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인생은 끝없이 파도를 만드는 일과 같아서...겨울의 계절감, 경북 영덕 여행

2026. 1. 1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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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러 가는 일이다. 차가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코끝이 시려 올 때, 비로소 마음은 투명해진다. 동해의 허리춤에 자리한 경북 영덕은 이 계절, 가장 선명한 계절감을 보여주는 도시다. 오감을 깨우고 빈속을 든든히 채워줄 영덕의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영덕 강구항의 일출
다시 한 해가 시작됐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다. 오늘 뜬 해는 똑같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도 어제와 똑같다. 나는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장을 봐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토스트를 먹고 출근길에 나설 것이고, 퇴근 후에는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거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인생을 그렇게 보낸다. 그 일상 사이에 잠깐씩 기쁨이 깃들고, 행복이 찾아오고, 슬픔이 덮친다. 그렇게 오십 년 넘는 시간을 보내며 나는 알게 됐다. 산다는 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건 정말 하찮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중요한 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생은 제대로 된 눈빛을 만들어 가는 여정이다.

(좌)영덕 블루로드 B코스를 걸으며 만난 바다 풍경 (우)창포말 등대
바다가 건네는 푸른 묵언(默言), 블루로드

올해 처음 찾은 여행지는 영덕이다. 푸른 바다를 눈빛에 담고, 그 푸르름을 내 망막에 조금이라도 덧칠하고 싶었다. 영덕의 어느 바닷가 앞에 섰을 때, 푸른 물감을 쏟아 부은 듯한 바다가 일렁였다. 오기를 잘했구나, 바다 앞에 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역시 바다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영덕의 겨울은 길 위에서 시작된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그중에서도 영덕 구간은 ‘블루로드(Blue Road)’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총 64.6km, 4개의 코스로 나뉘는 이 길은 걷는 내내 동해의 거친 숨소리를 곁에 둔다.

(좌)영덕대게 조형물 (우)영덕 블루로드 스카이워크
가장 사랑받는 코스는 ‘푸른 대게의 길’이라 불리는 B코스다.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해 석리 마을을 지나 축산항에 이르는 15km 남짓한 길이다. 차를 타고 휙 지나가는 7번 국도 드라이브와는 결이 다르다. 두 발로 꾹꾹 눌러 걷다 보면, 바다는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처럼 다가온다.

해맞이공원 아래, ‘대게 집게발’ 조형물이 감싸 안은 창포말 등대에서 신발 끈을 조여본다. 계단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서자 ‘바다 위를 걷는 길’이 열린다. 갯바위 틈새로 하얀 포말이 부서진다. 파도 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영덕 블루로드 B코스를 걸으며 만난 바다 풍경
석리 마을에 닿으면 길은 잠시 숨을 고른다. 가파른 해안 절벽에 제비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갯바위에서 미역을 말리는 할머니의 손길이 분주하다. 마을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이곳에서 삶은 파도와 함께 출렁인다.

다시 길을 나서면 소나무 숲길이 등장한다. 솔향 섞인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죽도산(竹島山)이 보인다. 대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진 해발 87m의 작은 산인데, 그 정상에 서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축산항의 전경과 걸어온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60도로 트인 시야,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순간이다.

바람이 빚은 언덕, 그리고 수직의 숲

대게 집게발이 눈에 띄는 창포말 등대
해안도로를 벗어나 내륙으로 시선을 돌리면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춤을 추는 언덕이 나타난다. 일명 ‘바람의 언덕’이다. 이곳에 자리한 영덕 풍력발전단지에는 해맞이공원 위쪽, 완만한 구릉을 따라 높이 80m에 달하는 풍력발전기 24기가 도열해 있다. 1997년 산불 이후 조성된 이 단지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지금은 영덕의 상징이 됐다. 낮에 보면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선 현대적 조형물 같다. 겨울바람은 매섭지만, 그 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이국적이다.

발전기 아래로 난 산책로를 걷는다. 발 아래로는 창포리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머리 위로는 하얀 날개가 푸른 하늘을 가른다.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날개가 돌아갈 때마다, 하늘을 베어내는 듯한 긴장감이 감돈다.

영덕 풍력발전단지
하지만 진짜 매력은 해질녘부터 시작된다. 석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 발전기의 실루엣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변한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 하얀 발전기들은 검은 실루엣이 되어 한 편의 묵직한 풍경화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으면 수평선 너머로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날씨가 맑은 겨울밤이면 수십 척의 어선들이 동해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는데, 이들이 켜놓은 집어등(야간 낚시 때 어류를 모여들게 하기 위한 등불)은 수평선을 따라 긴 띠를 이룬다. 오징어가 빛을 따라 모이는 습성을 이용한 주광성 어업이지만, 모르고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환상적인 야경으로만 느껴진다. 발전단지 안에는 신재생에너지 전시관과 족욕 체험 공간, 바람정원 전망대도 있다.

새벽 동해바다
최근 영덕을 찾는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명소로 떠오른 곳이 있다. 영해면 벌영리에 위치한 메타세쿼이아 숲이다. 한 개인이 20년 넘게 정성으로 가꿔 무료로 개방한 사유림이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한겨울의 메타세쿼이아는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지만 그 황량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나무 기둥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소실점. 그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바다의 수평선에 익숙해진 눈이 숲의 수직선을 만나 균형을 잡는다. 피톤치드 가득한 삼나무 숲과 편백 숲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 잠시 마스크를 벗고 깊은 숨을 들이키기에 제격이다. 흙길을 밟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겨울 미식의 왕, 대게를 영접하다

영덕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맛’이다. 찬 바람이 불면 살이 차오르는 대게는 영덕의 자부심이다. 강구항은 그 중심에 있다. 항구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대게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기고, 다리를 건너면 장장 3km에 이르는 대게 거리가 펼쳐진다.

수백 개의 수족관마다 긴 다리를 뽐내는 대게들이 가득하다. “사이소, 보이소!” 경상도 사투리가 진한 상인들의 활기찬 외침과 찜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거리를 메운다. 영덕 대게는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가 제철이지만, 살이 단단하게 차오르는 겨울이 가장 맛있다. 좋은 대게를 고르는 법은 크기보다 ‘무게’와 ‘단단함’이다. 배 부분이 검거나 불그스름한 빛이 돌고, 다리를 눌렀을 때 탄력이 느껴지는 놈이 ‘박달대게’급이다.

(좌)영덕 대게 (우)대게 모양 벤치
한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찜통에서 20분 남짓 쪄낸 대게가 상에 오른다. 먹기 좋게 손질된 다리 하나를 집어 껍질을 살짝 비틀어 당긴다. 뽀얀 속살이 탱글탱글하게 딸려 나온다. 입안에 넣으면 첫맛은 짭조름하고 끝맛은 달큰하다.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게딱지에 있는 내장은 바다의 엑기스다. 녹진한 내장에 참기름과 김 가루를 넣고 밥을 비비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숟가락을 놓을 수 없다. 여기에 대게 다리를 넣고 끓인 대게탕이나 라면으로 마무리하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영덕이 선사하는 눈부신 바다 풍경

새벽 동해바다
강구항에서 남쪽으로 약 10분 거리에 삼사해상공원이 자리한다. 높이 420cm, 무게 29톤에 달하는 경북대종(경상북도 개도 100주년 기념 종)이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설은 삼사해상산책로다. 부채꼴 모양으로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이 산책로는 해수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설치돼 있다. 파도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투명한 바닥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검푸른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마치 배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겨울철 거센 파도가 칠 때는 짠 바닷물이 얼굴에 튀기도 하니 방수복이나 여벌 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좌)삼사해상공원 경북대종 (우)새벽 바다의 낚시꾼
삼사해상공원 인근에는 청포말 등대가 서 있는 해맞이공원도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하얀 등대는 일출 명소로 유명하지만, 저녁 시간의 일몰도 못지않게 아름답다.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동해의 거친 파도와 마주할 수 있다.

어촌 마을을 따라가는 해안 드라이브

강구항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영덕 여행의 백미다. 918번 지방도와 7번 국도를 번갈아 타며 약 40km를 달리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동해가, 왼쪽으로는 아기자기한 어촌 마을들이 스쳐 지나간다. 겨울철 해안도로의 명물은 철조망에 널린 오징어다. 대게와 마찬가지로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어지는 오징어잡이 시즌에는 길가 곳곳에서 오징어 말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하루 정도 말리면 피데기가 되고, 4~5일을 말리면 마른 오징어가 된다. 수백 마리의 오징어가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겨울 햇빛에 말라가는 오징어
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물결 따라 흔들리는 검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전복, 해삼, 멍게를 채취하는 해녀들이다. 오리발을 신은 두 다리를 수면 위로 힘차게 뻗으며 잠수하는 모습은 영덕 바다의 생생한 일상을 보여준다.

차유마을에서 축산항까지 이어지는 6.7km 구간은 ‘영덕 블루로드 B코스’로 불린다. 전체 4개 코스로 구성된 영덕 블루로드 중 가장 인기 있는 구간이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탁 트인 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쉬엄쉬엄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리고,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고래불 해변의 파도
고래불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장장 8km나 뻗어있는 모래 해변이다. 이곳 출신인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 이색이 어렸을 때 상대산에 올라 앞바다에서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는 모습을 보고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겨울철에는 한산해서 오히려 더 좋다. 곱디고운 모래밭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인량리 한옥마을

시간 여유가 있다면 인량리 한옥마을도 방문해보자.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10채가량 있는 마을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전통 테마 마을이라, 복원된 관광지와 달리 마을 사람들의 인정 넘치는 일상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고택 탐방뿐만 아니라 고구마 캐기, 트랙터 체험, 짚풀 공예 등 다양한 전통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다면 농촌 생활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옥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가능하니 홈페이지를 통해 미리 예약하면 된다.

인량리 한옥마을의 정경
영덕에서 하루 자고 올라왔다. 7번 국도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길, 이만 하면 새해 첫 여행으로, 겨울 여행으로 더 없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생은 별 것 없다. ‘완벽한 인생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살기가 한결 수월하다. 글을 쓰며 알게 됐다. 완벽한 문장을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문장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걸. 그것은 바다가 끝없이 파도를 만드는 일과 똑같다.
영덕 여행 정보
아성불고기
강구항에 가면 100여 개의 대게 집들이 호객을 한다. 찜기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살이 꽉 찬 대게의 감칠맛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맛은 어느 집이나 비슷하다. 아성불고기에도 가보자. 영덕군청 근처에 자리한 이 집은 겉보기엔 평범한, 아니 조금은 허름해 보이는 노포다. 이곳의 메뉴는 단 하나, 한우 불고기다. 1등급 한우만을 사용하는데, 주문 즉시 고기를 썰어 양념에 버무려 낸다.
영덕대게
옛날식 화로에 석쇠를 올리고 고기를 굽는다. 참숯 향이 배어든 불고기는 입안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 내린다. 이 집에는 날계란 노른자를 띄운 간장 소스가 나오는데, 잘 익은 불고기를 노른자에 푹 찍어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 된다. 달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 채소와 당면을 넣어 자작하게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와는 또 다른, 석쇠 불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강구항 전경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14호(26.01.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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