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의 명목을 찾아서](32)청주인 양관(楊綰) 선생과 대구 북구 국우동 느티나무

최미화 기자 2026. 1. 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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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웅 대구생명의숲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청주 양씨 국우동 입향조 양관이 심은 느티나무. 대구시 북구 국우동 자지미 마을 거은재(莒隱齋) 앞에 온갖 풍상을 겪었으나 양문의 깊은 뿌리처럼 굳건하게 자라고 있다.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시조는 암곡(巖谷) 양기(楊起)이다. 본래 원(元)나라 사람으로 벼슬이 중서성 정승이었다. 그때 원의 수도 연경(현, 북경)에는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 전(顓, 훗날 공민왕)이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전은 황족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제30대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9~1351)의 뒤를 이어 제31대 왕위에 올라 귀국할 때 양기(楊起)는 수행원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다. 그 후 원으로 다시 들어가서 고려가 원에 바쳐오든 4대 조공 즉 동녀(童女) 5천인, 준마 3만 필, 비단 3만 동, 저포(苧布) 6만 필을 영구히 면제받고 돌아왔다.
대구시 북구 국우동 입향조 양관을 기리는 묘비.

이에 공민왕은 그를 크게 치하하며 상당백(上黨伯)에 봉하고 본관지를 청주(淸州)로 하사했다. 그 후 양기는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錄選, 국가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그 명단에 이름을 등재하는 것)되어 1394년(조선 태조 3) 92세로 서거하니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내렸다.

아들 서평군 지수(之壽), 손자, 천진(天震) 3대가 연이어 청백리에 녹선된 화려한 이력을 가진 청주 양문(楊門)은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분이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으로 안평대군(1418~1453), 김구(金絿, 1488~1534), 한호(韓濩, 1543~1605)와 더불어 조선 전기 사대(四大) 명필로 일컬어진다.
양인석 박사가 대구시 수성구 용지봉에서 발견한 세뿔투구꽃.

봉래 양사언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와 함흥 부윤 등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산수를 즐기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즉 「태산가」를 남겼다.

이들의 후손이 대구에 정착한 것은 경기도 포천 출신인 남재(南齋) 양득효(楊得孝, 1572~1645)가 하빈면 하산리에 자리 잡은 데서 비롯된다. 대구진관(大丘鎭管)에 배속된 부사과(副司果) 겸 훈련원 판관(判官)이었던 그는 대구 사림(士林)의 영수이자 임란 의병장이었던 낙재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의 문하에 들어갔다. "의심나고 어려운 문장을 통쾌하게 뜻을 이해하게 설명하는 데는 양군(楊君, 양득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만큼 경학에 밝아 낙재가 사위로 삼으니, 처가가 있는 다사 이천(伊川)에 살게 되었다.
대구 입향조 남재 양득효를 기리는 재사 영모재

남재 양득효는 부인 서씨와 사이에 홍례(弘禮) 홍지(弘智) 2남과 2녀를 두었다. 장남 홍례는 호가 묵헌(黙軒)으로 슬하에 5남 2녀를 두니 장자 관(綰)은 국우동(자지미), 차자 연(縯)은 하빈(河濱, 스므지), 셋째 완(完)은 후손이 없고, 넷째 치(緻)는 약목(若木), 다섯째 찬(纘)은 다사 (達川)에 각기 삶의 터전을 잡았다.

대구시 북구 국우동 입향조 양관(楊綰, 1618~1680)은 아호가 거은(莒隱)으로 칠곡의 옛 이름, 팔거(八莒)에 은거하면서 살겠다는 뜻이다. 자식들의 교육과 선현들의 글 읽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땅을 일구며 살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교육계, 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많으나 일청(一靑) 양재하(楊在河, 1879~1945)와 그의 아들 지산(芝山) 양인석(楊麟錫, 1909~2003) 박사, 은초(隱樵) 양재춘(楊在春,1876~1953), 그의 아들 양백석(楊百錫, 1914~1978)을 들 수 있다.

일청 양재하는 1908년 수창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28년간 교단을 지키며 1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퇴직 후에도 야학당을 개설해 문맹퇴치운동을 벌렸다. 저서로 『일청문집』이 있고 1960년 공덕비가 칠곡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특히, 일청의 아들 지산 양인석은 경북대학교 교수, 도서관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대구불교신도회장, 한국자연보존협회 이사장 등 교육과 식물학 연구, 자연보호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전국 최초로 팔공산에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생태계보호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멸종위기종 세뿔투구꽃을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저서로 『식물학 개론』 『생물학 개론』 등이 있으며 교양서로 『백화송』 『우리 꽃 좋을시고』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다.

지산은 한때 울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임했다. 대표적인 제자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다. 특히, 롯데그룹 신(辛) 회장은 어느 칼럼에서 "세계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좋다는 음식을 다 먹어보았으나 고교 시절 어느 비오는 날 현장 실습 대신 학교 인근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아 양 박사 집에 갔더니 그때 사모님이 끓여준 매운탕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다." 고 술회해 부인의 음식 솜씨가 뛰어났음을 알게 했다.
이정웅 대구생명의숲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이외에도 은초 양재춘은 양씨서당을 열고, 죽림학숙재단(竹林學塾財團)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길렀으며 그의 아들 양백석(楊百錫)은 일제 강점기 마을회관에서 3년 여간 성인 야학을 개설하였고, 공민학교인가를 받아 교사로 재임하며 도남초등학교 신설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 이외 양철기 전 영남대 산업대학원장, 공직 생활을 마치고 숭조 활동에 여념이 없는 대구남재공문중 양철수 회장 등이 있다. 대구시 북구 국우동 자지미 마을 거은재(莒隱齋) 앞에는 입향조 양관(楊綰)이 심은 느티나무가 온갖 풍상을 겪었으나 양문의 깊은 뿌리처럼 굳건하게 자라고 있다.

이정웅 대구생명의숲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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