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말 타고 넘은 숲길, 수월한데? K트레일 매력, 산티아고와는 다르다
<1> 동서트레일 충북 보은군
보은, 괴산, 문경, 상주 208㎞
세조 말 갈아탄 '말티재 고개'
동서트레일 조성 상재리 마을
"한국 고유의 맛과 멋 숲길"
편집자주
한국일보가 849km의 ‘동서트레일’을 중심으로 지역 생존 전략을 모색합니다.

걷는 행위는 자신을 내려놓고 자아를 찾는 일에 비유된다. 속도를 늦추는 만큼 시야는 넓어지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질문과 답을 건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이 새해 계획 단골 소재가 되고, 그중에서도 걷기가 목록 상위를 차지하는 것도 몸과 마음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속리산둘레길은 이런 걷기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산이라는 뜻을 담은 속리산(俗離山)을 충북 보은, 괴산, 경북 문경, 상주에 걸쳐 한 바퀴 감는, 208km의 장대한 도보여행길이다. 보은군 관계자는 "속리산둘레길 보은 구간에서도 말티재 숲길을 으뜸으로 친다"며 "사계절 풍광은 물론, 속세와 선계를 나누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이야깃거리까지 풍성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압도적 비율의 방문자들은 걷는 대신 자동차로 말티고개를 찾는 게 현실.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조성 공사가 한창인 동서트레일 55개 구간 중 말티재를 품은 27구간과 이후 달천 들녘을 따라 이어지는 28구간을 지난달 29일 걸었다. 동서트레일 구축 사업 마무리가 가시화하자 마을에 생길 변화에 달뜨기 시작한 곳이다.
동서트레일은 충남 태안에서 경북 울진까지 기존의 숲길과 임도, 골목, 농로 849km를 잇고, 이어 만드는 국토 횡단 숲길이다. 총 55개 구간 중 25~29구간이 보은을 지나고, 그중 27~29구간은 속리산둘레길과 같이 간다.

세조가 말 갈아탄 '말티재'
동서트레일은 말티재 아래에 있는 마을, 장재리에서 속리산둘레길과 만난다. 장재리 경로당 앞 '대궐터' 비석이 선 곳이다.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던 행궁이 있던 곳이다. 본격적인 숲길에 오르기 전, 경로당 화장실 문을 두드리자 굳게 잠겨 있다. 대신 그 옆에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속리산둘레길 화장실 1.8km.' 같이 길에 나선 최원석 숲길등산지도사는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개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지역 사람들이 숲길의 미래 가치, 지역을 찾는 백패커들이 가져올 변화를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장재저수지를 돌아 2km가량 걸으면 본격적인 말티재 숲길이 나온다. 꼬불꼬불 12굽이 도로 근처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는 숲길이다. 곳곳에 계단이 설치됐고, 평석이 깔려 있어서 사실 구두를 신고 걸어도 될 정도다. 또 둘레길 안내판과 '미끄럼 주의' 입간판은 적절한 곳에 설치됐다. 최 지도사는 "이렇게 친절한 숲길은 보기 힘들 것"이라며 "동서트레일 조성 사업비가 이 숲길 관리에 더해지면 더 안전하고 친절한 숲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은군은 올해 총 37억 원을 투입해 관내를 지나는 68km의 동서트레일 숲길을 다듬는다.

말티재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길이 너무 가팔라 가마(연)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 말티재가 됐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조부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을 넘는데, 길이 질퍽거려 얇은 돌(박석)을 깔았는데,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박석재라고도 부른다. 보은 구간 동서트레일 중 최고난도 숲길이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넘었다.

100여 명 사는 마을 분교서 하룻밤
실제 동서트레일은 2023년 조성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빗댄 ‘한국판 산티아고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 지도사는 그렇게 불리면 손해라고 했다. “‘한국판 산티아고’ 프레임에서 벗어 나야 동서트레일이 한국을 대표하는 숲길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두 길은 다르다. 산티아고 길은 초원과 마을ㆍ포장도로 비중이 크고, 동서트레일은 세계가 ‘기적’이라고 평가하는 ‘산림녹화’ 이후 축적된 숲길 중심의 길이다. 또 종교적 맥락이 강한 스페인의 길과 달리 동서트레일은 5개 광역단체, 21개 지자체, 225개 마을을 지나는, 지역 문화와 역사, 자연 중심의 숲길이다. 지역 살리기와 관련해선 동서트레일처럼 광역지자체 5개를 아우르는 매개체는 흔치 않다.

12굽이 도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말티재 전망대를 뒤로 하고 고개를 내려오면 솔향공원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70여 가구 100여 명이 사는 상판리 마을을 만난다. 고개 하나 넘었을 뿐인데, 동서트레일에 대한 기대감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폐교한 법주분교를 활용 국립등산학교를 짓는 공사도 진행 중이었는데, 마을 주민 이모씨는 “법주사 관광지구로 가는 차량들만 드나들었지만, 내려서 걷는 사람은 없었다”며 “앞으로 걸어서 마을을 지나고 또 분교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돈 쓰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며 웃었다. 제주올레길이 연간 6,630억 원의 소비 지출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허황된 기대는 아니다.
정이품송공원에 '한글'이 얽힌 사연
백패킹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짐의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 최 지도사는 "얼마를 더 걸으면 물을 채울 곳, 야영할 수 있는 곳 등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짐 무게를 줄일 수 있다"며 "백패커들이 이 마을에서 쉬어가면서 다양한 경제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백패커들이 체류하게 될 법주분교에서 속리산 법주사가 있는 관광지구까지는 2km, 정이품송까지는 700m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동서트레일은 분교를 기점으로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진다. 최 지도사는 “여기까지 와서 정이품송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가게 하는 건 모두에게 손해”라며 “지선을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정이품송까지 닿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이품송은 세조가 탄 가마(연ㆍ輦)가 이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가지에 걸리자 가지를 스스로 올려 풀어줬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그 자리에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이품송을 만나고 숲길로 돌아오는 길 오른쪽으로 달천변에 조성된 '논란의 공원'을 볼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저자이자 한글 창제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신미대사가 속리산 복천사에 입산해 입적할 때까지의 일대기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재조명하기 위해 보은군이 2018년 조성한 공원이다. 최 지도사는 "이곳 사람들은 신미대사가 범어(산스크리트)에 정통했고, 한글 창제 8년 전에 범어에서 28자를 따 한글을 만든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공원 이름은 '훈민정음 마당'이었다가, 한글학회 등의 반발로 '정이품송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산림청 관계자는 “캐나다의 웨스트코스트 트레일, 미국 존 뮤어 트레일 등 광활한 대자연을 낀 외국의 탐방로에 비할 바 아니지만, 이처럼 마을마다 특색이 있고 소소한 재미와 먹거리, 볼거리들을 수시로 만나는 아기자기한 길이 동서트레일”이라며 “한국 고유의 맛과 멋이 있는 숲길로 다듬어 또 다른 K 콘텐츠로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은=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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