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예술로 닫고 예술로 여는, 가장 인간적인 시간

조정윤 부산문화재단 문화시민본부장 2025. 12. 3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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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윤 부산문화재단 문화시민본부장

며칠 전 조금은 특별한 송년회를 보냈다. 번잡한 연말 회식이 아니라, 지인의 인문학 서원에 모인 열다섯 명 남짓한 문화예술 관계자들의 자리였다. 1차로는 간단한 식사와 반주를, 2차로는 서원에서 차와 소박한 음식, 예술과 문학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국악과 기타 연주가 자연스럽게 밤을 채웠고, 이야기는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이어졌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공간에서, 문화로 한 해를 보내는 시간이었다.

그 송년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연말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시간’으로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한 해의 끝을 반드시 시끌벅적하게 넘기지 않아도 예술과 이야기, 음악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쩌면 예술은 늘 이렇게 조용하지만 깊게 우리의 시간을 정리해왔는지도 모른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면 가장 분주해지는 곳이 공연예술계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있듯, 예술에도 계절이 있다. 그중에서도 12월은 공연예술이 가장 또렷하게 빛나는 시기다. 연말이 되면 무대는 한 해의 기억을 정리하고, 관객은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겨울 공연의 상징은 단연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연말 흥행을 책임지는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도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매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12월을 대표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무대는 관객을 잠시 어린 시절로 되돌리고, 한 해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상상력을 선물한다.

연말의 또 다른 풍경은 송년 음악회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해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골 레퍼토리다. 장엄한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면 객석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올드 랭 사인’이 흐르는 순간, 음악은 숫자의 교체를 알리는 시계바늘을 넘어 한 해의 묵은 감정을 씻어내고 정화하는 의식이 된다. 장르는 달라도 전 세계의 연말 공연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같다. 예술로 시간을 정리하고, 예술로 마음을 묶는 일이다.

그리고 1월 1일,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열리는 이 공연은 오늘날 전 세계 수천만 명이 지켜보는 ‘지구촌의 첫 공연’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라데츠키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관객들의 손뼉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순간 국경과 언어의 경계는 잠시 사라진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가장 평화로운 새해 장면이다.

필자가 공연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시절, 지금도 잊지 못하는 연말 프로그램이 있다. 당시 일하던 기획사는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송년음악회와 해돋이 여행을 결합한 행사를 만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서울역에서 열차에 올라 동해로 향했고, 정동진에서 떠오르는 새해 첫 해를 함께 맞았다. 그날 정동진의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마주한 붉은 해는, 내게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예술과 삶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그 경험은 이후 내가 문화정책과 예술 기획의 길을 걸어오게 한 조용한 원동력이 되었다.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연말을 술자리로만 보내는 풍경도 단순히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공연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를 바란다. 같은 무대를 바라보는 경험은 세대 간의 대화를 열고, 공연은 가족의 기억을 오래 남긴다. 며칠 전 인문학 서원에서 보낸 그 조용한 송년회처럼, 예술은 늘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 곁에 머문다. 그리고 그 작은 경험들이 모여, 한 사회의 시간을 조금 더 품위 있게 만든다.


예술로 한 해를 닫고 새해를 여는 일,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가장 인간적으로,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마주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거창한 공연장이 아니어도, 값비싼 티켓이 없어도, 우리는 일상의 공간에서 예술을 통해 서로의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작은 연주회, 책을 매개로 한 대화, 일상 속 예술을 집 근처에서 즐기는 경험만으로도 우리의 하루와 계절은 달라진다. 예술은 언제나 삶의 곁에서, 우리 각자의 시간을 천천히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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