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분수에 맞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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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굳이 차 필요 없지.' 서울에 산다면 한 번쯤 들어봤거나 해봤을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 지하철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럭셔리를 자랑한다. 서울 전역은 물론, 서해 바다 건너 영종도부터 강원도와 충청남도까지 모세혈관처럼 촘촘히 뻗어 있는 노선도. 교통카드 하나만 있으면 여행도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다. 서울 지하철은 다른 대도시와 비교해도 월등히 깨끗하고, 넓으며, 가격까지 저렴하다. 그럼에도 '이제는 차가 필요하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있으면 좋은 것'이기도 하니까.
지난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아침 출근길마다 붐비는 지하철에 오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땀 냄새가 신경을 긁었다. 아무리 지하철역이 도심 곳곳에 있다고 해도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양말까지 젖은 채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차가 필요할 때면 카 셰어링 앱을 찾아, 조카가 생긴 삼촌처럼 책임 없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주행거리에 따라 늘어나는 후불 요금이 청구될 때면 '이 돈이면 차라리 차를 사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불평도 차를 사기 위해 찾기 시작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현실을 애써 모른 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차를 사기로 결심하면 오롯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첫 차를 살 때까지 그렇게 큰돈을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충분히 현실과 타협해 차를 고른다 해도, 각종 부가 비용을 추가하다 보면 어느새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조언이 필요했다. 먼저 차를 산 사람, 경제관념이 똑바로 박힌 사람, 그리고 차를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 스마트폰 속 연락처를 절반쯤 넘겼을 때 적임자가 떠올랐다.
이승규의 직업은 회계사다. 그는 용산에 있는 대형 회계법인에서 매니저로 근무 중이다. 7년 차 회계사인 그는 올해로 서른다섯 살이며,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다. 그의 구체적인 연봉은 알지 못하지만, 검색을 해보니 7년 차 회계사의 평균 세전 연봉은 1억원을 넘는다고 한다. 이승규가 현재 소유 중인 차는 입사 3년 차에 구입한 2016년식 중고 BMW 528i. 그는 여전히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회계사 시험 통과하자마자 마이너스 통장으로 차를 사는 동기들도 있었어요. 저는 차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뭘 잘 안 사요. 지금도 고시생 시절부터 살던 집에 삽니다. 회사까지 버스로 15분이면 되거든요. 이사를 갈 필요도, 차를 살 이유도 없었죠." 이승규가 차를 사기로 한 건 여자친구 때문이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쏘카로 차를 빌려 1박 2일 여행을 다녔는데, 어림잡아 계산해도 매달 자차 유지에 드는 비용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들었다.
이승규는 차를 구하기에 앞서 예산 상한선을 정했다. 2500만원. 왜 하필 2500만원었을까? "기업에서는 비유동자산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1년 이내에 현금화하지 않을 자산이죠. 그러면 안 되겠지만, 자동차는 전손될 수도 있잖아요.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금액. 정신은 피폐해질지언정, 나의 재정건전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금액. 그게 2500만원이었어요." 2500만원 상한선이 경제적 이유였다면, 중고차 구입은 심리적 이유였다. "마음 편하게 차를 타고 싶었어요. 첫 차로 신차를 사면 모시면서 탈 것 같더라고요. 때마침 반도체 이슈로 신차 출고 기간이 길어지기도 했고요."
그렇게 이승규가 추린 후보는 총 세 대였다. 폭스바겐 7세대 골프, 랜드로버 프리랜더 2, BMW 6세대 5시리즈. 모두 중고차 시장에서 2000만원 중반대에 거래 중인 차들이었다. 7세대 골프는 디자인도 유지비도 마음에 들었지만, 출장이 잦은 그에게는 2열 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프리랜더 2는 공간도 디자인도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정비성이었다. 랜드로버 정비성에 대한 괴담을 워낙 많이 듣기도 했거니와, 단종된 지 10년 된 차라는 점에서 유지 및 관리가 까다로울 것 같았다. BMW는 중고차를 사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는 브랜드다. 한국에서 '독삼사'가 지닌 위엄이 있으니까. "메르세데스-벤츠를 산다면 신차로 구입하고 싶었어요. 확실히 럭셔리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 럭셔리를 즐기려면 신차를 뽑아서 처음부터 관리하며 타고 싶었습니다. 메르세데스가 '럭셔리 차'라면, BMW는 '달리는 차'였어요. 그러니 중고차는 전혀 문제가 안 됐죠. 아우디는 뭐랄까··· 애매했어요."
두 번째로 자문을 구한 건 박희준. 자동차 전문지에서 기자로 근무 중인 그는 한국에 수입되는 거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를 경험해봤다. 그는 5년 전 친한 선배에게 270만원을 주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2012년식 쉐보레 수동 스파크. 2025년에 수동 스파크를 서울에서 타는 일은 경부고속도로에서 경주마를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은 수백 번도 더 들어봤다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로 답했다. "직업 때문에라도 수동 운전의 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 유럽에서는 아직도 수동변속기 차를 많이 타니까요. 그리고 남자는 수동 아닙니까."
넉 달 전 첫아이가 태어난 그는 인생 두 번째 차를 고민 중이다. "기아 카니발 하이브리드 풀옵션.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카니발이 싼 차가 아니에요. 풀옵션에 세금까지 내면 거의 7000만원이 나옵니다. 어차피 운전 재미를 포기할 거라면 크기라도 확실히 가져가야죠. 어쭙잖게 독일 세단 탔다가는 죽도 밥도 안 돼요. 무엇보다 '성실한 아빠' 노릇도 확실히 할 수 있고요." 어릴 적부터 바퀴 달린 건 모두 좋아했다던 그는 낭만을 좇아 자동차 기자가 되었지만, 자동차를 살 때는 아주 현실적인 기준을 앞세웠다. "주변에서도 질문을 많이 해요. 어떤 차를 사야겠냐고. 그때마다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차는 나를 대변하지 않는다. 자동차 기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맞을지 모르지만, 차는 결국 차예요. 당장 포르쉐 911 타고 한남동 나간다고 없던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아요. 자기 분수를 알고 거기에 맞게 차를 타는 사람이 훨씬 매력적이죠."
"어른이라면 차를 살 생각이 없더라도 나에게 어떤 차가 필요한지,
어떤 차를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나의 진짜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 박희준은 단호하게 경차를 추천했다. "제가 경차를 타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경차의 장점은 50개 이상 꼽을 수 있어요. 주차 편해, 운전 편해, 주차장 요금 할인돼, 고속도로 통행료 할인돼, 세금 덜 내. 심지어 환경에도 좋아요. 배기량이 작으니까요. 다들 지속가능성 이야기하는데, 전기차 배터리 하나 만들 때 배출되는 탄소량이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5톤이 넘습니다." 마지막으로 박희준에게 예산에 대한 팁을 구했다. "본인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살펴봐야죠. 1인 가구로 살 것이냐, 결혼을 꿈꾸고 있느냐,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느냐. 이걸 다 종합한다면 연소득의 30%까지는 차에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연봉이 5000만원이면 1년에 1500만원까지는 차에 쓸 수 있는 거죠. 할부 값부터 기름값까지 차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합쳐서요. 나머지 30%는 생활하는 데, 나머지 40%는 자산관리에 쓰는 게 맞다고 봐요."
선배들의 조언을 종합해 나의 분수에 맞는 차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2000만원 초반대의 세단이 아닌 가솔린 모델.'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종 선택은 더 뉴 캐스퍼로 정했다. 계약금도 냈다. 사실 처음부터 곧장 캐스퍼를 고른 건 아니다. 주변에서 많이 추천했던 폭스바겐 골프 7세대는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지만 정비성 때문에 탈락시켰다. 회사에서 집까지 차로 15분 거리인 나로서는 디젤차는 자칫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가솔린 모델을 구해볼 수도 있었지만, 상태가 좋은 차들은 대부분 주행 마일리지가 10만km를 넘긴 상태였다. 2000만원 넘는 돈을 쓰면서 '뽑기운'을 기대하고 싶진 않았다. 볼보 V60 크로스컨트리 2세대는 마지막까지 후보지에 올랐던 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왜건을 좋아한다. 한국 시장에서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유난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유럽에서 보았던 오래된 왜건들은 특유의 운치가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유지비가 문제였다. 볼보는 프리미엄 브랜드다. 엔진오일만 교체해도 국산차의 최소 2배 이상이다. 소모품을 갈 때마다 '국산차 살걸' 하는 후회가 들 것 같았다.
캐스퍼는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할 차는 아니었다. 경차는 대한민국에서 '경차'라는 점만 빼면 깔 게 없다. 고속도로 통행료 50%, 공영주차장 주차료 50%, 경차 전용주차장, 취득세 면제, 낮은 자동차세, 유류세 환급. 이 정도 혜택이면 온 나라가 경차를 타라고 응원해주는 격이다. 참고로 지금 캐스퍼에는 프리미엄이 붙었다. 주행거리 2만km의 2025년식 캐스퍼가 2450만원에 거래 중이다. 모든 옵션을 추가한 캐스퍼 신차 가격은 2223만원. 언젠가 '더 큰 차 살걸' 하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는 차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어른이라면 차를 살 생각이 없더라도 나에게 어떤 차가 필요한지, 어떤 차를 살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나의 진짜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내 분수에 맞는 자동차 고르는 법
1. 당장 이 돈이 사라져도 재정건전성에 문제없을 금액으로 차를 사라.
2. 1년 유지비가 연봉의 30%를 넘지 않는 차를 골라라.
3. 내가 꿈꾸는 가족 구성을 반영해라.
4. 자동차로 신분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5. 1년 뒤 '그때 그 차 살걸' 생각날 것 같은 그 차를 사라.
CREDIT INFO
Feature editor 주현욱
Images 현대자동차, 폭스바겐, 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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