라 공약을 제출하고, 성과와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가 오히려 중립성을 강화할 수 있다. 중립이란 "정치가 없다"가 아니라 "정치가 공개되고 통제된다"라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숨긴 정체성은 중립이 아니다. 숨긴 정체성은 책임 회피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정당공천 논쟁은 결국 "중립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쓰는 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곽노현이 제기한 정당정치와 교육자치는 적대 관계로만 남지 않는다. 교육자치는 정당정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만 성립하지 않는다. 교육자치는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정당정치와 교섭하고,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연대할 수 있는 제도적 힘이다. 정당공천을 '정쟁의 통로'로 방치하지 않고 '책임의 통로'로 설계할 때, 정당정치와 교육자치는 긴장 속의 동맹이 될 수 있다. 긴장은 나쁜 것이 아니다. 긴장은 권력이 공개된 규칙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신호이다. 문제는 긴장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무책임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곳에서 비용을 청구한다.

결론적으로 곽노현이 주장한 정당공천은 교육을 정치에 예속시키자는 제안이 아니다. 정치를 교육 앞에서 책임지게 만들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곽노현의 문제의식은 책임사슬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교육정치학적으로 의미가 크다. 물론 김현철의 주장은 그 책임사슬이 당권에 포획되지 않도록 '구속의 설계'를 붙이라는 요구이다. 정치기본권의 확대와 중립성의 재구성이 함께 갈 때, 교육감 선거는 "중립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책임이라는 제도"로 옮겨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교육자치는 선거의 이벤트가 아니라, 권력과 권리가 만나는 일상적 민주주의의 장이 된다. 중립을 지키려면 정당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권력을 책임의 규칙으로 묶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곽노현의 주장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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