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옮길 준비…'풀지 않은 가방'의 사회
━
‘느슨한 연대’ 1.5가구 시대
2019년 신림동 고시촌 셰어하우스에 리빙랩을 차린 적이 있다. 1인 가구라는 새로운 현상이 궁금해서였다. 몇 년간 지켜보며 데이터를 모았다. 당시만 해도 1인 가구는 ‘증가하는 특수 집단’ 정도로 인식되던 때였다. 하지만 2023년을 전후로 상황은 급변했다.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정부 정책이 쏟아졌고 돌봄·주거·안전 관련 민간 서비스도 빠르게 확장됐다. 한국 사회는 1인 가구화를 더 이상 예외가 아닌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개인들 역시 가구 전환의 문턱을 그리 높게 느끼지 않게 됐다.
변화는 시장에서도 감지됐다. 가전 기업들은 1인 가구 전용 제품이나 ‘가전 구독’ 모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도 다른 신호가 포착됐다. “대형 가전이나 침대가 잘 안 팔린다”는 거였다. 이는 구매력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구조의 문제였다. 가구가 더는 오래 유지되지 않으니 크고 무거운 물건을 들이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단순히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가구 형태 자체가 고정된 단위에서 유동적인 상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1인 가구는 물론 2인 가구와 3인 가구의 비중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가 오랫동안 ‘정상 가구’로 상정해온 4인 가구는 이제 전체의 13% 안팎에 불과하다. 가구의 중심이 더는 4인 가족 모델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통계로도 확인된다.
특히 2인 가구는 더 이상 단일한 모델이 아니다. 아이 없는 맞벌이 부부뿐 아니라 한부모와 자녀, 성인 자녀와의 동거, 혹은 일정 기간 유지되는 느슨한 결합까지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느 하나의 가구 형태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는 2인 가구였다가 내년에는 3인 가구, 몇 해 뒤에는 다시 1인 가구로 돌아가는 변화가 낯설지 않다. 가구는 이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됐다. 고정적인 유형이 아닌, 삶의 특정 국면에서 잠시 나타나는 ‘상태’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진단처럼 불안정성이 기본이 되는 액체 사회(liquid society)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이런 유동성은 개인의 취향이나 가치관의 변화보다 직업 구조의 불안정성, 소득의 변동성, 이동이 잦아진 노동 환경 등 구조적 조건에 기인한다. 삶이 고정되지 않으니 삶의 공간 역시 고정될 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큰 집이나 대형 가전, 오래 사용할 가구에 쉽게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 필요할 때 들어오고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나갈 수 있는 풀퍼니시드나 빌트인 중심의 주거를 선택한다. 이는 소비의 위축이 아니라 고정성에 대한 거부다.
그렇다고 가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구가 유동화될수록 가족을 보조하는 다른 장치들이 등장한다. 가족 채팅방, 위치 공유, 구독 공유, 원격 돌봄, 상조 외주 등 과거 가족이 맡았던 기능의 일부를 대체한다. 관계 역시 상시적 결속보다 필요에 따른 접속으로 재구성된다. ‘온디맨드 가족’은 해체되는 게 아니라 분산돼 유지된다.
오늘날의 집에는 종종 풀지 않은 가방 하나가 놓여 있다. 당장 떠나기 위해서라기보다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가방은 불안의 상징이기보다 유동성을 전제로 살아가는 사회의 표식이다. 반면 고정된 가구를 기준으로 설계된 주거·복지·행정과 시장 서비스는 이 ‘풀지 않은 가방의 사회’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이미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이 같은 사회 현실을 과거의 낡은 틀로만 관리하려 해서는 결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