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제국 움직이는 에너지라면, 번역천재 AI 시대는…

2026. 1. 10.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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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SF 사고실험실’
SF(과학소설)는 주류 문학과는 먼 아웃사이더였다. 이젠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새 소설(『클라라와 태양』)도 SF다. 어느덧 인공지능(AI)·로봇·우주여행·유전자편집 등 과학 기술 시대에 인간성을 사고하는데 최고의 장르가 됐다. 이런 SF를 통해 강양구 지식큐레이터가 “현재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한 사고 실험”(어슐라 K 르귄)에 나선다.

『바벨』 원작 표지 이미지.
한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나만의 ‘올해의 책’을 정하는데, 책 읽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렇게 정한 열 권 남짓한 책 가운데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책도 몇 권 끼어 있다. 불과 한 달 전에 선정한 열두 권 가운데 유일한 소설이었던 R F 쿠앙의 『바벨』도 그랬다.

1996년생이니 올해 만 서른이 되는 작가가 20대 중반에 펴낸 『바벨』(2022년)은 정말로 놀라운 소설이다. 때는 1830년대. 한반도에서는 정조가 죽고 나서 순조와 헌종이 잇따라 왕위에 오를 때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상황. 중국 청나라의 상황도 간단치 않다. 1839년에 그 유명한 아편 전쟁이 시작하니까.

R F 쿠앙(왼쪽)의 『바벨』(문학사상·2025).
하지만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영국 옥스퍼드대가 주요 무대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인도를 지배하는 ‘제국’의 반열에 올랐다. 산업혁명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증기기관과 방적기·방직기가 본격적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번역이 제국 인프라 떠받친다는 상상력
여기까지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바벨』은 여기에 허구를 입힌다. 콜레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1829년 광둥성. 어머니를 잃고서 고아가 된 한 중국 소년이 영국 교수에게 스카우트되어서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갈 기회를 잡게 된다. 그 교수는 중국어(광둥어와 만다린 어)에 능통하면서 영어까지 잘하는 이 소년을 팽창하는 영국 제국의 인재로 키우고자 한다.

소설 속 옥스퍼드대에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하는 가상의 기관 ‘번역원’이 있다. 이곳의 별칭이 바로 ‘바벨’이다. 성서 속 바벨탑이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심판으로 언어의 분리를 가져왔다면, 소설 속 바벨은 거꾸로 제국이 전 세계의 언어를 다시 한 곳으로 수집해 권력의 탑을 공고히 쌓아 올리는 탐욕의 장소다.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 위해 광둥성에서 영국으로 온 중국 소년은 ‘로빈’이라는 이름을 받고서 혹독한 훈련 끝에 그 번역원에 신입생으로 들어간다. 이미 번역원에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세계 곳곳에서 ‘수집’되어 온 언어 천재가 여럿 있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생길 테다. 도대체 왜 번역원이 제국의 심장일까? 저자는 이 대목에서 극단의 상상력을 밀어붙인다. 로빈 같은 번역원 소속 학생과 교수가 수행하는 번역은 단순히 세계 각국의 언어를 영어로 옮겨서 제국을 유지하는 일을 돕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번역을 이용한 ‘은 마법(Silver working)’! 번역은 실제로 군사·물류·산업 등의 에너지원이 된다.

이 에너지의 원천은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번역 불가능한’ 뉘앙스 차이다. 이를 테면 영어 ‘shoot’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총이나 대포를 ‘쏘다’다. 하지만 영어 ‘shoot’에는 ‘쏘다’ 외에도 ‘적중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즉, ‘shoot’을 ‘쏘다’로 번역하면 ‘적중하다’라는 번역 불가능한 차이가 생긴다. 『바벨』의 세계에서는 은(silver)을 활용해서 ‘shoot’과 ‘쏘다’의 번역 사이에서 사라지는 ‘적중하다’를 에너지로 추출할 수 있다(이게 바로 은 마법이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런 은 마법이 적용된 총이나 대포는 적중률이 높아진다. 소설 속에서 영국 제국은 은 마법을 군사·물류, 산업 등에 활용해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번역을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정밀한 기술로 바꾼 상상력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바벨』은 판타지를 넘어, 언어와 역사를 정교한 실험 재료로 삼은 거대한 ‘사고 실험’의 장이 된다. 현실의 전제를 뒤틀어 세계의 본질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SF 미학의 핵심(‘사고 실험’)을 보여준다.

이 지적인 실험을 뒷받침하고자, 당연히 소설 속에는 수많은 단어의 어원과 함께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과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영어 ‘nice’(착하다)는 라틴어 ‘nescius’(무지하다)에서 유래했다. (나는 앞으로 함부로 “나이스한 사람” 같은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난해한 소설이라 지레짐작하고 미뤄둔다면 커다란 실수다. 『해리 포터』를 읽고 자란 저자답게 『바벨』은 기숙사가 딸린 학교를 무대로 주인공과 그 동료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성장 소설로 녹여냈다. 물론, 묵직한 질문과 함께.

주인공 로빈만 하더라도 모국 중국을 상대로 한 아편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안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온 동기 ‘라미’는 영국으로부터 지배받는 모국의 현실에 뿌리 깊은 분노를 안고 있다. 182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이티 출신 ‘빅투아르’는 제국의 횡포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의 여성과 인종 차별도 참을 수 없다.

은 마법의 비밀을 하나둘씩 알아갈수록 ‘제국의 부역자’로서 이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마침, 이미 그들에 앞서 제국에 저항하는 번역원 출신 비밀 결사가 동참을 제안한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안락한 미래를 위해서 제국에 부역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할 것인가? 만약 저항한다면 그것은 여론 환기일까, 무력시위일까?

광저우 태생의 중국계이면서 조지타운대·케임브리지대·옥스퍼드대·예일대에서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를 공부한 저자는 이 모든 질문과 나름의 답변을 『바벨』의 모험담 속에 녹여냈다. 그것도 선악의 이분법 같은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로빈과 그 친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뿐만이 아니다. 증기기관과 방적기·방직기에 은 마법까지 가세하면서 19세기 산업 혁명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심하게) 수많은 노동자를 실업 상태로 몰아넣는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상황은 인공지능(AI)이 압도적인 기세로 인간의 자리로 들어오는 2026년의 모습과 겹친다.

고전 SF 작가 아서 C 클라크가 말했듯이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소설 속의 은 마법은 미래학자를 포함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여럿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다주리라 칭송하는 AI의 은유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또 다른 세상의 진실이 드러난다. 소설 속에서 은 마법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중상류층이다.

식민지 수탈구조 알게 된 번역가들 고뇌
제국은 은 마법을 이용해서 아편과 그것을 팔아서 획득한 은을 잔뜩 싣고 대양을 건너 지구 곳곳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산업화 초기의 증기기관과 각종 기계의 약점을 보완한다. 심지어 상류층 정원의 꽃나무가 사시사철 활짝 피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도 은 마법이 활용된다. 하지만 그 반대편은 어떨까?

시야를 지구 전체로 넓혀 보면, 마법에 기댄 군사력에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거나(인도) 아편 중독에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는 곳이(중국) 있다. 같은 영국에서도 은 마법 산업 혁명의 희생양이 되어서 실업자가 된 노동자가 삶이 뿌리째 흔들린 채 부글부글 끓는 증오의 대상을 찾고 있다.

은 마법 혁명 후의 소설 속 1830년대는 마치 AI 혁명과 함께 우리가 마주할 음울한 21세기의 예고가 아닐까. 은 마법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번역원에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가진 영국의 노동자와 식민지 출신의 로빈·라미·빅투아르는 과연 연대할 수 있을까.

이렇게 『바벨』은 ‘만약 ~라면 어떨까?(What If?)’ 같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고백하자. 나이 쉰을 앞둔 처지에 이 소설의 마지막 몇몇 대목에서 울었다. 민망해서 덧붙이면,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장면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동이었다.

◆뒷얘기=흔히 네뷸러상·휴고상·로커스상을 세계 3대 SF 문학상으로 부른다. 『바벨』은 네뷸러상·로커스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휴고상 주최 측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후보 명단에서 이 작품을 배제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원작의(‘얼음과 불의 노래’) 저자이자 살아 있는 ‘판타지 구루’ 조지 R R 마틴(77세)은 이런 박대를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압도적 추천 표에도 휴고상 투표용지에는 『바벨』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며 마틴은 자기가 제정한 알피상을 『바벨』에 주었다. 『바벨』이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지 보여주는 일화다. 쿠앙은 이후 『옐로페이스』(2023년)로 다시 성공을 거두면서 차세대 스타 작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강양구 지식 큐레이터.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23년 넘게 기자로 활동하면서 과학기술·보건의료·환경 분야를 취재했다. SF를 거울 삼아 정치·사회·경제·문화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았다.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과학의 품격』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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