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디스 버틀러 “상황 악화 때 피난처 고민… 그러나 나는 특권 누리는 사람” [.txt]
“지난 1년 목격한 추방 사례들은 ‘소름’
반차별이 이제 반동적 우익의 도구 돼
억압자가 차별을 국가적 필수 과제로 시행”
“불안정한 삶이란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삶
모든 생명이 애도받을 수 있는 곳이 돼야”

“서로에게서 힘을 찾고, 개인주의와 영웅주의와 우울함에 맞서고, 지역적인 공동체를 구축하며, 지적 삶과 예술의 세계와 다언어주의를 만끽하세요. 함께 상상하고, 함께 꿈꾸며, 삶의 방식으로서 집단적 용기를 키워가십시오.”
주디스 버틀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비교문학과 석좌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한겨레와 독자들에게 다정한 새해 인사를 서면으로 보내왔다. 버틀러는 1990년 ‘젠더 트러블’로 젠더·퀴어 이론의 새로운 장을 연 정치철학자다. 이후 ‘젠더 허물기’, ‘혐오발언’, ‘위태로운 삶’, ‘비폭력의 힘’(모두 한국어판 제목) 등을 통해 일관되게 ‘살 만한 삶’과 상호의존성을 힘주어 말했다. 흔히 그는 ‘젠더 이론가’로 평가되지만, 그의 철학은 급진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누가 상처와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지, 누가 애도 받을 존재로서 지위를 갖지 못하는지에 꾸준히 질문의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계와 정치권력 집단은 그의 이론에 오해와 오독을 뒤집어 씌워 성별질서를 교란하는 프로파간다라며 지탄과 공격을 퍼부어댔다.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그의 신변에 위협이 가중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조사를 벌였고 버틀러가 재직 중인 유시버클리는 학생과 교직원 명단을 정부에 넘겼다. 유시버클리는 진보 성향이었던데다, 반트럼프 노선을 분명히 한 개빈 뉴섬 주지사가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충격을 더했다.

2024년 버틀러가 미국에서 펴낸 책의 제목인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라는 질문에, 트럼프는 사상 검열과 위협으로 응답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세계 전역의 ‘반젠더 운동’이 일으키는 불안과 공포를 폭로하고 신흥 파시즘이 휘두르는 권력을 비판했다. 특히 진보적 이미지를 가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바티칸과 극우 성향의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보수 반젠더 운동 세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젠더’가 문명과 ‘인간’(남성)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았으며 트럼프는 ‘젠더’를 국가안보, 이성애결혼, 규범적 가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적개심을 조장했다. 버틀러는 젠더에 대한 이런 두려움을 ‘판타즘’(phantasm, 허깨비)에 근거한 구조로 파악한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문학동네)의 한국어판 출간 직후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며 지난 연말 한겨레는 22개의 질문을 보내 이 중 응답이 가능한 것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는데, 버틀러는 질문 모두에 대한 답변을 보내왔다. 안부를 묻는 말에 그는 “개인적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피난처를 어디로 할지 고민해왔다”면서도 “가능한 한 학문의 자유를 명확히 하고 수호하려 한다”고 담담히 밝혔다. 또 “나는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미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위험에 처한 이들은 이민자, 국제 비자로 체류하는 학생들, 그리고 의료 서비스와 저렴한 교육 기회를 포함한 사회 복지 혜택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버틀러는 “(트럼프 재집권 뒤) 지난 1년간 목격한 추방 사례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 번역은 책을 옮긴 윤조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맡았다.

“우리 중 누구도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폭력의 장면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교육 지원을 의무로 삼고 있음에도 대학들을 협박해 왔습니다. 일부 주에서는 교육 현장에서 ‘젠더’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학계 내 젠더 연구는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위한 젠더 확정 의료서비스 금지 조치나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법적 권리가 박탈된 것도 소름끼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입니다.”
버틀러는 “엘지비티큐플러스(LGBTQ+) 세계와 삶의 지식이 청소년에게 해롭다는 주장이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박탈하는 것 자체가 해악”이라며 “정체성이 언제 완전히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반젠더 캠페인에서 ‘젠더’는 소아성애를 가리키는 암호이자 아이들에게 자위 방법이나 동성애자가 되는 법을 가리키는 세뇌 쯤으로 취급된다. 미국과 한국 등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버틀러를 가리켜 ‘소아성애자’라 비난하고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201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학회에 참석했을 때는 버틀러의 모습을 한 인형이 마치 중세 마녀사냥하듯 불태워졌다. 버틀러는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머문 직후 살해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레유 프랑코처럼 사회주의나 레즈비언 정체성, 흑인 정치 참여 때문에 살해 당한 빈민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지금처럼 정치, 종교 권력이 알 권리와 학문의 자유를 위협할 때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은 “비판과 상상력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우리는 ‘반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이 점점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양상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복잡성을 긍정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인터섹스이거나 출생시 지정된 생물학적 성별과 실제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는 성별이 엄격하고 상호 배타적인 이분법적 대립보다 스펙트럼이나 모자이크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공산주의자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였던 한국 사회는 이제 ‘젠더’까지 연결시켜 낙인을 강화한다. 2024년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이 공산주의 혁명에 이용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해 윤석열은 계엄의 이유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들었다. 윤석열의 계엄 12시간 뒤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21과 만났던 버틀러는 “(계엄 때문에) 윤석열이 정권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당시 버틀러는 윤석열의 계엄을 “고백”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버틀러는 “정치적 영역을 이해하는 데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특정 유형의 정치적 비난에는 전이와 투사의 메커니즘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국가 파괴자로 규탄하지만, 그 비난 자체가 바로 그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죠. 특히 범죄화 형태를 띠는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누가 국가에 속하고 속하지 않는지, 누가 모든 권리를 가져야 하고 누구에게는 권리를 제한해야 하는지를 규정하죠. 이런 규정은 외국인 혐오나 인종주의의 한 형태이며, 점차 군사화된 국경, 수용소, 그리고 국제법상 난민 신청을 할 권리가 있는 이들에 대한 범죄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버틀러는 ‘안정된’ 가부장적 질서로 회귀하길 바라는 종교나 국가권력이 공포를 자극하며 구원과 회복의 세력인 양 등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인구 위기와 생명 존중을 빌미로 정작 임신·출산의 당사자인 여성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버틀러는 “임신중단에 대한 도덕적 논쟁 중 일부는 생식을 통제하려는 교회와 국가의 시도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계엄의 이유로 삼았던 ‘척결’과 ‘뿌리뽑기’ 같은 용어는 위태로운 삶을 제거하는 국가 폭력의 양상을 감추고 ‘사회정화’와 안전의 뜻을 획득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협소하고 이성애 중심적인 가족 개념과 생식 자유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의존하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젠더 이데올로기를 ‘뿌리뽑는다’는 언어를 접할 때, 우리는 민족주의가 (특정 집단의 제거를 통한 공동체의)‘정화’라는 형태를 취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미국에서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기존 판결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최근 뒤집힌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때 그들은 여성과 임산부의 재생산 자유를 제한하는 데 ‘강력한 국가적 이익’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는 이들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 공정한 걸까?”라고 질문했다.
“국가, 특히 민족주의는 이성애 결혼을 기반으로 한 가족과 국가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국민’을 재생산하는 데 달려있다는 점을 정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임신에 대한 국가 통제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국가의 재생산이 보장되도록 하는 한 방법입니다. 생식의 자유 문제에서 여성의 자율성을 범죄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용어는 혼돈에 빠져들었다. 페미니스트들은 ‘페미 나치’로 불리고, ‘젠더’는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극우의 러브콜을 받는다. ‘해리 포터’를 쓴 작가 조앤 롤링은 영국의 트랜스여성 앵커를 트위터(현 ‘X’)에서 ‘남성’이라 지칭해 평등법 위반으로 고소당했다. 버틀러는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즘’(터프, TERF)이 스스로를 ‘비판적 페미니즘’이라 칭하는 것을 가리켜 “모순된 용어”라고 지적하며 “진보적 가치관을 자랑하는 유럽은 가장 정치적으로 반동적 입장을 보이며,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즘을 우익 민족주의적 가부장제 운동과 연결시키는 것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용어의 혼란이 극심해져 ‘자위’라는 명목으로 집단학살이 자행되고 ‘여성 보호’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고, 용어의 혼란이 더해지면서 민주주의와 정의는 미궁으로 빠져든다.
“요즘 우리는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고 봅니다. ‘페미니즘’이 트랜스 권리를 반대하거나, 트랜스 권리와 페미니즘적 권리·자유를 모두 반대하는 우익 운동에 가담하는 변명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반차별’이 이제 반동적 우익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억압자는 이제 억압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들은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추구하는 이들에 맞서 억압할 권리를 유지하고 행사하고자 합니다. 억압적 권위주의는 이제 ‘반차별’을 무기화하여 차별을 국가적 필수 과제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2023년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가자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한 보복을 두고 ‘원칙적으로 정당한 행위’라며 옹호하고 독일 지식인들이 줄줄이 동의하면서,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와 동료들이 이를 반박하는 성명을 냈을 때였다. 독일 대학은 프레이저의 초청을 취소했고, 버틀러는 프레이저를 지지했다. 그는 “경력주의를 제쳐두고 도덕적 원칙을 선택한 모든 이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국가와 군대는 종종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기반 자체를 겨냥한 학살적 공격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이를 ‘집단학살’이 아닌 ‘자위’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자위’라는 명목 아래 집단학살이 자행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라는 상상 속 시나리오가 무고한 아이들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을 죽이는 근거가 됩니다.”
점점 더 교묘하고 지능화하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 버틀러는 여전히 위태로운 삶과 생명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첫 책인 “‘젠더 트러블’조차 생존 가능한 삶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불안정한 삶이란 상처와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그런 의미에서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삶이란, 그들이 애도받을 존재로서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 생명이 사라져도 상실로 간주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세상은 모든 생명이 애도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은 동물들의 삶과 생명의 과정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생명의 독립성이 등장합니다. (불안정의 시대에) 상호 돌봄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변혁적 정치 운동이 등장할 수 있는 원칙을 구현하는 연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인터뷰 번역 윤조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이하 인터뷰 전문

개인적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피난처를 어디로 할지 고민해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훨씬 더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경제적 자유를 바탕으로 그런 플랜 B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나의 활동은 주로 학계에서 직위를 잃거나 검열당한 이들을 지원하고, 추방을 반대하며 정부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단체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되어 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평화를 위한 유대인 목소리’(Jewish Voice for Peace)에서 활동하며, 가능한 한 학문의 자유를 명확히 하고 수호하려 합니다. UC 버클리의 조치는 유감스러웠지만, 그들이 우리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우리의 이름이 반유대주의 관련 파일에 기록되어 있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 파일을 볼 수 없었기에, 그 안에 어떤 혐의가 담겨 있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는 반성별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 출간되어 특히 시의적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적 운동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 쏟을 수 있는 에너지를 소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발에 대응하는 것과 새로운 민주적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작업을 지속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가고 있나요?
“다시 한번 깊이 있는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은 비판과 상상력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반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이 점점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양상을 추적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복잡성을 긍정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성별이 반드시 이분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인간 삶의 살아 있는 복잡성에 하나의 구조를 강요하는 것이며, 이는 동물계의 형태에서도 반영됩니다. 실제로 트럼프가 성별이 이분법적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이 일치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으며 강요되고 강제되어야 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이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인터섹스이거나 출생시 지정된 생물학적 성별과 실제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는 성별이 엄격하고 상호 배타적인 이분법적 대립보다 스펙트럼이나 모자이크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지정된 성별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느끼고 싶어 하지만, 확장되고 수정된 자연 개념을 통해 우리는 역동적 상호작용과 발달적 복잡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발생생물학(developmental biology)이 오랫동안 확인해 온 바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결정적 요소로 여겨지는 우리의 유전자조차도, 우리 몸이 후성유전학적 단계를 거치거나 문화적 현실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며, 성별은 자연적이고 젠더는 이차적 현실이라고 단호히 주장하는 자연과 문화의 엄격한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자연적”인 것은 바로 이 둘의 상호작용, 역동적인 교류입니다.”
-현대 반젠더 운동은 반지성주의의 광범위한 부활과 깊이 얽혀 있으며, 종종 근거 없는 주장과 일관성 없는 논리를 동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러한 주장을 단번에 일축하지 않고, 지속적인 이론적 엄밀성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이성을 듣지 못하거나 다른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이유로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상한 일입니다. 타인이 우리의 주장에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듣는 가능성에 닫혀 있다는 뜻입니다. 혹은 우리의 주장이 들릴 수 있도록 하는 언어나 문화적 번역의 형태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논증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며, 설득력 있는 소통 매체에 의존합니다. 때로는 '밈'이 논증을 하기도 하고, 단편 소설이나 사진이 논증을 하기도 하고요. 반젠더 운동에 던지고 싶은 질문 중 하나가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라면, 우리의 논증은 그 세상의 구체적 사례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어, 이미지, 노래, 춤 등 우리가 활용하는 매체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구현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의 견해로는 미학적 영역이야말로 추상적 원리를 감각적 현실이자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데 핵심적입니다. 철학자의 소명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 sophia)입니다. 이는 그들이 지혜와 진리를 무엇이라 규정하는지 단순히 진술하거나 논증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그들의 논증을 제시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우리 중 많은 이들, 열린 지적 탐구를 추구하며 생태적 상호의존성을 윤리의 기초로 확립하고자 하는 이들, 추방, 인종주의, 반젠더 운동에 반대하는 이들 모두에게, 급진적 민주주의와 같은 이상이 바람직한 이유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상상력의 작업, 그 다양한 형태들, 그리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힘들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민주적 형태들이 우리가 함께 살고자 하는 세상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를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로 2017년 브라질 방문 당시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당신의 인형이 불태워졌고 당신과 당신의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 교수 모두 신체적 폭력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려움이 밀어닥칠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주로 하나요?
“박해의 순간을 헤쳐나갈 힘은 지지와 격려를 제공하는 사회적·지적 운동의 일원이 된다는 데서 나옵니다. 또한 자신 안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게 자아는 이미 수많은 존재가 모여 있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이제 제 목소리와 어우러지는 친구들과 동지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날 수 있었지만, 리우에서 제가 머문 직후 미레유 프랑코(mireille franco)처럼 사회주의나 레즈비언 정체성, 흑인 정치 참여 때문에 살해당한 빈민가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다시 말해, 저는 특권층입니다. 물론 특권층조차도 권위주의적 탄압과 박해의 잔혹함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긴 했지만요.”
-작년 12월3일 한국에서 당신은 윤석열의 계엄 현장을 겪었고 다음날 저와 한 인터뷰에서 윤의 계엄 이유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권력의 수사나 폭력적인 시도를 ‘고백’으로 보는 것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특정 유형의 정치적 비난에는 전이와 투사의 메커니즘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봅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국가 파괴자로 규탄하지만, 그 비난 자체가 바로 그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죠. 특히 범죄화 형태를 띠는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누가 국가에 속하고 속하지 않는지, 누가 모든 권리를 가져야 하고 누구에게는 권리를 제한해야 하는지를 규정하죠. 이는 외국인 혐오나 인종주의의 한 형태이며, 점차 군사화된 국경, 수용소, 그리고 국제법상 난민 신청을 할 권리가 있는 이들의 범죄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와 군대가 종종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유대인 모두의 죽음을 원한다고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기반 자체를 겨냥한 학살적 공격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이 행하고 느끼는 바로 그 행동과 감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함으로써, 자행 중인 집단학살을 부인하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외부화합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이를 “집단학살”이 아닌 “자위”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자위”라는 명목 아래 집단학살이 자행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위권이 보편적 권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위권은 부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의 비난은 집단학살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상상 속 시나리오)는 무고한 아이들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인을 죽이는 근거가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향해 제기한 소아성애 혐의를 보세요. 이는 외부화와 투사를 통해 표현된 일종의 '고백'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영역 내에서 정신분석학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성폭력을 완전히 인정하거나 치유하지 못한 기관이, 대부분 비폭력과 돌봄의 윤리를 핵심 가치로 삼는 집단에게서 자신들의 범죄 증거를 찾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말입니다.”
-왜 ‘진보적’이라고 자임하거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 운동과 연관되어 온 인물들이 성별과 성적 지향에 관해 권위주의적·보수적 세력의 입장과 유사하거나 때로는 이를 직접적으로 증폭시키는 주장을 그토록 자주 재생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아가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임신중단 행위에 강한 반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부가 임신중단을 반대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국가, 특히 민족주의는 이성애 결혼을 기반으로 한 가족과 국가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국민’을 재생산하는 데 달려있다는 점을 정부가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임신에 대한 국가 통제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국가의 재생산이 보장되도록 하는 한 방법입니다. 국가 통제 자체가 가부장적이며, 따라서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합니다. 또한 생식 자유 문제에서 여성의 자율성을 범죄화하는 것 역시 이러한 통치 형태에 부합합니다. 임신중단에 관한 정당한 도덕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중 일부는 교회와 국가가 생식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미국 대법원이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기존 판결인 로 대 웨이드 사건을 뒤집을 때, 그들은 여성과 임산부의 재생산 자유를 제한하는 데 '강력한 국가적 이익'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국가적 이익’이 정확히 무엇일까요? 한국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교회 교리가 이제 국가 정책을 지배하도록 국가가 교회와 합쳐진 것일까요?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는 이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이 공정한한 걸까요? 임신중단은 의료 접근성을 포함한 수많은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이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를 구성합니다. 가난한 여성이나 가난한 트랜스 남성은 임신중단을 할 수 없는데 부유한 여성들은 사설 병원을 통해 임신중단을 할 수 있다면, 이러한 금지 조치는 어떤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러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을 포함하는 자유와 정의를 바탕으로 자율성에 대해 재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부장적 통치가 지배 형태가 되고, 가부장제가 권력의 형태가 됩니다.”
-젠더를 둘러싼 담론은 왜 이렇게 폭력적 충동을 자극할까요? 당신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윤조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옮긴이 후기에서 지적했듯이, 이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성적 존재로서의 취약성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우리 몸에 대해 결코 완전한 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취약성 말입니다. 성별에 대한 반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성적 존재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네, 윤조원 교수의 주장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제 생각엔 젠더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한,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아온 젠더 감각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개인의 젠더 감각을 빼앗거나 변화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젠더 자유 운동은 단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젠더 감각을 편안하게 지니며 살 수 있도록 하고, 그 감각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하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젠더가 누구의 정체성에도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이들이 이미 겪고 있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평등을 지지하기 때문에, 혹은 사람들이 성희롱이나 범죄화 없이 자신의 성별을 구현하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젠더를 긍정할 것입니다. 윤조원 교수가 말하듯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은 불평등의 상태입니다. 윤조원 교수는 「백래시 시대의 불가능한 페미니즘」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지요. “반페미니즘의 가장 노골적인 증상 중 하나는 기존 불평등의 부인이다. 그래서 그런 부인은 항상 그 본질을 드러낸다. 이는 오늘날 한국 페미니즘의 독특한 신자유주의적 조건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페미니즘을 동원해 구조적 문제에 무관심한 자본주의 주체로서 여성의 개인적 역량 강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 정치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는 체계적 불평등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 (윤조원, 「불가능한 페미니즘(Impossible Feminism in the Era of Backlash)」, 2022년 6월) / https://caarchives.org/impossible-feminism-in-the-era-of-backlash/)”
-뉴욕 맘다니 시장의 등장은 반젠더 세력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보십니까?
“조란 맘다니는 선의의 힘이자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증오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특히 드러나거나 불안하게 느낀 사실이나 정치적 전략이 있었나요? 반젠더 운동의 글로벌한 범위와 협력과 관련해 당신이 놀란 점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반젠더 운동이 번성하는 곳과 거의 무시당하는 곳 모두를 알게 되어 놀랐습니다. 진보적 가치관을 자랑하는 유럽이 이 문제에 있어 가장 반동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이며,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즘(모순된 용어)을 우익 민족주의적 가부장제 운동과 연결시키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일본에서 유교와 반젠더 운동의 교차점을 알게 된 점도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그것이 급진적 자유의 교리’라는 젠더에 대한 모순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교리입니다! 반젠더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 운동의 모순된 측면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혐오발언’(‘Excitable Speech’, 1997)에서 대안적 발언으로서의 대응 발언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혐오발언이 차별을 실행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법적, 제도적 규제보다는 언어를 통한 맞대응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혐오발언에 대해 국가적 개입과 규제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요?
“또 다른 좋은 질문입니다. 분명히 ‘혐오 발언’에서는 디지털 환경, 특히 피해를 입히려는 자들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신상털기(doxing) 및 괴롭힘 방식까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반론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국가가 제가 우려했던 바를 실제로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들이 이제 인종적·성적 소수자들을 상대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그 법들은 소수자들을 해치려는 자들, 혹은 언어로 적극적으로 해를 가하려는 자들의 발언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고 있죠. 트럼프와 그의 동맹들에 따르면, 이제 차별로부터 가장 보호가 필요한 이들은 백인 남성, 백인 남아프리카인, 그리고 기독교인들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나치’라 불리거나 팔레스타인인들이 '나치'라 지칭되는 것은, 성별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이 긴급한 저항운동처럼, 원치 않는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투쟁인 것처럼 포장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반이민 정책 및 추방 계획과 명백히 연결됩니다. 국가가 증오 발언을 규제하기를 원한다면, 국가 자체가 가장 강력한 증오 발언자 중 하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저작은 예전 저작보다 ‘쉬운 언어’를 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더 많은 이들을 공략하기 위한 수사적인 전략이었나요?
“내 작품을 무시하려는 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할 것입니다. 내가 도달하고자 한 독자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인터넷이나 지역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데, 잘못된 정보를 접하거나 '젠더'라는 개념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 본질적이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위협한다고 믿게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고 반(反) 젠더 선전에 의해 불안감이 증폭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책머리에서 ‘아직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젊은이들에게’라고 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종종 젊은이들이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표현을 창조하고, 다른 언어를 찾아내는 방식을 경탄하면서 얘기하곤 하는데요.
“해당 분야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젠더 연구의 최신 동향을 일부 연구해야 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추구할 수밖에 없는 언어와 삶의 실험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아가는 법은 무엇인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묻고 있습니다. 다수의 청년 공동체에 비관주의가 만연하다는 걸 알기에, 이런 실험적 흐름을 흥미와 호기심으로 마주합니다. 이는 근본적 가치에 대한 탐구이자, 그들이 물려받은 세상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치유와 정의의 정신으로 아직도 해낼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질문들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육과 사유의 기회가 제한되는 것에 당신은 반대합니다.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당신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정체성이 언제 “완전히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거의 70세에 가까운데, 제 성격의 특정 측면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지만 다른 차원들은 여전히 변화의 여지가 있습니다. 성별과 성적 지향을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채택한 범주보다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가장 잘 설명됩니다. 범주는 항상 축약된 표현일 뿐입니다. “나는 X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런 발언을 한 사람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그 말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는 성별과 성적 지향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항상 동성애적 성향이 잘못되었거나 비정상적이며 심지어 죄악이라고 생각해왔을 수 있지만, 학습과 경험을 통해 동성애자들의 동등한 인간성을 인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변했습니다. 정체성이 변한 게 아니라 해악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일 수 있습니다. 엘지비티큐플러스(LGBTQIA+) 세계와 삶에 대한 지식이 청소년에게 해롭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해악을 막고자 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박탈하는 것 자체가 해악입니다. 지식의 박탈은 해악이며, 결국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우리는 책과 영화를 통해, 심지어 불편하고 도전적인 작품들조차도, 사람들이 그 안에서 제시되는 가치들을 구분하고 스스로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젠더’는 또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기호로 전유되고 있습니다. ‘위태로운 삶’에서도 당신은 부시 행정부가 페미니즘을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알리바이 중 하나로 내세웠던 것을 비판했습니다. ‘반젠더 운동’과 ‘젠더 전유’가 공존하는 상황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요즘 우리는 두 가지 별개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고 봅니다. “페미니즘”이 트랜스 권리를 반대하거나, 트랜스 권리와 페미니즘적 권리·자유를 모두 반대하는 우익 운동에 가담하는 변명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일부는 페미니즘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거나 트랜스젠더로부터 페미니즘을 보호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신념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우리 중 누구라도 모든 소수자의 권리가 모든 다수자의 권리와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대안적 비전을 인내심 있게 제시하고 있나요? 두 번째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반차별'이 이제 반동적 우익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억압자는 이제 억압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데, 이는 그들이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추구하는 이들에 맞서 억압할 권리를 유지하고 행사하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용어의 혼란이 만연해져, 자위라는 명목으로 집단학살이 자행되고 여성 보호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이 병리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법적 지위와 의료 접근권을 동시에 상실하고 있으며, 억압적 권위주의는 이제 '반차별'을 무기화하여 차별을 국가적 필수 과제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가자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한 보복을 ‘원칙적으로 정당한 행위’로 옹호했을 때 독일의 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반박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고 독일의 대학 초청을 취소당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나는 낸시 프레이저를 지지했으며, 경력주의(careerism)를 제쳐두고 도덕적 원칙을 선택한 모든 이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떤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본인은 트랜스 여성들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우익의 담론에 동조합니다.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은 젠더를 근거로 한 차별에 반대합니다. 반트랜스주의자들은 바로 그 차별을 실행합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페미니즘이라면 반드시 트랜스 긍정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양 집단 모두 우파의 표적이 되고 있기에, 다양한 취약한 소수자들을 겨냥하는 우익 세력들과 거래하는 것보다 우리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의 책들은 취약한 존재들의 정치적 저항성을 지지하기 위한 곳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젠더 이론가’로 의미화되는 것보다 선명한 주장을 펼치는 정치철학자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맞습니까?
“네, 그렇게 설명해도 괜찮습니다. ‘젠더 트러블’조차도 살 만한 삶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애도 그 자체가 충분한 정치는 아니지만, 유용한 정치 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합니다. 즉, 슬픔의 인정입니다. 불안정한 삶이란 상처와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그런 의미에서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이 애도받을 존재로서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 생명이 사라져도 이는 상실로 간주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세상은 모든 생명이 애도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인간의 삶은 동물들의 삶과 생명의 과정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생명의 독립성이 등장합니다.”
-국가가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인정한다면 갈등이 어느정도 해결되리라고 보십니까? 이는 문화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영향에 저항하는 경제와 공공서비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국가의 인정을 확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의심할 여지없이 반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가족이 단일 형태만을 취한다고 믿는 이들은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가족이란 특정 친족 조직 형태인데, 이는 문화와 역사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혼, 별거, 부모 사망 등으로 인해 수많은 가족이 재구성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도 다른 어떤 형태와 동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지닙니다. 아이들은 사랑받으며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성장하고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터득해야만,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그 세상을 건설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지원 체계도 제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가족 형태를 병리화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이 발생하면, 그 가족의 아이는 자신의 가족을 비하하고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그런 노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어떤 아이도 그런 일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법적 인정은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종교, 의료, 교육 기관을 변화시켜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고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양육되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는 것 역시 똑같이 중요할 것입니다.”
-분단을 겪은 한국 사회는 과거 공산주의자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혐오하고 배제했으나 이제는 ‘젠더’에 딱지를 붙이고 배제하고 있습니다. 과거 냉전 시절 공산주의가 우파가 활용하는 종합적이고도 파괴적인 힘을 가진 ‘판타즘’이었다면 이제는 세계적으로 ‘젠더’가 판타즘이 되었습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협소하고 이성애 중심적인 가족 개념과 생식 자유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의존하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젠더는 이성애 중심적 이상에 부합하도록 조정되어야 하며, 둘 다 국가에 대한 침입이나 오염으로부터 그 국가를 “방어”하는 방식으로 민족국가의 재생산에 기여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나 젠더 이데올로기를 '뿌리뽑는다'는 언어를 접할 때, 우리는 민족주의가 정화의 형태를 취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민족적 순수성은 적을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위협으로 외부화하는 파시즘적 열정의 슬로건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조건 하에서 국가는 종교적 규범과 국가적 자위라는 두 가지 명분으로 억압적 조치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윤석열의 파시즘적 시도를 제지하기 위해 힘을 보탰던 젊은 여성들과 소수자 집단은 정권 교체 이후로도 가장 외곽으로 밀려났습니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보답 없는 투쟁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요?
“정치적 패배의 시기에는 서로를 향해 돌봄의 공동체와 상호 지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새롭게 부활하는 사회 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됩니다. 그런 시기에도 우리는 공동체를 계속 건설하고, 연대를 맺고, 읽고, 모이고, 전략을 세웁니다. 지배 권력의 운영에 균열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균열은 새로운 정치적 출현과 헤게모니 권력 이동의 기회입니다. 진보적 종교 공동체 집단이 반동적 집단과 맞서 싸우고 있는지, 국가 문화와 젠더 규범의 변화가 의회 정치 수준에는 반드시 반영되지 않는 차원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모든 반민주적 정권은 잠재적으로 민중에게 위협받기에, 그들에게는 억압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억압적 행동은 모두 두려움의 '고백'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없이는 어떤 정부도 국민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불안정성 위에 있지만 희망 또한 있습니다. 이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상호 원조와 지역적 연대의 형태는 국내적·초국가적 연대의 형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시기에 공개 세미나, 문화 행사, 의료 지원, 교통 및 식량 지원 등을 통해 상호 돌봄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변혁적 정치 운동이 등장할 수 있는 원칙을 구현하는 연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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