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만 자 기록이 뒤집은 정희원 사건: 부분이 아닌 전체가 드러낸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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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2025년 12월, 한국 언론은 '저속노화' 전도사로 알려진 정희원의 추락을 확신했다. 노년내과 의사가 연구원에게 성적 요구를 강요했다는 전형적인 위력 성폭력 사건으로 단정했다. 한 언론은 '성희롱 카톡'을, 또 다른 언론은 '성적 요구 거부하면 자르겠다는 압박' 증언을 보도했다.

고발자는 정희원의 전 위촉연구원 A 씨였다. 하지만 이 사건의 관계는 언론이 그려온 '의사와 단순 연구원' 구도와는 달랐다. A 씨 측에 따르면, A 씨는 일반적인 연구원 업무가 아닌 정희원의 X(트위터) 계정을 관리했고, 7만 명 규모의 저속노화 커뮤니티를 운영했으며, 콘텐츠 기획도 했다. 정희원 역시 "A 씨가 내 계정이 인기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했다.
정희원은 A 씨를 성폭력 혐의로 고발받자 곧바로 A 씨를 스토킹 혐의로 맞고소했다. 서로가 서로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한 달 뒤, 상황은 또 한 번 뒤집혔다. 2026년 1월 6일, 디스패치가 공개한 것은 양측의 '주장'이 아니었다. 2023년 12월부터 2025년 7월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분석한 결과였다. 원고지로 2만 3000장, 46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에서 발췌한 대화들. 2년간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구분은 흐려졌고, 사건의 구조가 드러났다.
2023년 12월, X 계정 DM으로 시작된 기묘한 협업
2023년 12월, A 씨가 먼저 다가왔다. X(트위터)를 통해 DM을 보내며 자신을 서울대 출신 석사과정생이라고 소개했다. 책과 기사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첫 추천 도서는 안희정 사건을 다룬 '몰락의 시간'이었다.
정희원은 A 씨의 분석에 매료됐다. 그는 "내 머릿속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의료 지식은 자신이, 인문학적 감각은 A 씨가 담당하면 완벽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고 한다. 정희원은 "뇌를 좀 빌리고 싶다"며 위촉연구원 자리를 제안했다.

정희원은 "병원에만 있던 내게 온라인은 미지의 영역이었다"고 말했다. 2022년부터 X를 운영했지만 악플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A 씨의 조언을 받아 게시글을 올렸더니 반응이 좋았다. A 씨는 밈 전략을 제시했고, 충주맨을 벤치마킹하자고 제안했으며, 심지어 '이마를 가려야 악플이 줄어든다'며 헤어스타일까지 조언했다.
A 씨가 합류한 뒤 정희원 X 계정은 변곡점을 맞았다. 딱딱한 정보 전달에서 생활 밀착형 콘텐츠로 변신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야근과 당직에 시달리던 정희원에게, 악플을 걸러주고 SNS를 관리해주는 A 씨는 필요한 존재였다. 정희원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갑이 을에게 사과하는 관계: 2년간 반복된 패턴
'위력에 의한 성적 착취'라는 A 씨 측 주장의 핵심은 고용주-피고용인의 위계였다. 정희원이 해고권을 무기로 A 씨를 압박했다는 것.
디스패치가 분석한 대화는 정반대의 패턴을 보여줬다. 2년간 '사직'을 먼저 꺼낸 쪽은 A 씨였다. A 씨는 50회 이상 사직을 얘기했고 그때마다 정희원은 붙잡았다.

2025년 6월 20일 오전, 대화를 보면 A 씨는 7시 37분부터 11시 22분까지 메시지 폭격을 퍼부었다. 정희원의 정신과 치료를 조롱하고('정신과 약물 잔뜩 드셔야죠 파이팅! ㅋㅋㅋ'), 아들의 자폐 의심을 비하하고('선생님도 사회적 의사소통장애'), 협박했다('저 막가게 냅두지 마시죠. 아는 기자 많으니까').
정희원의 답변은 일관되게 저자세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단점들은 고치겠습니다."
이 대화가 오간 2024년부터 2025년, 정희원은 극도의 수면 부족과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의료계 파업으로 노년내과를 거의 혼자 책임졌기 때문이다. 대화를 보면 해고를 위협당한 쪽은 A 씨가 아니라 정희원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대화 패턴이 아니라, 2년간 반복된 관계의 구조였다.
"본격적으로 불륜을 해볼까요?"
최초 언론은 정희원이 A 씨에게 보낸 '성적 소설'과 '결박', '주인' 같은 단어들에 주목했다. 전형적인 위력 성폭력 구조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화 맥락을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성적 대화는 2024년 초, A씨가 정희원에게 성적인 사진을 보낸 것에서 시작됐다. A씨는 "본격적으로 불륜을 해볼까요?"라고 물었다. 텔레그램에서 A씨는 성적인 사진을 보낸 뒤 즉시 삭제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정희원은 이 시기 A씨가 차에서 내리면서 갑자기 입을 맞췄다고 주장했다. 정희원은 '그때 거리를 뒀어야 했지만, A 씨 도움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변명을 믿는 것과 별개로 공개된 대화들이 보여주는 것은 꽤 분명해 보인다. 성적 경계를 먼저 넘은 쪽, 관계를 주도한 쪽은 A 씨였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취약했던 정희원은 경계를 지키지 못했다.
'술과 혈당' 대화로 본 협업의 실체
또 다른 언론은 A 씨가 작성한 원고와 정희원이 쓴 칼럼이 첫 문장부터 일치한다고 보도했다. 일견 표지 갈이의 증거처럼 보였다. 정희원이 2024년 8월 "내 글의 졸렬함과 글을 도둑질해야 하는 비열함이 괴롭다"고 쓴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화를 보면 전체 작업 과정은 이것이 일방적 도용이 아니라 협업이었음을 보여준다. 2024년 1월 26일 대화에는 A 씨가 "술 마시면 혈당이 떨어지니까 가속노화 안주(단순당과 정제 곡물)를 먹어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닙니다. 술이 혈당을 낮추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방은 고스란히 내장에 쌓이게 됩니다"라고 적어 보낸다.

정희원은 "고쳐서 드릴게요. 술이 간의 포도당 생성을 저해해 혈당을 낮추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섭취하면서 들어온 열량은 고스란히 간과 복부지방, 근내지방에 쌓입니다. 혈당이 떨어지니 식욕이 늘고, 여기에 더해 알코올은 전두엽 기능까지 떨어뜨려 식욕억제가 풀리죠..."라고 서술해 다시 보내는 식이다.
A 씨가 아이디어와 초안을 제시하면, 정희원이 의학적 전문성을 더해 완성했다. 정희원은 이에 대한 대가로 월급 외에 4400만 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정희원은 '도둑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법적 자백이라기보다, 극도의 피로와 수면 부족 속에서 A 씨에게 의존했던 그가 느낀 도덕적 부채감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화 곳곳에 '내 잘못'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A 씨가 요구한 것은 2년 간 모든 수익이었다.
집 앞 실버버튼 선물부터 '살려달라' 메시지까지
2025년 6월 30일 정희원이 아산병원을 퇴사하며 A 씨 계약도 종료됐다. 그 이후 A 씨는 유튜브 촬영 현장에 예고 없이 출현했고, 정희원 아내의 병원에 연락했으며, 정희원의 집 앞에 3D 프린터로 만든 유튜브 실버 버튼과 편지를 보냈다. A 씨는 10월 20일 정희원 생일날 아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다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2025년 12월 10일, A 씨는 내용증명을 보내 2년 치 수익 전체를 요구했다. 정희원이 거부하자 A 씨가 "너를 사회적으로 자살시키겠다. 안희정처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희원은 12월 19일 보낸 "살려달라"는 메시지는 이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한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회유가 아니라, 사회적 파멸 직전에 내몰린 사람의 절박함이었다는 것이다.
2년치 대화가 드러낸 갑 같은 을, 을 같은 갑
대화 내용 보도 이전까지 이 사건은 전형적인 '말 vs 말' 구도였다. 12월 중순부터 일주일간 여러 언론이 양측의 주장을 각각 단독으로 보도했다. 정희원의 해명, A 씨 증언, 증거 자료들이 교차로 나왔고, 여론은 혼란스러웠다.
이번 대화 분석 보도는 이 파편화된 보도에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했다. A 씨 측은 "대화는 위력 관계 안에서 발현된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2년간의 대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패턴은 한두 번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구조였다.

공개된 대화 기록은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이야기와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의사-연구원이라는 위계 속 전형적인 위력 성폭력을 떠올렸다. 그러나 공개된 대화들 속에서 일방적 강제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A 씨가 압도적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새벽부터 밤까지 메시지를 보냈다. 2년간 축적된 대화의 압도적 다수가 A 씨가 먼저 보낸 것이었다. 피해자로 알려진 사람이 관계를 장악하고 있었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끌려다니고 있었다. 정희원과 A 씨의 관계는 단순한 가해자-피해자 구도보다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전문가와, 그의 취약점을 파악한 조력자 사이 기묘한 공생이었다.
정희원은 2024년 의료계 파업으로 노년내과를 거의 혼자 책임졌다. 1년 선배가 4월 퇴사했고, 8월 후배 교수가 당직에서 이탈했으며, 10월 선배 교수가 휴직했다. 한 달 13회 당직, 주 70시간 진료. 극도의 수면 부족 속에서 항우울제와 치료를 받으며 버텼다고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입원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약물로 견뎠다. 자살 사고가 반복적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의료 기록과 당직 기록을 볼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그의 고백은 과장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태 정희원에게 A 씨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온라인을 관리해주고, 대중과의 소통을 도와주며, 악플을 걸러주고, 심지어 사주와 타로까지 봐주는 사람. A 씨는 정희원에게 "저랑 대화하시면 도파민이 나오는지 궁금하네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화 기록을 보면, 정희원의 정신과 치료, 자살 사고, 업무 부담 같은 취약점이 관계의 긴장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됐고, 정희원은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대화 속에서 정희원은 갑 같은 을이었고, A 씨는 을 같은 갑이었다.

정희원은 2024년 3월에서 6월 사이 A 씨와 사적으로 친밀감을 느껴 교류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위력 성폭력을 부인했다. "A 씨가 차 안에서 일방적인 신체 접촉을 했고, 본인이 예약한 숙박업소로 데려가 마사지를 해줬다. 대만 학회에도 예고 없이 찾아왔다"고 주장했다.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정희원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서울시 건강총괄관직 사퇴, MBC 라디오 강제 종영, 호른 연주회 취소. CJ제일제당과 매일유업은 협업을 중단했고 그의 얼굴이 박힌 제품은 떨이 판매 중이다. 그가 쌓아온 사회적 자산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러나 A 씨 역시 '위력에 의한 피해자'라는 주장이 2년치 대화 기록에 의해 반박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부분만 보면 어떤 스토리든 만들 수 있다. 한 문장, 한 장면은 선택적으로 편집될 수 있다. 하지만 2년간 축적된 대화의 패턴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일방적인 강제였는가, 아니면 상호적인 공생이었는가. 착취였는가, 협업이었는가.
양측은 이제 법정에서 만날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대화를 분석하고, 증거를 검토하며, 증인을 심문할 것이다. 법이 최종 판단을 내릴 것이다.
저속노화를 설파하던 이들의 삶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가속 파멸했다. 정희원은 추락했고, A 씨는 고발자가 됐다. 그 과정에서 단편적 폭로들과 2년치 대화 분석은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렸다.
따옴표 안의 한 문장, SNS의 한 장면으로 우리는 사건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디스패치가 분석한 2년치 대화가 보여준 것은 부분과 전체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였다. 법정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은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파편으로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는가.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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