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기록" 뜨거운 심장의 봉인 : 50년 후로 보낸 편지

이민우 기자 2026. 1. 13.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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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리터러시
50년 후로 보낸 문학적 편지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창립 50주년
1000년을 넘은 시조 DNA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에
미발표 신작 시조집 등 매설
시조 문학사의 사료도 함께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창립 50주년을 맞아 2075 타임캡슐 매설식이 진행됐다. [사진 | 뉴스페이퍼]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나무 같은 굵은 둥치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나무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끊임없이 '마디'를 만들어 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도 땅에 묻는 이 타임캡슐은 50주년을 맞은 우리 시조단이 과거를 매듭짓고, 미래 100년을 향해 뻗어 나가는 가장 단단하고 확실한 '마디'가 될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6일 오후,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위치한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 야외 특설무대. 겨울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 정용국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의 축사가 울려 퍼지자, 행사에 참석한 80여명의 시인과 내외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숙연한 분위기에 잠겼다. 한국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時調를 지켜온 문인들이 자신들의 반세기 역사를 땅에 묻고, 정확히 50년 후의 후배들과 조우하겠다는 약속을 건네는 순간이었다.

'오늘의시조시인회의(의장 오종문)'가 주최하고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이 주관한 이번 행사의 공식 명칭은 '창립 50주년 기념 타임캡슐 매설식–2075년에 만나요'다. 행사의 대주제는 '100년의 시간을 잇다(1975-2025-2075)'로 정해졌다. 이는 1975년 태동해 2025년 창립 50주년을 맞은 오늘의시조시인회의가,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75년을 기약하며 문학적 생명력을 이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오종문 의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타임캡슐 매설의 의미를 단순한 보존 그 이상으로 정의했다. 오 의장은 "시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K-시(Poetry)'의 종가"라며 "이번 타임캡슐은 과거의 기록을 저장하는 행위를 넘어, 이 시대의 가치와 감정, 그리고 사유를 시조시인의 언어로 봉인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것은 시조의 정신과 한국 문학의 기품이 오늘날에도 펄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정체성의 표지이자, 현재를 미래로 전하는 문학적 실천, 그리고 시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문학적 선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행사의 백미는 단순한 축하 인사가 아닌, 한국 시조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거대한 담론의 장場이 펼쳐진 순간들이었다. 연단에 오른 문학계 원로와 중진 시인들은 각자가 정의한 시조의 본질을 쏟아내며, 왜 우리가 이 기록을 50년 후로 보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역설했다.

정용국 이사장은 시조를 단순한 옛 노래가 아닌, 치열한 현실 인식의 산물로 정의했다. 그는 "시인은 현실의 그늘 위에 서 있는 파수꾼"이라며 "시조야말로 우리말(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하고 아름다운 문학적 그릇"이라고 강조했다. 김치가 세계적인 문화가 됐듯, 한글이라는 거목巨木에 핀 가장 한국적인 꽃이 바로 시조라는 설명이다.

[일러스트 | 나노바나나 생성] 
시조가 가진 생명력의 문학적 은유도 이어졌다. 이승은 상임고문은 격려사에서 "시조는 영혼의 폐활량으로 끊임없이 뿜어내는 숨결"이라는 인상적인 정의를 내렸다. 그는 정형의 틀에 갇힌 것이 아니라, 생각의 숨결을 일깨우는 펌프질을 통해 영혼을 확장하는 힘이 바로 시조에 있음을 역설했다. "우리가 진솔한 언어로 오늘을 산다면 50년 후 한국 시조의 현장은 훨씬 더 큰 세상이 될 것"이라는 그의 축복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또한 정수자 상임고문은 시조의 역사를 신라 향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시간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1200년 된 민족적 시가 율격의 DNA를 이어가고 있다"며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고, 시인의 목소리는 시간을 견딘다"고 말했다.

50년을 넘어 1000년을 이어온 이 율격의 유전자가 2075년의 미래 세대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학적 코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이처럼 이날 진도에 모인 문인들은 타임캡슐에 묻은 것이 단순한 책과 파일이 아니라, '영혼의 숨결'이자 '민족의 DNA'였음을 확인했다.

매설식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타임캡슐에 담긴 '수장품'의 면면이었다. 지름 31.8㎝, 높이 60㎝ 크기의 스테인리스 특수 용기에는 오늘의시조시인회의 50년 역사를 총망라하는 71개 품목이 진공 포장돼 담겼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현역 회원들이 50년 후 미래 독자들을 위해 창작한 미발표 신작 시조집「2075 푸른 별로의 귀환(2권)」이다.

일반적인 타임캡슐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나 이미 발표된 작품을 묻는 것과 달리, 이 시조집은 2075년 12월 6일 개봉되는 순간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본다. 이는 '과거의 영광'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보내는 '문학적 편지'를 띄운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또한, 회원들의 자선自選 대표 시조집 54권, 창립 50주년 기념 사화집 「100년의 시간을 잇다」, 기관지 「오늘의 시조」 19호ㆍ20호 등 서적 자료와 함께 방대한 분량의 디지털 아카이브도 봉인됐다. 1975년 창립 초기부터 2025년 11월 30일까지 생산된 총회 자료, 세미나 발제문, 행사 사진 및 영상 등 총 178개 폴더, 1만7432개 파일이 디지털 저장 매체에 담겨 시조 문학사의 사료적 가치를 더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서석조 부의장의 경과보고에 따르면, 준비 기간만 꼬박 10개월이 걸렸다. 2025년 2월 정기총회에서 사업 승인을 받은 후, 4월부터 회원들의 작품을 공모했고, 10월에는 타임캡슐 전문 제작업체인 ㈜한국이미지와 계약을 체결했다. 캡슐은 땅속 습기와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내구성이 강한 스테인리스 재질로 제작했으며, 외부 충격을 막기 위해 폴리에틸렌(PE) 이중벽관 내부에 안치하는 등 철저한 보존 처리를 했다.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창립50주년 기념 타임캡슐 오석 표지석. [사진 | 뉴스페이퍼]
행사가 열린 장소의 의미 또한 남달랐다. 장소를 제공한 이지엽 시에그린한국시화박물관장은 환영사를 통해 "진도는 예로부터 시詩ㆍ서書ㆍ화畵ㆍ창唱의 고장이라 불리며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지만, 상대적으로 문학적 인프라는 약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이 관장은 "오늘 100년의 시간을 품는 이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진도가 명실상부한 문학의 성지로 거듭나고, 우리 시조가 유네스코 등재를 넘어 세계 정상의 문학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매설식 후에는 참석자들이 캡슐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검은색 오석烏石 표지석을 어루만지며 기념촬영을 했다. 표지석에는 "이 봉인은 한 시대의 시조시인들이 이 땅에 남기는 약속으로, 시간의 벽을 넘어 새로운 시조의 상상력을 깨우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오종문 의장의 말처럼 "텍스트는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날 진도 땅에 묻힌 것은 1만7000여개의 파일과 수십 권의 책이었지만, 진정으로 봉인된 것은 "우리는 이렇게 살고,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치열하게 기록했다"는 이 시대 문인들의 뜨거운 심장이었다.

타임캡슐은 정확히 50년 후인 2075년 12월 6일,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창립 100주년 기념일에 개봉한다. 그때 이 캡슐을 열어볼 미래의 시인들은 2025년의 선배들이 보낸 편지「푸른 별로의 귀환」을 읽으며 어떤 대화를 나눌까. 진도의 겨울바람 속에 묻힌 약속이 50년 후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 한국 문학사는 설레는 기다림을 시작했다.

이민우 문학전문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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