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혁 기자, 미 25사단 6·25 참전용사 만나다] (상) 마산방어전투 참전 ‘허브 코바야시‘
1950년 여름, 한국을 구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달려온 전사들이 있었다. 미 제25보병사단이다.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충분한 준비 시간조차 없이 6·25전쟁에 투입됐다. 부산 함락을 노리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해야 했다. 방어선은 계속 밀렸고, 전선은 결국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미 25사단은 낙동강 전선 요충지인 마산 사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이 위태로워지고, 부산이 흔들리면 대한민국 자체가 존망의 기로에 놓인 시점이었다. ‘마산방어전투’는 그렇게 전쟁의 분수령이 됐다. 그러나 그날을 직접 건너온 얼굴들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경남신문은 창간 80주년을 맞아 미 25사단 소속 6·25전쟁 참전용사 두 명을 하와이에서 만났다. 이 가운데 한 명은 마산방어전투에 직접 참여한 생존 참전자다. 지역 언론이 미 25사단 참전용사를 직접 인터뷰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마산방어전투는 전쟁사 속 한 장면이기 이전에, 이 지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역사다. 경남신문이 잊힌 전투의 재조명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7세 징집 ‘미25사단’ 입대
부산 함락 인민군 저지 위해
‘낙동강 전선’ 요충지 사수
첫 전장 ‘마산’서 죽음 목격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후퇴
1951년까지 5개 전장 누벼
“9년 전 한국정부 초청 연설
전쟁의 아픈 기억 사라져
전우들 희생 기억해 줘 감명”
“한국을 생각하기도 싫었다.”
허브 코바야시(94)씨는 마산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봤다. 6·25전쟁 참전 기간에 수많은 죽음을 본 그는 한국을 잊고 싶었다. 그래도 잊힌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데 취재진과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요청으로 인터뷰를 허락했다. 고령의 나이로 여러 전투에 참전했지만, 대다수 기억하지는 못 했다. 그래도 첫 전장인 마산은 뚜렷이 기억해냈다.

◇일본계 미국인의 참전= 코바야시씨는 일본인 부모님을 둔 일본계 미국인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기에 6·25전쟁에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많이 참전했다. 하와이 와이키키 중심가에 참전한 일본계 병사들을 추모하는 공원이 있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많았다. 그도 학생이던 17세 때 징집되어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7월 미 25사단 소속 통신병으로 참전하게 됐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통신 훈련을 마치고, 알래스카를 거쳐 일본으로 이동했다. 일본 규슈에서 배를 타고 8월 초 부산에 도착했다. 통신병으로서 통신선을 설치하거나 암호를 해독하는게 주 임무였다.
“미 25사단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인민군이 가장 남쪽으로 깊숙이 침투했을 때였습니다. 그들을 막는 게 저희의 목표였죠. 부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저희를 따라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곧장 기차를 타고 마산(진동리)으로 갔습니다.”


◇죽음의 ‘마산’= 그가 마산에 도착한 날은 8월 3일.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그날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일지에는 “오전 7시 진지 맞은편 높은 산에서 인민군 200명이 공격했다. 박격포와 자동화기가 주무기였다. 공격은 낮 12시까지 이어졌으며, 아군은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해 반격했다”고 기록됐다. 그는 인민군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은폐했고, 마산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고지로 올라가려 하면 인민군의 매복에 큰 피해를 봤다. 그는 적을 ‘굉장히 똑똑한 자들. 싸울 줄 알았다’고 평가했다.
마산에 온 지 이튿날 코바야시씨는 이곳에서 처음 죽음을 봤다. 그와 미국에서 훈련을 같이 받은 전우와 통신 임무 수행 중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 엄폐를 했고, 옆을 살펴 봤는데 전우가 턱에 총을 받고 쓰려졌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크게 놀랐다. 전우는 곧 숨을 거뒀다. 전장에 배치된 지 단 며칠 만에 전우를 눈앞에서 잃은 것이다.
그는 전우가 쓰러진 모습을 생생히 묘사하며 괴로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끔찍했어요. 총알이 전우의 턱을 관통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눈앞에서 죽음을 직접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
미군이 마산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인민군의 ‘와이어 트랩’이었다. 인민군들은 마산 곳곳에 팽팽하게 철선(와이어)을 걸어 오픈탑 차량(지프·트럭·오토바이)을 타는 미군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려는 와이어 트랩을 설치했다. 그는 수많은 미군들이 이 와이어에 목이 잘려 죽었다고 증언했다. 임시방편으로 차량 앞쪽에 이 와이어를 자를 수 있는 대형 칼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는 수십년이 흘러도 기억이 생생한지 직접 그림을 그려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놀랍도록 발전한 한국, 기쁘다”= 마산방어전투 이후에도 코바야시씨는 미 25사단의 북진과 후퇴, 그리고 1951년 전선 재정비 국면까지 전장을 누볐다.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돌파를 시작해 북상하면서, 미 25사단도 이 공세의 한 축으로 전선을 북쪽으로 이동했다. 코바야시씨는 이 북진 과정에서 압록강(Yalu River) 인근 고갯길 정찰작전을 기억해 냈다. 중공군의 습격 직전, 그는 모스 부호로 전달된 사단 본부의 반복 송신을 해독해 ‘철수’ 지시를 확인했고, 정찰대는 즉각 후퇴해 포위 위험을 피했다고 회고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방면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 공세로 후퇴하게 된 전황은 전쟁의 주요 전환점으로 꼽힌다.
코바야시씨는 1951년 12월까지 마산방어전투 외에도 공식 전투 5개에 참전했다. 전투 공로로 금성·은성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한국을 떠나 고향인 하와이로 돌아왔다. 전쟁의 상처가 깊었던 그는 대학에 진학해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생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은퇴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어 했다. 전쟁의 기억이 너무 괴로웠던 만큼 ‘한국’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기 싫었다. 한국과 관련된 뉴스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9년 전 대구를 찾았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전승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행사에서 한국 군인들이 ‘마산방어전투에 참전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 혼자 손을 들었죠. 제가 대표로 행사에서 짧은 연설을 했는데, 그 뒤로 한국에 대한 아픈 기억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의 폐허가 된 나라가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한국군 사단장이 감사하다고 인사한 기억도 납니다. 저와 전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코바야시씨는 참전 후 첫 전투였던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는 기념사업회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먼 한국에서 미 25사단의 전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했다. 그는 “2028년에 기념관이 지어진다고요? 정말 놀랍습니다. 꼭 한국을 찾아 그때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노병은 거수경례로 작별 인사를 한 뒤 다시 요양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와이 ‘미 제25사단 기지’ 가보니/ 마산 지명 ‘서북산’ 적힌 이승만 대통령 표창 보관
마산방어전투 중요성 등 기록… 본지 첫 공개
“저희는 마산을 지킨 영웅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전투를 한국에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잊히지 않은 전투= 지난해 11월 25일, 하와이에 있는 미 육군 제25보병사단 기지를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회장 배대균)와 함께 찾았다. 사단 최고 원사 계급자인 커리 주임원사가 기념사업회와 취재진을 맞이하며 이같이 말했다. 사단 주임원사가 직접 나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단 본부에 들어서자 ‘Unit Citations(부대 단위 훈장 및 표창)’ 전시 시설에 ‘Masan(마산)’이 표시돼 있었다. 한국에서는 잊힌 전투를 미 25사단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배대균 회장은 6·25전쟁 지도를 가리키며 사단 관계자들에게 “마산은 지리적으로 부산과 가까워 전쟁 초기 명운을 건 중요한 지역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커리 주임원사는 “미 25사단이 수많은 희생을 치른 마산에서 직접 하와이까지 와준 것은 우리에게 큰 영광이다”라며 “기념사업회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커리 주임원사는 사단 배지를 배 회장에게 선물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미 25사단 기념관에서는 신병들이 기념사업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담 엘리아 사단 역사가는 “마산방어전투는 사단 주요 전투 중에서도 손꼽히는 중요한 전투였고, 희생도 컸던 곳이다. 이를 잊지 않고 한국에서 기억하고 알리는 분들이 있다”라고 기념사업회를 소개했다. 신병들은 방문단을 향해 “Thank you(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박수를 보냈다.

◇70여년 만에 드러난 대통령 표창장= 자료실에서는 1953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 25사단에 수여한 부대 표창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2년 전 경남신문이 하와이 취재 중 1950년에 수여한 대통령 표창을 처음 공개한 데 이어 두 번째 성과다. 표창장에는 대통령 인장과 함께 구체적인 마산 지명인 ‘서북산’이 적혀 있으며, 전투의 중요성이 명확히 기록돼 있었다. 마산방어전투 이후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북진한 미 25사단의 활약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배대균 회장은 “전쟁이 끝난 뒤 미 25사단에 표창장을 준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 하와이 방문의 큰 성과다”라며 “휴전 이후 작성된 표창장에도 마산 지명이 기재된 것은 그만큼 이 전투가 중요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028년 개관 앞둔 기념관, 미 25사단도 기대= 사단 측은 2028년 개관 예정인 마산방어전투기념관에 대한 기대도 내비쳤다. 아담 엘리아 사단 역사가는 “기념관은 전투를 기억하고 기리는 데 매우 중요한 장소다.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의 이야기와 마산방어전투가 전쟁 흐름에 끼친 영향이 잘 담기길 바란다”라며 “기념관이 문을 열면 꼭 방문하고 싶다. 미래 세대가 마산방어전투를 배우고, 학술적으로도 더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박준혁 기자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